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뢰머의 『신의 발명』

고대 이스라엘 신관의 다층적 진화에 대한 이야기

by KEN

2024년 10월 28일, 토마스 뢰머 교수의 영상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강의의 주제는 「하나님의 기원」(The Origins of God)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바로 이 강의와 더불어 그의 대표 저서인. 『신의 발명』(The Invention of God)에 담긴 핵심 논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뢰머 교수의 견해는, 일반적인 신앙인의 감각에서는 다소 낯설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이자 주석가, 그리고 오랜 시간 문헌비평 연구를 축적해 온 학자의 결론이라는 점에서, 신앙의 유무를 떠나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의 학문적 문제 제기와 해석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지를 진지하게 이해하고 소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신앙은 질문을 피하는 데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감당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다는 생각합니다.



토마스 뢰머의 『신의 발명』 (The Invention of God)

_ 고대 이스라엘 신관의 다층적 진화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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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토마스 뢰머 교수의 『신의 발명』은,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가 믿고 있는 유일하고 초월적인 신, 곧 야훼(YHWH)의 개념이 처음부터 완결된 형태로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이 책이 밝히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야훼 신 개념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된 역사적 결과물이라는 점입니다.


뢰머 교수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히브리 성서를 가르쳐 온 성서학자로서, 문헌비평과 고고학 자료를 종합적으로 활용해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형성과 변화를 추적합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야훼 신앙은 단 한 번의 결정적 계시나 사건을 통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여러 ‘작고도 혁신적인 단계들’의 연속적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종교를 고정된 교리 체계로 이해하기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재구성되어 온 문화적·사상적 산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뢰머의 작업은 신앙을 부정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어떤 역사적 경로를 통해 오늘의 형태에 이르렀는지를 보다 정직하게 이해하려는 학문적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뢰머 교수가 사용하는 ‘발명(Invention)’이라는 표현은, 흔히 오해되듯이 야훼 신이 고대 이스라엘인이나 후대의 서기관들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거나 조작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발명이란,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과 종교적 경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형성된 결과, 다시 말해 점진적 구성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뢰머는 이 과정을 지질학적 퇴적층에 비유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 개념은 반복되는 경험과 위기를 거치며 새로운 층위를 쌓아 올리고, 때로는 전쟁이나 유배와 같은 역사적 충격에 의해 기존의 층위가 교란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서 텍스트는 단일한 신학 체계의 산물이 아니라, 이러한 퇴적의 흔적들이 겹겹이 남아 있는 복합적 구조물로 읽혀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야훼 신관이 어떻게 변화하고 확장되었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론적 단서를 얻게 됩니다.


학문적으로 볼 때, 뢰머는 성서 비평을 둘러싼 오래된 양극단의 입장을 모두 비판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는 성서의 기록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최대주의적 접근과, 반대로 성서를 역사 재구성에 거의 무가치한 문헌으로 치부하는 최소주의적 입장 모두에 거리를 둡니다. 대신 문헌학적 분석, 고고학적 자료, 그리고 비판적 해석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성서 안에 공존하는 역사적 기억과 신학적 재해석의 층위를 구분하려는 보다 균형 잡힌 연구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서를 신화로 해체하기 위한 것도, 역사서로 단순 환원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를, 역사와 신학이 긴장 속에서 대화해 온 살아 있는 전통으로 읽어내려는 시도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뢰머의 연구는 오늘날 성서학이 맞이하고 있는 방법론적 전환의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그는 오경의 기원을 네 개의 독립된 문서, 곧 J·E·D·P가 후대에 결합되었다는 고전적 문서설을 더 이상 충분한 설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야훼 신앙과 토라 전통이 문서설이 전제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하며, 역동적인 역사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뢰머가 고전 문서설을 대신해 제안하는 ‘퇴적층 모델’은 단순한 분석 도구의 변경이 아닙니다. 이는 성서 형성을 바라보는 인식론 자체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성서는 어느 한 시점에 완성된 문서들의 결합물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서기관들과 편집자들이 각자의 역사적 상황에 응답하며 덧붙이고, 수정하고, 재해석해 온 신학적 사유의 누적물입니다.


