세계지식포럼에서의 존 미어샤이머와 로빈 니블렛의 관점 정리
미·중 양극 체제 속에서 대한민국을 비롯한 APEC 국가들이 처한 현실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두 강대국의 경쟁 구도와 그에 따른 역학, 그리고 지정학적 관계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이는 개인적 기록을 겸해 핵심 요지를 간결하게 남기려는 목적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토론을 듣는 내내,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두 석학의 진단 앞에서 적잖이 숨이 가빠졌습니다. 애써 외면해 왔던 현실이 마침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듯한 감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국제 질서의 변화와 APEC의 미래: 존 미어샤이머와 로빈 니블렛의 관점
이는 세계지식포럼(WKF 2025, 서울)에서 열린 「국제질서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세션의 핵심 논의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렛 전 채텀하우스 소장이 참여하여, 급변하는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APEC의 역할과 구조적 한계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습니다.
두 연사는 현재 국제 질서가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에서 미·중·러가 경쟁하는 다극체제로 전환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APEC과 같은 기존 국제 제도의 영향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있다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강대국 간 안보 경쟁이 심화되면서, 과거 단극체제 하에서 유지되던 포괄적 국제 질서가 붕괴되고, 세계가 미국 중심 질서와 중국 중심 질서라는 두 개의 ‘제한적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결과 APEC이나 WTO와 같은 제도들은 기능이 축소된 ‘얇은 제도’로 전락하고 있다는 평가를 제시했습니다.
니블렛 전 소장 역시 미중 간 신냉전 구도가 APEC 내부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보호무역의 확산과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이 역내 경제 통합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하면서도, 동시에 APEC이 미중 간 완충 장치로 기능하거나, 중견국들이 에너지·녹색 기술 분야에서 제한적이나마 협력을 심화시킬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두 연사는 한국과 같은 중견국의 전략적 선택지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한국은 안보와 핵심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의 연대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APEC과 같은 다자적 틀을 활용해 강대국 경쟁이 초래하는 부정적 파급 효과를 완화하는 전략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제시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핵무기의 존재가 강대국 간 전면전을 억제하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이 유럽과 중동 문제에 전략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 단기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안정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는, 다소 제한적인 수준의 낙관론이 논의되었습니다.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현재 국제 질서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제도’, ‘질서’, 그리고 ‘강대국’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에서 분석을 시작합니다. 그는 APEC의 미래 또한 이러한 거시적 구조 변화의 틀 안에서만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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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도’와 ‘질서’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도란 회원국 간 상호작용을 규정하는 규칙의 집합체로서, APEC이나 NATO와 같은 조직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반면 질서는 이러한 개별 제도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형성된 하나의 구조, 곧 ‘제도의 집합(nest of institutions)’을 의미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APEC은 독립적인 조직이면서 동시에, 더 큰 국제 질서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 단위, 즉 빌딩 블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와 질서를 설계하고 실제로 운영하는 핵심 주체는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입니다. 강대국은 규칙을 만들고 제도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반면, 한국과 같은 중견국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기보다는 이미 형성된 질서 속에서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행위자에 가깝습니다.
