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도서선정단 I차 대상 도서 독서 후기 및 평가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앉은 책상에서 뒤편 책꽂이에 놓여있던 글루코 S 검사키트와 이올스왑 소독솜, 혈액 채취를 위한 대일란셋 침을 펼쳐든다.
알코올솜으로 소독한 손가락에 침으로 타격하고, 찔끔 나오는 피를 글루코 S 혈당검사지에 묻혀 검사키트에서 숫자를 읽는다. 102. 공복혈당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숫자다. 어젯밤에 고구마 하나를 먹었던 것이 못내 걱정이었는데, 102다. 내 몸에서 약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일 듯.
“엄마랑 아빠는 왜 이렇게 싸우지?"
…
"그건 엄마와 아빠가 다른 사람이라서 그런 거야.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건 품이 들어가는 일이란다." 하지만 옆집은 조용한걸. 그렇게 생각하는 내 머릿속을 읽은 듯 아빠가 나지막이 말했다. "옆집은 인형과 함께 사니까."
"......."
"인형과 산다는 건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란다. 그리고 양보하는 방법을 잊게 되면 인간은 나약해져. 상처를 받지 않으면 점점 더 상처에 취약한 인간이 돼." 아빠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는 건강하게 자랄 거야. 기대하지 못한 일을 겪을 거야. 부딪힐 때도 다칠 때도 있겠지. 지금은 먼 이야기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분명 그런 걸 감당해도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33쪽)
이희주의 <나의 천사>는 사변소설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천사’라는 대상을 만들어, “만약 ~라면”이라는 질문과 사고실험을 바탕으로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나의 천사>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그리고 미학적 숭배가 낳는 폭력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서사를 구성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샌드위치 패널을 매고 서 있는 아저씨는 누가 봐도 구깃구깃한 신문지나 걸레 같은 인상이지만 한때 천사를 세 대나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인즉, 이 동네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천사를 살 수 있다는 거다. 나는 그가 마이크에 대고 반복하던 말을 기억했다.
"한때는 나 역시 천사의 아름다움에 종처럼 끌려다녔지만 인간의 주인은 오로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천사는 사탄이 보낸 유혹자요, 사막의 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아름다움에 미혹당하지 않기 위해 외쳤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결박받고 떠나갈지어다." 그러자 천사는 기계인간의 슬픈 숙명을 인식했는지 말씀을 두려워하며 내 곁을 떠났습니다. 용광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천천히 녹아내렸습니다. ('터미네이터 아냐?" 미리내가 속삭였다) 그날의 계시를 받아 저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신의 품 안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인간이 되십시오."
자신의 말에 감격한 아저씨가 눈물을 닦을 적에 손목에 걸고 있던 흰 지팡이가 덜렁거렸다. (48쪽)
‘사변적’이라는 말은 어의상 그다지 긍정적이 못 하다. 실제 경험을 통하지 않고 책상머리에서의 생각 즉 사고작용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다. ‘답은 현장에 있다’고 언제나 강조하는 산업 현장에서는 ‘사변적’이란 말은 모욕에 가까운 단어일 수도 있다.
그러한 책상머리 생각 즉 사변적 상상에 의해서 구성된 소설 <나의 천사>는, 근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설정을 통해 미(아름다움)의 권력화와 인간 욕망의 병리적 속성을 탐구한다.
그 뒤로 환희는 천사를 찾는 일에 시들해졌다. 환희가 좋아하는 걸 빼고는 좋아하는 것이 없는 미리내도 천사에 시들해졌다. 환희는 관심사가 성형으로 돌아섰는지 해인이네 그룹을 떠나 나나네 그룹 애들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환희는 나나처럼 살짝 처진 눈꼬리를 갖고 싶은 건지, 그 애의 팔랑대는 눈꺼풀을 몇 번 매만졌다. 토템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나나. 동경하듯 바라보는 환희의 얼굴. 예전 같았으면 서운해했을 텐데 아무렇지 않았다. 미리내와 후문에서 얼쩡대던 시절도 미리내가 종합 입시 학원에 다니게 되며 끝이 났다. 세 친구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친구 사이에도 이별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고, 그게 생각보다 씁쓸하지 않아서 놀랐다.(59쪽)
소설의 서사는 세 개의 부로 나뉘어 전개된다. 점진적으로 심화되는 주제를 각 부는 소화한다. 서사가 파국을 향해 가속화됨에 따라 각 부의 분량 또한 점진적으로 줄어드는 형태를 취한다.