특히 이 모델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겪은 정치적 붕괴, 제국의 압박, 그리고 유배라는 역사적 위기를 핵심 변수로 주목합니다. 야훼 신앙의 변화는 추상적인 교리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이러한 극단적 현실 속에서 공동체가 자기 신앙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해 나간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진화는 외부 환경과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적응의 산물이라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뢰머의 퇴적층 모델은 문헌 비평과 고고학적 증거를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야훼 신앙의 형성과 변화를 사회사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훨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 틀을 제공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사막 신 야훼의 출현 (기원전 13세기 이후)


뢰머는 야훼 신의 기원을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야훼 신앙의 출발점은 정착 농경 사회가 아니라, 고대 근동의 유목민 사회와 사막 문화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야훼가 처음부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신으로 인식되었던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지역과 공동체의 경험 속에서 숭배되던 국지적(local) 신으로 출발했음을 시사합니다.


뢰머에 따르면, 야훼는 본래 이스라엘 민족 내부에서 탄생한 신이 아니라, 아라비아 북서부 사막 지역, 곧 미디안과 에돔 인근에 위치한 이른바 신격화된 산 전통에서 유래한 신이었습니다. 이 해석은 신명기 33장, 사사기 5장, 하박국 3장과 같은 고대 시가 전승들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이 본문들에서 야훼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 곧 시나이와 세이르에서 나타나며, 폭풍과 전쟁을 동반해 등장하는 강력한 신으로 묘사됩니다.


뢰머는 특히 야훼를 처음 숭배한 집단이 이스라엘 정착민이 아니라, 셈족 유목민으로 분류되는 미디안인이나 ‘샤수(Shasu)’ 집단이었을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이들에게 야훼는 성전 안에 갇힌 신이 아니라, 광야를 가로지르며 생존을 위협하는 자연과 직접 맞서는 폭풍의 신, 전쟁의 신, 곧 유목민의 삶과 생존을 좌우하는 초자연적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야훼가 본래 자연현상과 지리적 공간에 깊이 결합된 지역신(local deity)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스라엘이 훗날 야훼를 민족의 신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전투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적을 무너뜨리고, 백성을 위해 싸우는 신의 모습—이 오랜 시간 성서 전통 안에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요컨대, 뢰머의 분석에 따르면 야훼 신앙은 처음부터 완성된 초월적 일신 사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광야의 경험과 생존의 위기 속에서 형성된 강렬한 종교적 기억에서 시작되어,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재해석되고 확장된 신앙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뢰머는 야훼 신앙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입된 종교 현상이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이 남부 레반트 지역에서 정치 공동체로 형성되던 초기 단계에서, 그들이 섬기던 주된 신은 이미 가나안 판테온의 최고신 엘(El)이었습니다. 엘은 ‘창조자’, ‘아버지’로 불리며, 이스라엘 초기 신앙 정체성과 깊이 결합된 존재였습니다.


이후 야훼는 엘을 주신으로 모시던 이스라엘의 종교 체계 안으로 점진적으로 편입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야훼가 곧바로 최고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뢰머에 따르면, 초기 단계에서 야훼는 엘의 아들급 신적 존재로 이해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위계적 관계는 성서 전통 속에서 ‘엘’이 포함된 이름들—예컨대 이스라엘, 엘리야와 같은 이름들이 오랫동안 병존하는 현상—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훼는 엘에게 귀속되었던 칭호와 기능을 점차 흡수하고 대체해 나갑니다. 창조자, 구원자, 언약의 보증자라는 엘의 속성들이 하나씩 야훼에게로 이전되면서, 그는 마침내 이스라엘의 유일한 주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신의 이름이 바뀐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가 지역적 다신 체계에서 단일신 신앙으로 이동하는 결정적 역사적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뢰머의 분석에 따르면, 야훼 신앙은 고정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엘 신앙과의 긴장과 통합, 그리고 역사적 재해석의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점진적이고 역동적인 종교적 구성물이라는 것입니다.


