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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뢰머의 『신의 발명』

고대 이스라엘 신관의 다층적 진화에 대한 이야기

by KEN

2024년 10월 28일, 토마스 뢰머(Thomas Römer) 교수의 영상 강의가 있었다. 주제는 ‘하나님의 기원(The Origins of God)’. 이번 글은 당시 강의 내용을 토대로, 그의 저서 『신의 발명(The Invention of God)』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의 견해는 일반적인 신앙인의 관점에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성서학자이자 주석가, 그리고 문헌학자로서 연구를 이어온 학자의 결론은 신앙과 무관하게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의 연구와 해석은 진지하게 이해하고 소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토마스 뢰머의 '신의 발명': 고대 이스라엘 신관의 다층적 진화에 대한 이야기



서론: '신의 발명'의 학문적 맥락과 뢰머의 방법론


토마스 뢰머(Thomas Römer)의 『신의 발명(The Invention of God)』은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가 믿는 유일하고 초월적인 신, 야훼(Yhwh)의 개념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된 역사적 결과물이라는 점을 밝히는 책이다.


뢰머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서 히브리어 성서를 가르치는 학자로, 문헌비평과 고고학 자료를 종합적으로 활용해 고대 이스라엘 종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했는지를 추적한다. 그는 야훼의 개념이 단일한 사건이나 계시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여러 “작고 혁신적인 단계들(small, innovative steps)”의 누적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접근은 종교를 고정된 신앙 체계로 보기보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인간이 구성해 온 문화적 산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a. '발명'의 정의와 학술적 입장


뢰머가 말하는 ‘발명(Invention)’은 야훼 신이 고대 이스라엘인이나 후대 서기관들에 의해 갑작스럽게 만들어지거나 조작된 존재를 뜻하지 않는다. 그는 이 개념을,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종교적 전통에 대한 신학적 반응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며 형성된 결과, 즉 점진적 구성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뢰머는 이러한 과정을 퇴적층에 비유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 개념은 반복적인 경험과 위기를 거치며 새로운 층위를 형성하고, 때로는 역사적 충격에 의해 교란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서 텍스트는 이 퇴적의 흔적을 담은 복합적 구조로 읽혀야 하며, 바로 이 점에서 야훼 신관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론적 단서가 생겨난다.


학문적으로 뢰머는 성서비평의 오래된 논쟁 속에서 극단적 입장들을 모두 비판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성서의 모든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최대주의적 접근(Maximalism)과, 성서를 역사 재구성에 무가치하다고 보는 최소주의적 입장(Minimalism) 모두를 비판한다. 대신, 문헌학적 분석과 고고학적 증거, 그리고 비판적 해석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성서 안에서 역사적 서술과 신학적 재해석의 층위를 구분하려는 균형 잡힌 연구 방법을 제시한다.



b. 고전적 문서설 비판과 문헌 연구의 전환


뢰머의 연구는 현대 성서학이 겪고 있는 방법론적 전환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오경(Pentateuch)의 기원을 네 개의 독립된 문서(J, E, D, P)가 후대에 통합되어 형성되었다는 고전적 문서설을 더 이상 유효한 설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명확히 밝힌다. 이러한 입장은 야훼 신앙과 토라(율법)가 문서설이 가정한 것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한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전제한다.


뢰머가 고전 문서설을 거부하고 대신 ‘퇴적층 모델(sedimentary model)’을 제시한 것은 단순한 방법의 교체가 아니라, 성서 형성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한다. 그는 성서가 특정 시점에서 완성된 네 문서의 결합물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서기관과 편집자들이 역사적 상황에 반응하며 덧붙이고 재구성한 신학적 해석의 누적물이라고 본다.


이러한 접근은 특히 이스라엘과 유다가 경험한 정치적 붕괴와 유배 같은 역사적 위기를 핵심 요인으로 주목한다. 즉, 야훼 신앙의 변화는 외부 제국의 압력 속에서 내부 신학이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적응해 간 과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뢰머의 ‘퇴적층’ 모델은 텍스트 비평과 고고학적 증거를 결합하여, 야훼 신앙의 진화를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연구 틀을 제공한 것이라고 본다.



