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아카데미아 Season 5. 사전 학습
1.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 형성사에 대한 질문
성경, 특히 구약은 단순한 종교적 경전의 모음집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 중 하나인 구술성(orality)에서 문자성(textuality)으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텍스트인 것입니다. 윌리엄 슈니더윈드의 저서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는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의 순간을 포착하여, 성경이 언제, 어디서, 왜, 그리고 누구에 의해 기록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치밀한 학문적 탐사로 읽힙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성서 비평학계는 성경의 저작 연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여왔던 모양입니다. 19세기 율리우스 벨하우젠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문서설은 성경의 주요 텍스트들이 비교적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보았으나,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소위 최소주의자(minimalists)들은 이 연대를 더욱 늦추어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4세기)나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세기)를 성경 저술의 주 무대로 설정했던 겁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철기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다는 문맹률이 극도로 높은 농경 사회였고, 성경과 같이 고도로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정교한 문학을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성경은 후대 유대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창작해 낸 '허구적 역사'에 가깝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였던 겁니다.
그러나 슈니더윈드는 이러한 학계의 지배적인 흐름, 특히 후기 연대설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그는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 고대 히브리어 비문에 대한 필체학적 분석, 그리고 사회언어학적 이론을 융합하여 성경 문학의 핵심적인 형성기가 페르시아 시대가 아닌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후기 철기 시대임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앗수르 제국의 팽창, 예루살렘의 급격한 도시화, 그리고 국가 관료제의 발전이 맞물리면서 문자 해독 능력이 서기관 계층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산되던 시점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슈니더윈드의 주장을 따라 고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기억하는 사회'에서 '기록하는 사회'로 변모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신의 말씀이 권위 있는 '책'으로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단순한 연대기적 서술을 넘어, 문자가 가진 사회적 기능의 변화 즉, 주술적 힘에서 행정적 도구로, 그리고 마침내 종교적 정통성의 원천으로의 변화를 추적하는 과정이 되겠습니다.
2.
글(문자)의 신비한 힘
고대 근동 세계에서 문자의 발명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시작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문자를 정보 전달이나 역사 기록의 수단으로 당연시하지만, 고대인들에게 문자는 신비한 힘을 지닌 초자연적인 기술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슈니더윈드는 문자가 처음에는 종교적 제의를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집트의 중왕국 시대와 신왕국 시대에 유행했던 '저주 토기(execration texts)'는 이러한 문자의 주술적 기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겁니다. 제사장들은 적대적인 도시나 왕의 이름을 토기나 인형에 기록한 뒤, 이를 의식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적을 실제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답니다. 여기서 텍스트는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매개체였던 것이죠. 문자는 그 자체로 신의 속성을 지니며, 신의 이름을 기록하는 행위는 신의 현존을 불러오는 것과 동일시되었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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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왕들은 거대한 석비와 신전 벽면에 빼곡히 글을 새겼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이나 카르낙 신전의 비문들이 그 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인구의 99% 이상은 문맹이었죠. 그렇다면 왕들은 왜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글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새겼을까요?
슈니더윈드는 이를 ‘왕권의 시각적 투사’로 해석합니다. 공공 기념비에 새겨진 문자는 독서를 위한 텍스트가 아니라, 왕의 권위가 신으로부터 위임받았음을 선포하는 상징물(icon)이었다는 겁니다. 백성들은 글의 내용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글자가 새겨진 기념비의 위용을 보고 왕의 권위에 복종했다고 전합니다. 글자는 읽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대상이었으며, 그 자체로 권력의 아우라를 발산했다는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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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자에 대한 인식은 초기 이스라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성경 초기 전승에 등장하는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것"(출 31:18)으로 묘사되죠. 이는 문자의 기원이 신성하다는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또한, 민수기 5장에 등장하는 '의심의 법'에서 제사장은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쓰고, 그 글자를 물로 씻어 그 물을 여인에게 마시게 합니다.(민 5:18-19) 이는 문자가 가진 저주의 힘이 물리적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고대적 사고방식을 보여준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초기 야훼 신앙에서 문자는 율법의 세부 조항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언약의 증거물이자 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물이었다는 것이죠. 언약궤 안에 십계명 돌판을 보관하는 행위 역시 텍스트를 보존하여 읽기 위함이 아니라, 신성한 물건으로서 봉인하는 행위였다는 겁니다. 나름 설득력 있습니다. 그쵸?
3.
글과 국가: 서기관 인프라의 구축
슈니더윈드는 문자의 역사를 추적하며 단호한 명제를 제시합니다. "고대 근동 어디에서도 국가의 후원 없이 문자가 번성한 적은 없다." 문자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을 정의하고 통치하는 핵심 메커니즘이었다는 겁니다.