아울러 국제 질서는 그 포괄 범위에 따라 구분될 수 있습니다. 국제적 질서는 체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강대국을 포괄하는 질서를 가리키며, 대표적인 사례가 유엔입니다. 이에 비해 제한적 질서는 특정 강대국과 그 동맹국들만을 포함하고,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강대국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형태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제한적 질서의 확산은 오늘날 국제 질서 변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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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냉전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제 질서의 변화를 세 단계로 구분해 설명합니다. 각 단계는 강대국 간 힘의 분포 변화와 그에 따라 형성된 질서의 성격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냉전 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이 각각 주도하는 두 개의 ‘제한적 질서’가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에서는 NATO, 유럽공동체(EC), IMF, 세계은행이 핵심 제도를 이루었고,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에서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코메콘(COMECON)이 대응 질서를 형성했습니다. 이 두 질서 사이에는 유엔과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같은 비교적 ‘얇은(thin)’ 국제적 질서가 공존하며 최소한의 관리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이어 단극체제 시기에는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던 제한적 질서가 사실상 전 지구적 국제 질서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전성기를 맞아 WTO와 APEC 같은 다자 제도가 활발히 작동했습니다. 미국은 중국의 WTO 가입을 허용하는 등 포용적 통합 전략을 통해 기존 질서 안으로 경쟁국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다극 체제에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가 주도하는 강대국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냉전기와 유사하게 다시 제한적 질서들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쿼드(Quad), 오커스(AUKUS), 한미일 동맹 강화를 통해 자국 중심 질서를 공고히 하는 반면, 중국은 브릭스(BRICS), 상하이협력기구(SCO), 일대일로(BRI)를 통해 대안적 질서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APEC, WTO, UN과 같은 기존의 국제적 질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약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어샤이머의 구분은 국제 질서가 단선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 아니라, 강대국 경쟁의 구조 변화에 따라 반복적으로 재편되어 왔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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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국제 질서의 구조적 전환이 APEC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APEC은 미국이 주도하던 단극체제라는 비교적 낙관적인 국제 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번성했지만, 오늘날의 다극체제에서는 강대국 간 안보 경쟁이 경제 논리를 압도하면서 그 존속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안보 논리가 경제 논리보다 항상 우선한다고 보며, “안보는 언제나 경제를 이긴다(Security always trumps economics)”는 점을 거듭 강조합니다. 강대국 간 안보 경쟁이 심화될수록, APEC처럼 모든 강대국을 포괄하는 포괄적 국제 제도는 필연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WTO의 사례를 듭니다. 2001년 미국이 중국의 WTO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WTO는 사실상 기능 마비 상태에 놓여 있다는 그의 표현은, 단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의 전환이 국제 경제 제도에 얼마나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미어샤이머는 APEC이 더 이상 아시아 지역의 번영과 안보를 동시에 촉진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고 평가합니다. 앞으로 국제 관계의 중심축은 APEC과 같은 다자 제도가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각각 주도하는 두 개의 ‘제한적 질서’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비관적 전망입니다.
로빈 니블렛 경은 미어샤이머 교수의 구조적 분석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APEC 내부에 이미 깊이 스며든 미·중 ‘신냉전’의 구체적 단층선을 보다 정밀하게 짚어냅니다. 그는 APEC을 한편으로는 단극체제 시기의 산물로,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지정학적 경쟁이 가장 첨예하게 전개되는 최전선으로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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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니블렛 경의 분석에 따르면, APEC은 탈냉전 시기의 낙관주의를 반영한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세계화가 인류의 보편적 미래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남긴 ‘메아리’이자, 동시에 그 시대가 남긴 ‘잔재’에 가깝다는 평가입니다.
APEC 공식 웹사이트가 여전히 내세우고 있는 ‘통합된 경제 시스템 구축’이라는 비전 역시 오늘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는 현재의 국제 질서를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이상을 상징하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한때 APEC이 전제로 삼았던 ‘절대적 이익’의 논리는 이미 힘을 잃었고, 그 자리를 국가 간 경쟁을 전제로 한 ‘제로섬’ 사고가 점차 대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APEC은 1989년 창설 이후 회원국들의 국내총생산, 1인당 소득, 교역량을 크게 확대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를 가능하게 했던 국제적 환경, 즉 비교적 안정적인 안보 질서와 개방적 세계화의 조건 자체가 이제는 근본적으로 변화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APEC은 과거의 성공 경험과 현재의 구조적 제약 사이에 놓인 제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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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니블렛 경은 APEC이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회원국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중 ‘신냉전’의 긴장과 균열이 조직 내부에 구조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분석합니다. 그는 이러한 경쟁의 단층선을 기술, 안보, 무역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구체화합니다.
먼저 기술 경쟁의 측면에서,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 대해 반도체 장비와 핵심 기술의 대중국 수출 제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윈윈’ 협력의 논리 아래 중국에 구축되었던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 자체를 흔드는 조치로, 이미 형성된 공급망의 지속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말레이시아의 데이터센터 기업들 역시 미국과 서방 기업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산 부품 사용 여부를 재검토해야 하는 압박에 직면해 있습니다.