야훼라는 이름의 기원을 둘러싼 문헌학적 논의는, 그가 어떻게 지역 신에서 보편적 신으로 전환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뢰머는 야훼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존재론적 선언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이나 특정 장소—이를테면 신격화된 산과 같은 지리적 실체—를 가리키는 명칭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출애굽기 3장에서 등장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이름 계시는, 야훼 신앙의 출발점이라기보다 후대의 신학적 재해석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본래 지리적·자연적 맥락을 지니고 있던 신명을,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선언으로 승화시킨 해석적 전환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훼의 이름, YHWH가 히브리어 동사 HYH(‘존재하다’)와 연결되는 방식은, 유배 이후 형성된 신학적 사유가 가한 의미의 재구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착 사회로 전환하고, 이어 바벨론 유배라는 역사적 충격을 경험하면서, 신학자들은 야훼의 비가나안적이고 모호한 이름을 오히려 보편적 존재, 곧 ‘존재 자체(Being itself)’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야훼는 더 이상 특정 지역이나 자연 현상에 묶인 신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창조주이자 유일신으로 재정의됩니다. 동시에 이 이름은 ‘발음할 수 없는 이름’으로 신비성과 경외를 더해 가며, 야훼 신이 보편 종교의 신으로 자리 잡는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게 됩니다.


요컨대 뢰머의 분석에 따르면, 야훼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신학적 역사이며, 그 변화의 궤적 속에서 이스라엘 종교가 지역적 신앙에서 보편적 신앙으로 이동해 가는 사상적 진화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혼합주의(Syncretism) 시대의 야훼


야훼가 이스라엘의 국가 신으로 자리 잡아 가던 초기 왕국 시대의 종교 현실은, 우리가 오늘날 성서 정경을 통해 접하는 순수한 유일신 신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뢰머는 이 시기를 한마디로 혼합주의의 시대라고 규정합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야훼 신앙은 다른 신앙 전통들을 완전히 대체한 배타적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신들이 함께 숭배되던 다신교적 환경 속에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뢰머는 고고학적 발굴 자료와 문헌 비평을 종합하여, 야훼가 유일신으로 자리 잡기 이전에 어떤 신들과 어떤 방식으로 함께 예배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복원해 냅니다.


뢰머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매우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야훼에게 여신 아세라가 배우자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아세라는 가나안 전통에서 다산과 풍요를 관장하는 여신, 곧 ‘하늘의 여왕’으로 불렸던 존재로, 농경 사회였던 이스라엘의 일상적 삶과 깊이 맞닿아 있었습니다.


이 주장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특히 쿰틸렛 이즈루드와 키르벳 엘-콤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야훼와 그의 아세라에게 복이 있기를”이라는 문구를 담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야훼와 아세라가 신성한 부부, 혹은 최소한 결합된 신적 실체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뢰머에 따르면, 이러한 아세라 숭배는 유배 이전까지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신앙 관행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나중에 성서가 편집되는 과정에서 ‘우상 숭배’라는 이름으로 재규정되고,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경을 통해 접하는 야훼 신앙은 이미 정화되고 선택된 결과이지, 초기 이스라엘 종교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뢰머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정경 이전의 이스라엘 신앙은 본질적으로 다신교적 토양 위에서 형성된 야훼 중심의 일신 숭배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절대적 유일신 사상은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야 정립된 신학적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성서를 더 이상 ‘처음부터 완성된 신학 체계’로 읽기보다, 갈등과 선택, 배제와 재해석을 거쳐 형성된 신앙의 역사적 기록으로 읽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뢰머는 솔로몬 시대 예루살렘 성전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성서적 서사와는 상당히 다른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초기 예루살렘 성전은 처음부터 야훼만을 위한 전용 성소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히려 그 기원은 태양신 샤마쉬에게 봉헌된 성소였고, 이후 정치적·종교적 통합의 과정 속에서 점차 야훼 신앙의 중심 성소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전이 곧바로 ‘순수한 야훼 신전’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뢰머는 성전 내부에서 상당 기간 동안 다른 신들을 향한 제의가 병행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 성전 안에 야훼의 신상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의 계명은 기존의 종교 관행을 전면적으로 뒤집는 매우 급진적인 개혁 선언이었으며, 이는 유일신 신앙이 기존의 다신교적 전통을 정화하고 재구성해 가는 과정의 한 장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야훼가 가나안 지역에서 다른 신들, 특히 바알 계열의 신들과의 경쟁 속에서 주신의 자리를 확보해 갔다는 점입니다. 뢰머는 열왕기상 16장에서 19장에 등장하는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의 대결 이야기를, 단순한 신앙 투쟁담이 아니라 역사적 기억의 흔적으로 읽습니다. 즉, 야훼가 한때 ‘바알’—곧 ‘주인’, ‘지배자’—로 불리던 시기의 기억이 이 이야기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야훼는 페니키아의 바알 멜카르트와 같은 강력한 신들과 경쟁하면서, 그들의 속성과 기능을 점진적으로 흡수해 나갔고,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유일한 국가 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시기의 야훼는 이미 완성된 유일신이 아니라, 다신교적 세계 속에서 독점적 지위를 획득해 가는, 말 그대로 ‘진화 중인 신’이었습니다.