1단계: 사막 신 야훼의 출현과 초기 정체성 (기원전 13세기 이후)


뢰머는 야훼 신의 기원을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이전, 즉 고대 근동의 유목민 사회와 사막 문화권에서 찾는다. 이는 야훼가 처음부터 보편적·초월적 신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지역과 공동체에 뿌리를 둔 제한된 신(local deity)으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a. 야훼의 지리적 기원과 초기 정체성


뢰머에 따르면, 야훼는 본래 아라비아 북서부 사막 지역, 즉 미디안과 에돔 인근의 ‘신격화된 산’에서 유래한 신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고대 시가―예를 들어 신명기 33장, 사사기 5장, 하박국 3장 등에 나타나는―전승에서 야훼가 남쪽 시나이 또는 세이르에서 오며 폭풍과 전쟁을 몰고 오는 신으로 묘사되는 전통과 일치한다.


야훼를 처음 숭배한 집단은 이스라엘 정착민이 아니라, 셈족 유목민으로 불리는 미디안인 또는 샤수였다. 이들에게 야훼는 광야의 신, 즉 폭풍과 전쟁을 지배하며 유목민의 생존과 직결된 초자연적 존재였다.


이러한 배경은 야훼가 본래 자연현상과 지리적 실체에 결합된 지역신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후에 그를 민족의 신으로 받아들였을 때에도, 야훼의 전투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b. 야훼의 이스라엘 유입과 엘(El)과의 관계


뢰머는 야훼 신앙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입된 종교 현상이었다고 본다. 이스라엘이 남부 레반트 지역에서 정치 공동체로 형성될 당시, 그들의 주신은 이미 가나안 판테온의 최고신인 엘(El)이었다. 엘은 ‘창조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며, 이스라엘의 초기 신앙 정체성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이후 야훼는 엘을 주신으로 모시던 이스라엘의 종교 체계 속으로 점차 편입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야훼는 곧바로 최고신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뢰머에 따르면, 초기 단계에서 야훼는 엘의 아들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위계적 관계는 성서 곳곳에서 ‘엘’이 포함된 이름(예: 이스라엘, 엘리야)이 오랫동안 병존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야훼는 세월이 흐르면서 엘의 칭호와 속성을 점진적으로 흡수하고 대체해 나갔다. 즉, 그는 ‘창조자’, ‘구원자’, ‘언약의 신’ 등 엘에게 속하던 기능들을 자기 것으로 통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유일한 주신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밟았다. 이러한 변환은 단순한 신 이름의 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가 지역 다신 체계에서 단일신 신앙으로 이동하는 역사적 변곡점을 의미한다.



c. 야훼 이름의 문헌학적 의미와 신학적 격상


야훼 이름의 기원을 둘러싼 문헌학적 논의는, 그의 신격이 지역 신에서 보편적 신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뢰머는 야훼가 원래 자연 현상이나 특정 장소(예: 신격화된 산)를 가리키는 이름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 보면, 출애굽기 3장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이름 계시는 후대 신학적 재해석으로, 본래의 지리적·자연적 의미를 존재론적 선언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야훼의 이름(Yhwh)이 히브리어 동사 HYH(‘존재하다’)와 연결되는 것은, 유배 이후 신학적 사유가 가한 의미적 재구성의 결과다. 이스라엘이 정착 사회로 변모하고 바벨론 유배를 경험하면서, 신학자들은 야훼의 비(非) 가나안적이고 모호한 이름을 오히려 보편적 존재(Being itself)로 해석했다.


그 결과, 야훼는 더 이상 특정 지역이나 자연 현상에 속박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창조주이자 유일신으로 격상되었다. 이 과정은 곧 ‘발음할 수 없는 이름’으로서의 신비성과 경외를 강화시켰으며, 야훼 신이 보편종교의 신으로 자리매김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2단계: 혼합주의(Syncretism) 시대의 야훼와 공유된 판테온


야훼가 이스라엘의 국가 신으로 자리 잡은 초기 왕국 시대의 종교 현실은, 오늘날 성서 정경이 제시하는 순수한 유일신 신앙과는 거리가 먼 다신교적 환경이었다. 뢰머는 이 시기를 혼합주의의 시대라 규정하며, 고고학적 발굴과 문헌 비평을 통해 야훼 신앙이 다른 신들과 공존하던 구체적 양상을 복원한다.