둘째로 안보 전선에서는 APEC 회원국 간 갈등이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필리핀과 중국 사이의 남중국해 분쟁은 최근 더욱 격화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해 미국은 필리핀과의 군사 협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APEC 회원으로 등록된 ‘중화 타이베이’, 즉 대만은 미·중 전략 경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는 존재로, 경제 협력의 틀 안에서도 안보 긴장이 끊임없이 분출되는 지점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러시아 역시 APEC 회원국이지만, 다수 회원국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동시에 중국과 함께 BRICS와 SCO 등을 통해 대안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이중적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역 경쟁의 영역에서는 미국 내부의 변화가 APEC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 전반에서 세계화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면서 국가 개입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었고, 그 결과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약 1.5%에서 15% 수준으로 급등했습니다. 더 나아가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아세안 국가들이 활용해 온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 즉 중국 시장을 겨냥한 투자는 중국에 두고 미국 수출용 생산은 다른 아시아 국가로 분산하는 방식을 ‘우회 행위’로 규정하며 최대 40%의 관세 부과를 경고했습니다. 이는 APEC이 전제로 삼아 왔던 역내 경제 통합과 개방의 논리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조치로 평가됩니다.
이처럼 니블렛의 분석에 따르면, APEC은 협력의 장이자 동시에 경쟁의 무대이며, 미·중 전략 경쟁의 단층선이 기술·안보·무역 전반에 걸쳐 조직 내부에 깊이 새겨진 제도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긴장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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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니블렛 경은 전반적으로 비관적인 국제 환경 속에서도, APEC이 여전히 수행할 수 있는 몇 가지 건설적이고 실질적인 역할이 남아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의 논지는 APEC을 단기적 성과의 도구라기보다, 불확실한 전환기의 완충 장치이자 가능성의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선 그는 APEC이 ‘시간을 벌어주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미국의 탈퇴 이후에도 TPP 체제를 유지했던 사례처럼, 미국이 당분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더라도 APEC이라는 틀 자체를 존속시키는 전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국제 협력의 완전한 붕괴를 막고, 향후 미국 행정부의 정책 변화와 복귀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종의 ‘시간 벌기’ 전략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그는 하위 지역 협력의 강화를 중요한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설령 APEC 전체의 영향력이 약화되더라도, ASEAN 경제공동체나 RCEP과 같은 부분적 경제 통합 메커니즘을 통해 협력을 심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RCEP은 세계 GDP의 약 30%를 포괄하는 협정으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회원국 간 시장 개방과 규범 조율을 꾸준히 확대하며 실질적인 통합을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니블렛은 또한 APEC이 미·중 간 ‘소프트 브릿지’로 기능할 가능성에도 주목합니다. APEC 정상회의는 미·중 양국 정상이 직접 만나 갈등을 관리하고 위기 대응을 논의할 수 있는 드문 외교 채널 가운데 하나입니다. 2023년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의 회담은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향후 핵 군축이나 전략적 안정성 논의의 장으로 확장될 여지도 남아 있다고 평가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APEC을 ‘국제 사회’ 형성의 장으로 바라봅니다. 이른바 영국학파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수의 국가는 여전히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선호하고 있으며, 강대국 간 전략 경쟁과는 별개로 규범적 연대를 유지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 호주, 인도네시아와 같은 APEC 내 중견국들은 에너지 협력, 녹색 기술 표준, 기후 협상과 같은 기능적 영역에서 협력을 심화함으로써 관계망을 ‘더 두껍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로는 미·중이 주도하는 거대한 전략 경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인 경제 발전과 규범 기반 협력을 지속할 수 있는 대안적 가능성으로 제시됩니다. 니블렛의 진단에 따르면, APEC의 미래는 전면적 부활이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제한된 조건 속에서 의미 있는 기능을 수행하는 ‘관리된 지속’의 형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석학은 현재의 다극체제 속에서 한국과 같은 중견국의 전략적 선택지가 매우 제한적이라고 평가하며, 현실적인 대응 방안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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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로빈 니블렛은 공통적으로 한국의 행위 능력이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미어샤이머는 국제 질서는 강대국이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한국을 중국과 인접한 ‘최전선 국가(frontline state)’로 규정합니다. 그는 미국을 ‘무자비한(ruthless)’ 강대국으로 묘사하면서, 이러한 국가와 동맹 관계에 놓여 있는 현실 속에서 한국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은 매우 좁다고 지적합니다.
