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도서선정단 I차 대상 도서 독서 후기 및 평가
(장면 1) 향수(鄕愁)
“오늘 특별한 일정 있나요?”
“아니, 없어요. 왜요?
“혹시 외암리민속마을이란곳 가보셨어요?
…
아내는 오늘 하루 일정이 없다고 했다.
수능으로 인해 모든 상담과 강연 일정이 중단된 하루인 것이다.
그 덕에 생겨난 여유를 나와의 데이트로 보내고 싶어 했다.
그렇게 방문한 ‘외암리민속마을’
마을 앞 개울물은 너무 맑아, 마치 어린 시절 고향의 개울물에서 멱감고 가재 잡던 기억이 새록새록 일었다.
“엄마 보고 싶죠?”
아내는 물었다.
난 애써 웃으며 왈칵 솟아오른 울음을 삼켰다.
힘내 억눌러야만 했던 그리움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그것이 덧입혀진 보고픔이었다.
돌담길을 걸으며 선명한 햇살과 가을 하늘과 산과 초가와 나무들을 보았다.
그중에는 외암리를 포근하게 감사 안은듯한 설화산이 있었다.
눈이 내리면 꽃처럼 아름답다고 했다. 그래서 설화산(雪華山)이란다.
충남 아산의 배방읍과 송악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장면 2) 시민도서선정단 (2026)
배다리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책, 함께읽기’ 프로젝트 총 7회를 모두 참여했다.
전년도 ‘시민선정단’이 많은 논의 끝에 선정했던 ‘올해의 책 7권’을 한 달에 한 권씩 선정하여 3일 동안 함께 읽으며 그 감상 등을 나누는 ‘사회적 독서’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간 개인적 독서만을 해 오던 방식에서 함께 읽는 것 자체가 독특하다는 생각에서, 금년도에는 아예 책 선정위원으로 참여키로 한 것이다.
일반 1조에 배정되어, 한 달간 일곱 권의 책을 읽고 토론에 참여해야 하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그렇게 책 네 권을 우선 받아왔다.
그 한 권을 말 그대로 손에 잡자마자 숨죽이며 읽어 내려갔다.
놀라움과 울화와 슬픔과 분노 등 복잡한 심정과 함께.
(장면 3) 책 『본 헌터』 그리고 ‘65만 시간의 기다림’
나는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 앉아 있었냐면, 아주 오래 앉아 있었다. 날짜로 말해야 한 다면 2만 6440일 이상, 시간으로 환산하면 63만 4560시간 이상 앉아 있었다. 좀 더 쪼개 말하자면, 22억 8441만 6000초 이상 앉아 있었던 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숨 막혔는지 의식할 수도 없었다. 쪼그려 앉은 채로 숨이 끊어졌고, 머리 위로 흙이 덮였지만, 자세를 고치지 못했다. 한번 고치지 못한 이상 내 힘으로는 영원히 고칠 수 없었다. 쪼그려 앉아 흙과 하나가 되었다. 땅과 하나가 되었다. 산과 하나가 되었다.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이 자세로 100년 더 있었을 수도 있다. 1000년 더 있었을 수도 있다. 1만 년, 10만 년, 100만 년 뒤 불현듯 나타나 후대의 고고학자들에게 연굿거리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첫 문장이다.
이것은 어느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화자가 대상이 되어 마치 그 대상이 얘기하듯 옮겨 적은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다음장의 시작 문장은 이렇다.
나는 A4-5다.
왜냐고 묻지 마라. 붙인 사람 마음이다. 처음으로 사람의 조각이 발견된 날, 그 자리에 쫄대가 꽂혔다. 나와 동료들이 묻혔던 곳의 라인이 포착된 뒤, 그 폴대가 있는 곳부터 1미터 단위로 구역이 나뉘었다. A1구역에서 나는 4미터 떨어진 A4구역에 있었다. 그리고 서쪽에서부터 다시 번호가 매겨졌다. 나는 맨 끝에 있었으므로 A4-5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유해는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에서 발견되었다.
그곳은 남서쪽으로 설화산을 두고 있는 산 아래 금곡천에 가까운 산기슭이다.
그곳은 어제 그제, 아내와 함께 방문해 파전과 소머리국밥으로 점심을 먹던 곳,
내 생일이라고 아내가 함께 고향 생각이 날만했던 곳,
그래서 천국에 계실 엄마를 떠올릴 만한 곳을 방문해서
함께 돌담을 거닐고 그네를 타고 카페에 들러
쌍화차랑 대추차를 맛나게 먹고 사진 찍으며 한껏 즐거워했던 바로 그곳.
외암마을을 품고 있던 설화산, 그 너머였다.