a. 야훼와 여신 아세라의 공존 및 숭배


뢰머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 특징 중 하나로, 야훼에게 여신 아세라가 배우자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세라는 가나안 전통에서 다산과 풍요의 여신, 즉 하늘의 여왕으로 불리며, 농경 사회였던 이스라엘의 생활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고고학적 증거는 이러한 공존을 뒷받침한다. 특히 쿰틸렛 이즈루드(Kuntillet ʿAjrud)와 키르벳 엘-콤(Khirbet el-Qom)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야훼와 그의 아세라에게 복을 빈다”는 문구를 담고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야훼와 아세라가 신성한 부부 혹은 공동 신적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뢰머는 이러한 아세라 숭배가 유배 이전까지 사회적으로 허용된 관행이었으며, 나중에야 성서 편집자들에 의해 우상 숭배로 재규정되고 철저히 배제되었다고 분석한다. 즉, 정경이 형성되기 전의 이스라엘 신앙은 다신교적 토양 위에서 형성된 야훼 중심적 일신숭배였으며, 절대적 유일신 사상은 훨씬 후대의 산물이었다.


b. 예루살렘 성전의 다신교적 현실과 신상 숭배


뢰머는 솔로몬 시대 예루살렘 성전의 성격에 대해서도 전통적 성서 서사와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초기 성전이 처음부터 야훼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으며, 본래는 태양신 샤마쉬에게 봉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후 정치적·종교적 통합 과정 속에서 이 성전이 야훼의 중심 성소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내부에서는 오랜 기간 다른 신들에 대한 제의가 병행되었다. 뢰머는 성전 내에 야훼의 신상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지적한다. 만약 그렇다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의 금지는 본래 관습을 뒤엎는 급진적 개혁 선언이었으며, 이는 유일신 신앙이 기존 다신교적 전통을 정화하며 형성된 과정을 반영한다.


또한, 야훼는 가나안 지역에서 다른 신들, 특히 바알 계열의 신들과의 경쟁을 통해 주신의 자리를 확보했다. 뢰머는 열왕기상 16–19장에 나타나는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의 대결 이야기가, 야훼가 한때 ‘바알’(주인, master)로 불리던 시기의 기억을 반영한다고 본다. 결국 야훼는 페니키아의 바알 멜카르트와 같은 강력한 신들과의 경쟁 속에서 그들의 속성을 흡수하며, 이스라엘의 유일한 국가 신으로 확립되었다.


이 시기의 야훼는 따라서 다신교적 세계 속에서 독점적 지위를 획득해 가는 ‘진화 중인 신’이었으며, 이러한 혼합주의적 토양이 후대의 유일신 사상이 형성되는 기초가 되었다.


c. 정경화 과정에서의 역사 왜곡과 신학적 재구성


뢰머는 성서가 제시하는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를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에 따르면, 야훼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존재했던 다신교적·혼합주의적 요소들―예를 들어 아세라와의 공존, 야훼 신상의 존재, 그리고 엘(El)과의 종속적 관계―은 후대 유일신론자들이 ‘유일한 야훼 신’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되거나 부정적으로 재해석된 결과물이다.


즉, 유배 이후의 편집자들은 야훼를 절대적 유일신으로 확립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과거 종교 현실을 ‘이교적 일탈’이나 ‘우상 숭배’의 역사로 재구성했다. 그 과정에서 다신교적 전통은 악마화되고, 그 흔적은 성서 서사에서 지워지거나 왜곡되었다.


뢰머는 따라서 성서를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유배 이후 공동체가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작성한 정치적-신학적 선언문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서는 과거의 종교적 다양성을 재현하기보다, 정화되고 일원화된 신학적 질서를 선포하는 문서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결국 뢰머의 연구는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 즉 “성서가 무엇을 침묵하고 삭제했는가”에 주목함으로써,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실제 역사적 복합성을 복원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3단계: 제국주의적 위기와 야훼 숭배의 중앙집권화 (기원전 7세기)


야훼 신앙이 지역적·혼합적 형태를 벗어나 유일신 신앙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는 기원전 8–7세기에 닥친 앗시리아 제국의 팽창과 위협이었다. 이 시기의 정치적 위기는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정체성의 재편과 신학적 혁신을 촉발하는 동인이 되었다.


a. 앗시리아 패권과 요시아 개혁의 동인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유다는 앗시리아의 압력 아래서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야훼 신앙의 독점화와 예루살렘 중심주의의 강화가 가속화되었다.