소설의 배경은 '천사'라는 창조물이 일상화된 시대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장난감'이나 '섹스봇'으로 불렸지만, 그 극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궁극적으로 '천사'라는 이름으로 숭배받게 된다. 천사는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는 인형이며, 미적인 측면에서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로 설정된다. 이 사회에서는 아름다움 자체가 노골적인 권력으로 작용하며, 사람들은 미의 극치라 여겨지는 천사를 구매하여 동반자로 삼게 된다.
1부의 핵심 배경은 천사의 존재로 인해 인간의 아름다움이 가치를 상실하는 사회다. 아이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를 방치하는 부모를 원망하고 바보 취급하며, 이미 유년기부터 '미'의 기준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치욕감을 느낀다. 이는 천사가 상징하는 영원하고 완벽한 미 앞에서 인간이 겪는 근원적인 열등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열등감과 치욕감은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심리적 동력이 된다. 완벽한 '천사'를 소유하려는 성인 시기의 시도는 단순히 사랑을 추구하는 행위를 넘어, 과거 유년기에 겪었던 미적 치욕을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권력으로 만회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즉, 과거의 치욕이 성인이 되어 '나만의 천사'를 탐색하는 욕망의 근본적인 기원이 되는 것이다.
"자기 이거 좋아하잖아”
젓가락으로 잘라 건네자 한나가 새처럼 입을 벌렸다. 분홍색 입안으로 들어가는 검붉은 무. 우물우물 움직이던 입술이 닫히고, 목이 움직였다. 민성기는 다시 무를 잘라 군말 없이 받아먹는 한나의 입에 넣어 줬다.(142쪽)
(중략)
"일찍 일어났네. 아침은? 빵이 낫나?"
"아니, 밥 먹을래. 어제 먹은 무 있지?"
"응."
한나가 배 속을 열어 어제 삼킨 무를 긁어냈다. 잘게 으깨졌다는 걸 제외하면 아주 멀쩡한 무, 민성기는 그것을 따끈한 쌀밥에 얹어 먹었다.(144쪽)
소설의 2부는 서사가 유년기의 동경을 넘어 성인들의 구체적인 소유욕과 집착으로 전환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3인방은 각자의 방식으로 천사를 구매하거나 동반자로 삼으며, 인간과 천사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현상이 심화된다.
2부의 주요 동력은 나만의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독점욕이다. 천사는 완벽한 미를 영원히 유지하기 때문에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 위에 군림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3인방이 천사를 통해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는 점차 순수한 사랑의 탐색이 아니라, 완벽함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병적인 소유욕으로 변질된다.
도서관의 먼지 쌓인 책 중엔 지나치게 발달한 로봇이 인간을 노예 삼는 이야기도 있었다. 레이저를 쏘며 인간을 채찍질하는 로봇. 이야기 속의 인간은 로봇의 무력에 맞서 싸우며 자유를 쟁취했지만, 현실은 이야기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기계가 인간을 지배한다면 그건 무력이 아닌 사랑 때문일 거다. 그때의 로봇은 감정이 없는 양철 깡통이 아니라 부드러운 살과 피부,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을 것이고, 인간의 복종은 자발적인 것 일테다. 그리고 그날이 머지않았다. 환란이 코앞으로 다가왔다.(276쪽)
이 구절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주제 구절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천사의 지배는 과거 로봇시절의 기술적 우위나 물리적 강제가 아닌, 미학적 굴종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정의다. 인간은 천사의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완벽한 외형 앞에서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고, 그 완벽함을 곁에 두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율성과 존엄성을 포기한다는 설정인 것이다. 이는 아름다움과 외모 지상주의가 자본화되어 사회적 지배 기제로 작동하는 현대 소비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극단적으로 투영한 소설가의 문제의식의 발현이라는 느낌이다. 2부에서는 이러한 심미적 지배가 유미, 환희, 미리내의 관계와 선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3부는 소설이 최종적인 파국을 향해 급속도로 전개되는 단계이다. 1부와 2부에서 축적된 미의 권력과 독점욕이 폭발하며, 세 주인공은 진정한 '나의 천사'를 소유하려는 시도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했음을 깨닫는다.
서사는 끝을 보고 마는 욕망의 속성처럼 끊임없이 내달리며 결말에 도달한다. 3인방이 저마다 찾아 나선 '나의 천사'는 결국 달성될 수 없는 목표임을 확인한다. 이러한 좌절은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사랑과 아름다움은 '마치 모래처럼 움켜쥐자마자 손바닥 바깥으로 흩어져 나가는 것'과 같다. 완벽한 천사를 통해 영원한 사랑을 소유하려 했던 인간의 시도는, 소유할 수 없다는 비극적인 실존적 현실 앞에서 무너진다.