———
그리고 그다음 날, 운명처럼
이 책 ‘본 헌터’를 만나고, 그 안에 잠자던 A4-5를 만났다.
책을 읽는 동안, 저릿한 전율 비슷한 느낌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장면 4) 책 이야기
저자 고경태는 기자다.
이 책 <본 헌터>는 한국전쟁기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 살해 사건의 진실을 체질인류학적 방법론을 통해 추적한 결과물이다.
그가 밝힌 집필의 동기는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단다. 2023년, 조간신문에서 아산시 배방읍에서 발견된 한 장의 유해 사진, 즉 '얼굴 없는 얼굴'(A4-5)를 보면서부터였다. 73년 전 파묻혔음에도 쪼그리고 고개를 처박은 자세로 온몸의 뼈들이 원상태로 연결된 충격적인 모습을 본 것이었다. 이 유해가 한국전쟁기에 재판 없이 처형된 민간인 희생자임을 알았을 때, 저자는 즉각적인 충격보다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저 사람 누구지?"라는 질문과 궁금증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것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는 얘기.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현장에서 발굴 실무 책임자인 체질인류학자 '선주'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책은 구성이 독특하다. 아니 그 점이 책을 훨씬 흡인력 있게 만드는 듯하다.
책은 소위 이중 서사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홀수장과 짝수장이 각각 독립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진실에서 결합하는 구조를 이뤘다.
홀수 장: 역사적 증언 (피해자 서사)
홀수 장은 1인칭 화자로 설정된 유해 A4-5와 충남 아산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 및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이는 피해자 중심의 역사적 서사로서, 국가 폭력의 실상과 이로 인해 파생된 개인적, 사회적 고통, 그리고 해원의 염원을 전달한다. 이 섹션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증언의 파편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독자에게 감정적인 진실에 접근하게 한다.
짝수 장: 과학적 여정 (탐구 서사)
짝수 장은 체질인류학자 '선주'를 3인칭 시점으로 다루며, 그이의 삶의 여정, 학문적 훈련, 그리고 유해 발굴 현장에서의 과학적 탐구 과정을 서술한다. 이는 객관적인 데이터, 고증, 분석에 기반한 과학적 탐구 서사로, 역사적 비극을 객관화하고 진실을 재현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선주의 이야기는 뼈에 "색깔도, 거짓도 없다"는 신념 아래, 객관성과 재현성을 요구하는 과학적 진실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러한 이중 구조는 역사적 서사의 취약점인 감정적 편향이나 기억의 왜곡 가능성을 과학적 고증이라는 강력한 증거로 보강했다는 느낌이다. 즉, 감정적인 진실(역사적 고통)과 객관적인 진실(뼈의 증언)을 병치함으로써, 저자는 단순한 고발을 넘어 서사의 신뢰도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는 저자의 연재 동기였던 ‘탐정과 같은 태도’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방법론적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매우 정교한 설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결과 대단한 흡인력을 갖춘 서사가 되었다.
(장면 5) 책은 나에게도 한국전쟁을 바로 아는 시각을 열어주었다.
<본 헌터>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한국전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트게 하는 창을 하나 선사한 느낌이다. 저자가 의도했던 ‘한국전쟁의 기간 동안에 자행된 학살의 지리적 범위와 성격을 재확인하는 결과’를 충분히 전달받았다. 아산 외에도 전국 곳곳의 지명 중에 학살의 역사에서 예외가 된 곳이 없음을 새삼스레 확인했고, 전쟁기 민간인 학살을 온전히 이념대립의 프리즘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점도 재확인하였다.
———
그러니 이 책을 통해,
시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전쟁의 참상뿐만 아니라
역사를 보는 눈을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하겠다.
이 책은 과거의 역사가 현재와 어떻게 직접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한다. 국가에 의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살해당한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해원의 길은 여전히 멀게 그려졌다. 더욱이 극우 세력들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다시금 적법절차 없이 처형된 부역혐의자를 다시 부역자로 몰아세우려는 반역사적인 움직임(‘피해자를 다시 가해자로)이 거세게 일었던 것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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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는 ‘해석력’이 관건이다.
역사를 읽는 일. 그래서 그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어떤 이해의 기반으로 상황을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다.
다른 이에 의해 해석된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그래서 ‘카더라’를 마치 팩트인양 믿게 된다면, 우리는 수많은 거짓 선동에 휘둘리는 우매한 군중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시민이자 깨어있는 한 사람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바른 해석력을 키우는 것이 관건이겠다.
그 출발은 내적 충만함과 지혜의 축적이 필수가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요구에 충실히 답할 만한 대소의 집단 (독서) 토론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여, 반드시 ‘올해의 책’에 선정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참고]
◻︎ 선정을 위한 (임시) 도서평가점수 = 9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