유다의 엘리트 집단은 정치적 생존을 위해 종교 체계를 재편했다. 그 핵심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중앙집권화였다. 지방 성소들은 폐쇄되었고, 모든 제의와 희생은 예루살렘에서만 이루어져야 했다. 이러한 개혁은 요시야 왕 시대(기원전 7세기 후반)에 절정에 달했다. 요시아 개혁의 목적은 비(非) 야훼적 숭배 요소—특히 아세라 숭배와 신상 숭배—를 철저히 제거하고, 야훼만을 ‘정통 신’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치적 위기와 제국주의적 압력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신학적 정화와 국가 정체성의 재구축을 촉진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수도가 아니라, 야훼의 통치가 구현되는 유일한 신성 공간으로 재정의되었다.


b. 언약의 재정립: 앗시리아 조약 모델의 차용


이 시기의 또 다른 핵심 혁신은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조약’이라는 정치-법적 틀로 재구성한 것이다. 뢰머는 이 조약 구조가 앗시리아 종주권 조약에서 직접 차용되었다고 분석한다.


앗시리아 조약은 강력한 종주(왕)와 복속된 속국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문서로, 충성, 복종, 그리고 불순종 시의 저주를 명시했다. 유다의 서기관들은 이 형식을 변용해, 야훼를 우주적 종주로 격상시켰다. 이 새로운 신학은 백성에게 야훼에 대한 전적인 충성(계명 준수)을 요구하고, 불순종에는 파멸을 경고했다.


이 조약 신학은 곧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서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문헌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예배를 정당화하고, 야훼의 유일한 주권을 선포하는 정치적·신학적 프로그램으로 기능했다.


결국 앗시리아 모델을 신학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유다는 외부 제국에 대한 복종을 종교적 복종으로 전환했다. 앗시리아 왕에게 요구되던 충성은 이제 야훼에게 향하는 절대적 헌신으로 바뀌었고, 야훼는 제국의 왕들을 초월하는 진정한 주권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로써 야훼 신앙은 더 이상 지방적 신앙이 아니라, 역사와 제국의 질서를 해석하고 통제할 수 있는 보편적 신학 체계로 변모했다. 이는 훗날 유대교의 신정사상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4단계: 유배와 궁극적인 신의 발명, 보편적 유일신론의 탄생 (기원전 6세기 이후)


야훼 신앙의 최종적이고 가장 급진적인 변혁, 즉 ‘신의 발명’의 완성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유배라는 대재앙 속에서 이루어졌다. 유다 왕국의 붕괴와 성전의 파괴는 종교적으로 절망적인 사건이었지만, 이 위기는 오히려 야훼 신앙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a. 대재앙 속에서의 신학적 재해석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당시의 종교 세계관에서 보면 야훼의 패배를 의미했다. 왕권, 성전, 땅이라는 신의 현현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배된 유다인들은 이 사건을 패배가 아닌, 야훼의 주권적 심판 행위로 해석했다.


그들은 “야훼가 패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백성을 징계했다”고 믿었다. 이 해석은 전통적인 신-국가 결합 구조를 해체하고, 야훼를 왕과 성전 없이도 존재하는 신으로 재정의했다. 유배 공동체는 바빌론이라는 이방의 땅에서도 야훼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는 야훼를 지역적 제약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는 신학적 혁명이었다.


뢰머는 이 유배 경험이야말로 야훼를 보편적이고 유일하며 초월적인 존재로 격상시킨 결정적 계기였다고 본다. 이제 야훼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수호신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는 보편적 주권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b. 보편주의와 유일신론의 완성


유배기의 신학적 혁신은 야훼를 민족신에서 우주적 창조주로 재정의한 것이다. 바빌론의 신들, 특히 마르둑과의 경쟁 속에서, 야훼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선포되었다. 이는 성전의 존재나 영토의 한계 없이도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는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선언이었다.


유배 이후 귀환한 공동체는 이 신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야훼는 더 이상 특정 지역이나 민족에 한정되지 않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신으로 자리 잡았다. 뢰머는 이러한 유일신론의 확립을 단순한 교리적 진보가 아닌, 유배 공동체의 생존 전략적 필연성으로 해석한다. 만약 야훼가 바빌론의 신들보다 약한 존재로 남았다면, 유다 공동체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훼를 우주의 창조주이자 심판자로 재정의함으로써, 유배의 비극은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재해석되었고, 공동체의 신앙과 정체성은 재건될 수 있었다.


비록 야훼는 보편적 신으로 격상되었지만, 그 보편성은 동시에 유다 공동체와의 특별한 언약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었다. 그는 모든 인류의 창조주이지만, 동시에 “자기 백성”과의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는 신이었다.