뢰머가 보기에, 바로 이 혼합주의적 토양 위에서 후대의 급진적인 유일신 사상이 형성됩니다. 다시 말해, 유일신 신앙은 갑작스러운 단절의 산물이 아니라, 경쟁과 흡수, 정화와 재해석을 거쳐 서서히 형성된 역사적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뢰머는 성서가 제시하는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를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야훼 신앙의 초기 단계에 분명히 존재했던 다신교적·혼합주의적 요소들—예컨대 아세라와의 공존, 야훼 신상의 존재 가능성, 그리고 엘(El)과의 위계적 관계—은 후대의 유일신론자들이 ‘유일한 야훼 신’이라는 이미지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되거나, 부정적인 의미로 재해석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 유배 이후의 편집자들은 야훼를 절대적 유일신으로 확립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종교적 과거를 다시 서술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종교적 다양성과 공존의 현실은 ‘이교적 일탈’이나 ‘우상 숭배의 역사’로 재구성되었고, 다신교적 전통은 철저히 악마화되거나 성서 서사 속에서 지워지고 왜곡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뢰머는 성서를 단순한 역사 연대기나 사실 기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성서는 유배 이후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작성한 정치적·신학적 선언문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서는 과거의 종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문서라기보다, 정화되고 일원화된 신학 질서를 선포하고 정당화하는 텍스트로 기능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뢰머의 연구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는 무엇을 침묵했고, 무엇을 삭제했는가”를 묻습니다. 바로 이 질문을 통해, 그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지녔던 실제 역사적 복합성과 다층성을 다시 복원하려는 시도를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제국주의 시대의 위기와 신앙의 중앙집권화 (기원전 7세기)


야훼 신앙이 지역적이고 혼합적인 형태를 벗어나, 본격적인 유일신 신앙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기원전 8–7세기에 전개된 앗시리아 제국의 팽창과 그로 인한 정치적 위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위기는 단순히 국가의 생존 문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종교적 정체성을 다시 묻고, 신학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도록 압박하는 촉매제로 작용했습니다.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에게 결정적인 충격이었습니다. 강대국 앗시리아의 압도적인 패권 앞에서, 유다는 더 이상 기존의 종교적 다원성을 유지할 수 없었고,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야훼 신앙의 독점화, 그리고 예루살렘 중심주의는 급속히 강화됩니다.


유다의 정치·종교 엘리트들은 생존 전략으로 종교 체계의 재편을 선택했습니다. 그 핵심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중앙집권화였습니다. 지방 성소들은 폐쇄되었고, 모든 제의와 희생은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허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기원전 7세기 후반, 요시아 왕의 개혁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요시아 개혁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아세라 숭배를 비롯한 비(非)야훼적 요소와 신상 숭배를 철저히 제거하고, 야훼만을 유일한 ‘정통 신’으로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 위기 속에서 종교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재구축하는 핵심 장치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예루살렘은 단순한 수도가 아니라, 야훼의 통치가 유일하게 구현되는 신성 공간으로 재정의됩니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혁신은,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언약’, 곧 조약이라는 정치·법적 틀로 재구성한 점입니다. 뢰머는 이 언약 개념이 앗시리아 제국의 종주권 조약 모델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합니다.