니블렛 역시 유사한 진단을 내립니다. 그는 한국이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limited choices)’ 상황에 처해 있으며,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압박받는 구조적 현실에 놓여 있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미·중 ‘신냉전’이 아직 명확한 규칙이나 안정된 질서 없이 전개되는 초기 단계라는 점에서, 중견국인 한국이 감내해야 할 불확실성과 전략적 제약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처럼 두 학자의 분석은 한국이 능동적으로 질서를 설계하기보다는, 강대국 경쟁이 만들어낸 구조 속에서 제한된 선택지를 관리하며 대응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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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행위 능력이 구조적으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 로빈 니블렛 경은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을 이상론이 아니라 현실적 선택의 차원에서 제시합니다. 그의 제언은 한국이 모든 영역에서 균형을 추구하기보다는, 분야별로 명확한 우선순위를 설정해야 한다는 점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우선 기술 영역에서는 미국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입니다. 니블렛은 중국이 반도체, 배터리, AI 등 거의 모든 첨단 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직접적인 경쟁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장기적 국익은 중국 시장보다는 미국과 동맹국 시장에 대한 안정적이고 우선적인 접근권을 확보하는 데 있으며, 기술 표준과 공급망의 핵심 축을 미국 중심으로 설정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한국이 미국에게 신뢰할 수 있는 투자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컨대 현대자동차의 미국 내 생산시설 확대와 같은 투자는 단기적으로는 비용 부담이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 정부와 산업계로부터 전략적 신뢰를 축적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판단을 넘어, 동맹 관계를 실질적으로 공고히 하는 정치·전략적 선택으로 평가됩니다.
아울러 글로벌 경쟁 환경 속에서 기술 협력의 심화도 중요한 과제로 제시됩니다. 니블렛은 원자력 분야에서의 웨스팅하우스와 같은 미국 기업과의 협력을 사례로 들며, 한국이 미국 기업들과 공동의 기술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중국의 글로벌 산업 공세에 집단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협력은 개별 국가의 대응을 넘어, 동맹 기반의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는 전략으로 이해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국이 규칙 기반 국제 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APEC 내에서는 에너지 협력과 같은 비민감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동시에 RCEP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중국과의 교역 채널을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균형 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안보와 핵심 기술에서는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되, 경제 전반에서는 선택적 협력을 유지하는 일종의 보완적 헤지 전략으로 제시됩니다.
니블렛의 이러한 제언은 한국이 강대국 경쟁을 관리해야 하는 중견국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중립을 지향하기보다 분야별로 다른 전략을 병행하는 현실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토론은 미·중 경쟁이 앞으로 어떻게 관리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러한 경쟁 구도가 동아시아의 미래에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지를 중심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먼저 경쟁 관리의 어려움에 대해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미·중 경쟁을 “추악하고 잔인하며 위험한 사업(a nasty, brutal, and dangerous business)”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미국이 단순한 봉쇄(containment)를 넘어 중국의 영향력을 되돌리려는 ‘역전(rollback)’ 전략을 시도할 가능성을 경고하며, 이러한 접근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38선 돌파와 같은 극도로 위험한 상황을 재현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강대국 경쟁이 고조될수록 오판과 충돌의 위험은 구조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분쟁을 억제하는 요인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미·중 양국이 보유한 대규모 핵무기 전력은 위기 확산을 억제하는 강력한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핵무기 사용이 초래할 파괴적 결과에 대한 인식이 공유될수록, 양측 모두 위기를 관리하고 전쟁으로의 비화를 피하려는 동기가 강화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이 지점에서 로빈 니블렛 경은 보다 제한적인 낙관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강대국들이 과거와 달리 압도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은 심각한 재정 적자와 부채 문제를 안고 있고, 중국 역시 인구 감소와 성장 둔화라는 구조적 제약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한국, 일본, 호주, EU와 같은 중견국들이 독자적인 협력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니블렛은 특히 BRICS 내부에서 인도가 수행하고 있는 이른바 ‘독약(poison pill)’ 역할에 주목했습니다. 이는 특정 강대국이 집단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내부 균형을 유지하는 기능으로, 중견국들이 이러한 전략적 행태를 참고할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미어샤이머 교수 역시 완전한 비관론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현재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특히 이스라엘–이란 갈등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하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가장 원치 않는 시나리오는 동아시아에서의 새로운 위기라고 진단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단기적 안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미국이 중동과 유럽 문제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불필요한 위기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 발언은 미·중 경쟁이 장기적으로는 구조적 긴장을 내포하고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강대국들의 부담과 제약이 역설적인 안정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출처: 국제질서는 어떻게 변화하는가?│존 미어샤이머(시카고대), 로빈 니블렛(채텀하우스) 대담 _ 세계지식포럼 https://youtu.be/7q09DpX2OqI?si=_E5UWvnVCIqcY4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