이 긴장—보편성과 특수성의 병존—은 유배 이후 유일신론의 본질적 특징이 되었으며, 훗날 유대교 신학의 핵심 구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결론 및 종합: 뢰머의 학문적 성과


토마스 뢰머의 『신의 발명』은 야훼 신앙이 지역적 자연신에서 보편적 유일신으로 발전하는 복합적 진화의 역사였음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다. 그는 야훼가 본래 셈족 유목민의 산신으로 출발하여, 이후 가나안의 다신교적 혼합주의 속에서 다른 신들과 공존하고, 앗시리아 제국의 위기 속에서 중앙집권화된 정치-신학적 개혁을 거쳐, 마침내 바빌론 유배의 절망 속에서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신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한다.


뢰머의 가장 큰 학문적 성과는, 성서의 신학적 서사를 단순히 신앙의 진술로 수용하지 않고,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한 역사적 퇴적층으로 읽어낸 데 있다. 그는 성서 본문이 단일한 교리 문서가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누적된 신학적 재해석의 기록물임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야훼 개념의 변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복원한다.


특히 그는 세 가지 역사적 전환점—북이스라엘의 멸망(기원전 722년), 요시아 개혁(기원전 7세기 후반),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년)—을 야훼 신앙의 근본적 변화를 촉진한 결정적 계기로 제시한다. 이러한 위기들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야훼 개념의 신학적 재구성을 촉발한 역사적 실험실이었다.


『신의 발명』은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 종교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고고학적 증거, 문헌학적 분석, 비판적 성서 해석을 통합적으로 결합한 학문적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뢰머의 연구는 야훼 신앙의 기원을 단순한 계시나 신화로 환원하지 않고, 역사적 경험과 인간적 해석이 축적된 산물로서의 ‘신 개념의 진화’를 보여줌으로써, 종교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a. 야훼 정체성의 단계적 진화 요약


뢰머의 핵심 논지인 ‘점진적 구성’은 야훼 신앙이 한순간의 계시나 신화적 사건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역사적 위기와 신학적 재해석이 반복된 결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야훼의 정체성은 네 단계를 거치며 오늘날의 유일신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첫 번째 단계에서 야훼는 아라비아 북서부의 사막 지역에서 숭배된 폭풍과 전쟁의 신으로, 이스라엘 외부의 유목민 집단인 미디안인(Midianites)과 샤수(Shasu)에 의해 신격화된 산으로 숭배되었다. 이 시기의 야훼는 철저히 자연과 지리적 공간에 결합된 지역 신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야훼는 이스라엘 왕국의 형성과 함께 가나안의 최고신 엘(El)과 결합된 혼합주의적 신앙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에는 야훼가 엘의 아들이거나 종속적 신으로 여겨졌으며, 여신 아세라와 함께 숭배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신상의 존재가 가능했던 시기로, 고고학적 비문(쿰틸렛 아즈루드, 키르벳 엘콤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세 번째 단계는 요시야 왕 시대(기원전 7세기 후반)로, 정치적 위기와 앗시리아 제국의 압력 속에서 야훼가 유다의 유일한 합법적 주신으로 중앙집권화되는 시기였다. 예루살렘이 유일한 숭배 중심지로 부상했고, 신명기 문헌이 형성되었다. 이때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앗시리아식 종주권 조약을 변용한 언약 모델로 재정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적 순수성의 확립뿐 아니라, 국가 통합을 위한 정치-신학적 혁신이었다.


네 번째 단계는 바빌론 유배 이후(기원전 6세기 이후)로, 유다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라는 대재앙 속에서 야훼 신앙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유일신론으로 완성된 시기이다. 유배 공동체는 야훼의 패배가 아닌, 그분의 주권적 심판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며, 왕과 성전, 영토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작용하는 우주적 창조주로 야훼를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뢰머가 제시한 이 네 단계는 야훼가 사막의 지역 신에서 출발하여, 혼합주의적 민족 신을 거쳐, 중앙집권적 국가 신으로 정립되고, 마침내 보편적 초월신으로 완성되는 진화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는 야훼 신앙이 단일한 계시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위기 속에서 인간의 신학적 상상력과 해석이 축적된 결과임을 드러내며, 고대 이스라엘 종교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통합적 틀을 제공한다.



참고자료

1. <The Invention of God> Thomas Römer, 2015

2. Thomas Römer교수의 2024년 10월 <성서학 콜로키움> 강연 내용, 202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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