앗시리아의 조약은 강력한 종주 왕과 복속된 속국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며, 절대적 충성과 복종, 그리고 불순종 시의 가혹한 저주를 명시하는 문서였습니다. 유다의 서기관들은 이 정치적 형식을 신학적으로 전유하여, 야훼를 제국의 왕을 넘어서는 우주적 종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 새로운 신학에서 백성은 야훼에게 전적인 충성을 요구받았고, 계명 준수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충성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불순종은 곧 국가적 파멸로 해석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약 신학은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서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이 문헌들은 예루살렘 중심 예배와 야훼의 유일 주권을 정당화하는 정치적·신학적 프로그램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결국 유다는 앗시리아 제국의 지배 구조를 신학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외부 제국에 대한 복종을 야훼에 대한 종교적 복종으로 치환했습니다. 앗시리아 왕에게 요구되던 충성은 이제 야훼에게 바쳐지는 절대적 헌신으로 재구성되었고, 야훼는 모든 제국의 왕들을 초월하는 진정한 주권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야훼 신앙은 더 이상 지역적 신앙에 머물지 않고, 역사와 제국의 질서를 해석하고 심판하는 보편적 신학 체계로 변모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훗날 유대교의 신정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사유의 토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보편적 유일신론의 탄생 (기원전 6세기 이후)


야훼 신앙의 가장 급진적이고 결정적인 변혁, 다시 말해 뢰머가 말하는 ‘신의 발명’이 완성되는 순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유배라는 대재앙 속에서 찾아옵니다. 유다 왕국의 붕괴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종교적으로 보면 완전한 절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위기가, 역설적으로 야훼 신앙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당시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볼 때 야훼의 패배를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왕권은 무너졌고, 성전은 불탔으며, 약속의 땅은 상실되었습니다. 신의 임재를 상징하던 모든 기둥이 동시에 붕괴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배된 유다 공동체는 이 사건을 단순한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야훼가 패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재해석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야훼는 더 이상 왕과 성전에 의존해 현존하는 신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라져도 여전히 살아 계신 신으로 재정의됩니다.


유배 공동체는 바빌론이라는 이방의 땅에서도 야훼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야훼를 특정 장소와 영토, 성전이라는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는 신학적 혁명이었습니다. 뢰머는 바로 이 유배 경험이 야훼를 지역신에서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주권자로 격상시킨 결정적 계기였다고 평가합니다. 이제 야훼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수호신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는 절대적 주권자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유배기 신학의 핵심 혁신은 야훼를 민족신에서 우주적 창조주로 재정의한 데 있습니다. 바빌론의 최고신 마르둑과의 종교적 경쟁 속에서, 야훼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선포됩니다. 이는 성전이나 영토 없이도 모든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신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유배 이후 귀환한 공동체는 이 신학을 더욱 체계화합니다. 야훼는 더 이상 특정 민족이나 지역에 속한 신이 아니라, 단일하고 보편적인 유일신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뢰머는 이 유일신론의 확립을 단순한 교리적 진보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배 공동체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생존 전략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야훼가 바빌론의 신들보다 약한 신으로 이해되었다면, 유다 공동체는 종교적·문화적 해체를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훼를 우주의 창조주이자 역사의 심판자로 재정의함으로써, 유배의 비극은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공의로운 심판으로 해석되었고, 공동체의 신앙과 정체성은 오히려 재건될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야훼가 보편적 신으로 격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편성이 유다 공동체와의 특별한 언약 관계 속에서 이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모든 인류의 창조주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백성”과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는 신으로 고백됩니다.


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긴장 관계는 유배 이후 유일신론의 핵심 특징이 되었고, 이후 유대교 신학의 구조적 토대로 자리 잡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야훼 신앙의 최종적 형태—초월적이며 유일한 신—이 역사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정리하자면...



토마스 뢰머의 『신의 발명』은 야훼 신앙이 처음부터 완성된 유일신 개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역적 자연신에서 출발해 보편적 유일신으로 재구성되기까지의 복합적 진화 과정을 거친 역사적 산물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줍니다. 그는 야훼가 셈족 유목민들의 산신으로 시작해, 가나안의 다신교적 혼합주의 속에서 다른 신들과 공존하고, 앗시리아 제국의 압박 아래 정치‧신학적 중앙집권화를 거쳐, 마침내 바빌론 유배라는 절망의 경험 속에서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신으로 재정의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추적합니다.