거절당한 슬픔 이전에 태연한 흉내부터 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는데, 숨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문화적인 행동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비밀과 거짓말. 거짓말과 비밀. 비밀이 아름다움을 만든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아름답지 않다.
윤조는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메마른 여자의 얼굴로 웃었다.
"이게 누구예요?"
눈앞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천사. 영원한 사랑. 하나뿐인 보석. 미의 결정체. 마음의 친구, 유혹하는 악마. 섹스.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 지옥의 골짜기. 기계 인간. 장난감, 대체품. 권리 없는 도구. 찌꺼기. 그러나 이름은 모두 미끄러진다. 그것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줄줄 흘러내린다. 윤조는 그것에 걸맞는 이름을 알았다. 윤조의 눈엔 하나의 이름으로만 보였으니까. 다른 무엇이 아닌 남자의 이름으로. (352쪽)
'이름이 모두 미끄러진다'는 구절은 천사가 본질적으로 인간 욕망의 투사체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의미하는 듯하다. 인간은 천사에게 영원한 사랑이나 나의 보석과 같은 독점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천사의 완벽함은 모든 인간의 욕망을 동시에 투사받기 때문에 특정 개인에게 종속되거나 고정될 수 없다. 따라서 천사는 빈껍데기와 같으며, 이 실체가 없는 허상을 소유하려 했기에 3인방의 관계는 파국을 맞고 욕망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절대적인 미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었음이 증명되는 그 순간으로 서사적 절정을 완성하고 있다.
이제 남는 것은 파국뿐이다.
서사가 파국으로 치닫기 전, 인간인 ‘남자’의 입을 통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등장시킨다. (인간 → 천사)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실은 저도 아내가 죽은 뒤 한동안 천사와 살았거든요. 죽고 난 뒤에도 아내를 잊지 않고 사랑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싶었는데, 거꾸로더라고요. 천사는 아내가 아니었어요.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속임수죠. 안 그런가요? 그것도 인간을 속여 지옥불로 떨어뜨리려는 아주 끔찍한 속임수요, 천사라는 이름 자체가 기만입니다. 그것들은 악마예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 유한정 한 애정을 빨아먹기 위해 만들어진 지옥의 사자입니다.”(391쪽)
이 비판은 천사의 본질적인 기능을 해체한다.
천사는 단순히 '대체품'이나 '섹스봇'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숭고한 감정, 즉 사랑과 그리움을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써 오히려 인간 고유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애정 자체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소모시킨다. 천사는 인간의 결핍을 충족시키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유한정 한 애정의 가치를 파괴하며, 이는 주인공들이 겪게 될 관계의 붕괴와 욕망의 좌절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이 된다.
파국의 순간, 천사는 인간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인간의 정체성을 역설적으로 정의한다. (천사 —> 인간)
천사는 "인간은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그래서 인간인 거야. 이해하니?”(406쪽)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명제이다.
인간은 완벽한 충족이나 영원한 만족을 스스로 제공할 수 없는 존재이며, 바로 그 불완전함과 유한함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정의가 된다. 천사는 이 결핍을 완벽히 대체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결국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불완전하고 유한할지라도 상호 교환이 가능한 인간적인 애정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손가락 피를 통해 혈당을 체크하는 나의 모습으로부터 감상문을 시작했다.
점진적으로 쇠약해져 가는 ‘살아있는 인간인 나’의 육체적 한계를 얘기하고 싶었다.
나약함 그 자체가 실존적 인간성이라는 생각에서다.
개인적 성향상 장르소설은 즐겨하지 않는다.
소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사변적 디스토피아를 그린 허구 속에 그려진 또 다른 허구를 이야기하는 그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것이 아무리 사회상 반영을 위한 조작적 서사라며 강변할지라도 할 수 없다. 내게는 잘 읽히지 않는 소설일 뿐이다.
주제는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다만, 그 주제는 이미 첫 몇 장을 읽는 순간 파악이 되었었다.
그 주제를 반복적으로 확인해 가면서 433쪽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내게 거의 고문이었다.
사회적 읽기의 일환이었기에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다. 그 점에서는 확실히 사회적 함께읽기의 유용함을 깨닫는다.
개인적 읽기였으면, 벌써 덮어버렸을 터이다.
이런 내용의 책임에도 시민들과 시의 청소년들에게 이 소설 읽기를 추천할 수 있을까?
글쎄다... 일단은 보류!
[참고]
◻︎ 선정을 위한 (임시) 도서평가점수 = 7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