뢰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성과는, 성서의 신학적 서사를 신앙 고백으로만 읽지 않고, 그 안에 축적된 역사적 퇴적층으로 읽어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성서가 단일한 교리 문서가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반복된 신학적 재해석의 결과물임을 보여 주며, 그 과정을 통해 야훼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구체적으로 복원합니다.


특히 그는 세 가지 결정적 전환점을 제시합니다.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 기원전 7세기 후반 요시야 개혁, 그리고 기원전 587년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 사건들은 단순한 정치사적 변곡점이 아니라, 야훼 신앙이 새롭게 정의되고 재구성되는 신학적 실험실이었다는 점을 그는 강조합니다.


이 점에서 『신의 발명』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사를 다룰 때,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학적 분석, 그리고 비판적 성서 해석을 통합적으로 결합한 모범적인 연구라 할 수 있습니다. 뢰머는 야훼 신앙의 기원을 계시나 신화로 단순 환원하지 않고, 역사적 경험과 인간의 해석이 축적된 결과로서의 ‘신 개념의 진화’를 제시함으로써, 종교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줍니다.


뢰머의 핵심 개념은 ‘점진적 구성’입니다. 야훼 신앙은 단 한 번의 계시나 신화적 사건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위기와 신학적 재해석의 반복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야훼의 정체성은 네 단계를 거쳐 오늘날의 유일신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야훼는 아라비아 북서부 사막 지역에서 숭배되던 폭풍과 전쟁의 신이었습니다. 미디안인과 샤수로 대표되는 유목민 집단이 신격화된 산과 결부시켜 섬겼던 신으로, 이 시기의 야훼는 철저히 자연과 지리적 공간에 결합된 지역 신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스라엘 왕국의 형성과 함께 야훼가 가나안의 최고신 엘과 결합된 혼합주의적 신앙 체계 안으로 편입됩니다. 이 시기 야훼는 엘의 아들이거나 종속적 신으로 이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여신 아세라와 함께 숭배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신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로, 쿰틸렛 아즈루드와 키르벳 엘콤의 비문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요시야 왕 시대, 곧 기원전 7세기 후반입니다. 앗시리아 제국의 압력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 야훼는 유다의 유일한 합법적 주신으로 중앙집권화됩니다. 예루살렘은 유일한 숭배 중심지로 재정의되고, 신명기 문헌이 형성됩니다. 이때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앗시리아식 종주권 조약을 변형한 언약 모델로 재구성되며, 이는 종교 개혁이자 동시에 국가 통합을 위한 정치‧신학적 혁신이었습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는 바빌론 유배 이후입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과 성전 파괴라는 대재앙 속에서, 야훼 신앙은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유일신론으로 완성됩니다. 유배 공동체는 역사를 야훼의 패배가 아니라, 그의 주권적 심판으로 재해석했고, 왕과 성전, 영토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작용하는 우주적 창조주로 야훼를 이해하게 됩니다.


결국 뢰머가 제시하는 이 네 단계는, 야훼가 사막의 지역 신에서 출발해 혼합주의적 민족 신을 거치고, 중앙집권적 국가 신으로 정립된 뒤, 마침내 보편적 초월신으로 완성되는 진화의 궤적을 보여 줍니다. 이는 야훼 신앙이 단일한 계시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위기 속에서 인간의 신학적 상상력과 해석이 축적된 결과임을 분명히 드러내며, 고대 이스라엘 종교사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통합적 틀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자료는 순전히 학습을 위한 여정의 하나로 정리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학술적 접근과 신앙은 완전히 다른 층위입니다.

이를 혼동하거나 혼합하는 것은, 결코 신앙적으로 바람직 하지도 않을 뿐더러 전혀 학술적 접근 또한 아닌 것입니다. 학습과 학술적인 것, 그리고 신앙적인 것의 철저한 분리이 접근이 필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참고자료

1. 『The Invention of God Thomas Römer, 2015

2. Thomas Römer교수의 2024년 10월 <성서학 콜로키움> 강연 내용, 202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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