알파벳은 고대 문명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 중 하납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는 수백, 수천 개의 기호를 외워야 했기에 소수의 엘리트 서기관만이 독점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30개 미만의 기호로 모든 소리를 표현하는 알파벳은 문해력의 대중화를 가능케 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슈니더윈드는 흥미로운 역설을 지적합니다. 이집트 와디 엘 홀(Wadi el-Hol)에서 발견된 초기 알파벳 비문은 기원전 2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하지만 이 혁신적인 기술이 발명된 후에도 1000년이 넘도록 문자는 대중화되지 않았다는 거죠. 왜일까요? 그 이유는 '국가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초기 알파벳은 상인, 군인, 용병들 사이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이를 행정의 표준으로 채택하기 전까지 문학이나 역사의 도구가 되지 못했다는 설명인 것이죠. 고대 사회에서 문학의 생산은 막대한 경제적 잉여와 서기관 훈련 시스템을 갖춘 왕궁이나 신전(즉, 국가)만이 감당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는 것이 핵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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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국가 권력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각적 증거로 슈니더윈드는 기원전 8세기 아람 왕국 삼알(Sam'al)의 왕 바르-라킵(Bar-Rakib)의 비문을 들고 있습니다. 이 비석의 부조에는 왕좌에 앉은 바르-라킵 왕 앞에 붓과 필사 도구를 든 왕실 서기관이 서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답니다.
고대 근동 미술에서 왕 앞에 서 있는 존재는 신이나 왕비, 혹은 정복된 적들뿐이었다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일개 신하인 서기관이 왕과 함께 왕실 기념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죠. 이는 서기관이 단순히 왕의 말을 받아 적는 비서가 아니라, 왕의 통치력을 시각화하고 영속화하는 권력의 대리자였음을 의미합니다.
서기관은 제국의 행정을 장악하고, 외교 문서를 작성하며, 왕의 업적을 기념비에 새겨 역사로 만드는 존재였던 겁니다. 앗수르 제국이 복잡한 쐐기문자 대신 간편한 아람어 알파벳을 제국의 공식 행정 언어로 채택한 것 역시, 제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국가적 결단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요컨대, 문자는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게 만드는 윤활유이자 엔진이었던 겁니다.
4.
초기 이스라엘의 글
그렇다면 성경의 무대가 되는 초기 이스라엘(기원전 12~10세기)은 어떠했을까요? 전통적인 견해나 성경의 일부 묘사는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고도의 기록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슈니더윈드는 이 시기를 철저한 구술 사회(oral society)로 규정합니다.
사사 시대와 초기 왕정 시대의 이스라엘은 중앙집권화된 국가라기보다는 느슨한 부족 연맹체였습니다. 백성들은 목축과 농업에 종사했고, 그들의 삶은 텍스트가 아닌 말에 의해 지배되었던 겁니다. 법은 장로들의 입을 통해 판결되었고, 역사는 '드보라의 노래'나 '미리암의 노래'처럼 운율이 있는 시가의 형태로 암송되어 전승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문자' 유물들은 문해력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문자의 희소성과 특수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얘깁니다.
기원전 12~11세기로 추정되는 이즈벳 사르타(Izbet Sartah) 오스트라카는 초기 이스라엘 문자의 실태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유물 중 하나랍니다. 이 토기 조각에는 5줄의 글자가 긁혀 있는데, 마지막 줄은 알파벳 순서(abecedary)를 적은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슈니더윈드는 이것을 두고 "전 국민의 높은 문해력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석하는 일부 주장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듭니다. 첫째는 필체의 조악함입니다. 글씨는 매우 서툴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다가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등 방향조차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죠. 이는 숙련된 서기관의 솜씨가 아니라는 증거랍니다. 둘째는 이 유물이 곡물 저장 구덩이(silo)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누군가 글자를 배우기 위해 연습한 습작이거나, 혹은 알파벳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어 곡물을 보호하기 위해 넣은 주술적 부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즉, 이 유물은 문자가 존재했음은 잘 보여주지만, 그것이 일상적인 소통 수단이 아니라 특수한 계층의 연습 대상이거나 신비한 힘을 가진 도구로 여겨졌음을 시사한다는 설명입니다.
기원전 10세기의 게제르 달력(Gezer Calendar)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재해석되는 모양입니다. 이 작은 석회암 판에는 일 년 열두 달의 농사 절기가 기록되어 있답니다. 흔히 이를 "고대 이스라엘 농부들도 글을 쓸 줄 알았다"는 증거로 인용하지만, 슈니더윈드는 이를 초보 서기관의 학습 텍스트로 보고 있습니다.
이 텍스트의 구조는 메소포타미아의 서기관 교육 과정에서 사용되던 어휘 목록(lexical lists, 예: Ura = hubullu)과 유사하다는 겁니다. 즉, 예비 서기관들이 계절과 농사 용어를 익히기 위해 베껴 쓴 연습 문제 풀이집 같은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게제르 달력은 일반 대중의 문해력이 아니라, 국가 행정을 담당할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초기 단계의 교육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포함한 초기 이스라엘에서 문자는 여전히 왕궁과 소수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성경과 같은 방대한 문학 텍스트가 생산되거나 대중적으로 읽힐 수 있는 토양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5.
히스기야와 성경 기록의 시작
슈니더윈드는 성경 문학 형성의 결정적 전환점을 기원전 8세기말, 유다 왕 히스기야(재위 715-687 BCE)의 시대로 지목합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구술 사회에서 텍스트 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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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고대 근동의 지정학적 판도가 뒤집힙니다. 북왕국의 멸망은 남유다 왕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죠. 북쪽에서 발생한 수많은 난민들이 남쪽으로, 특히 예루살렘으로 대거 유입되었던 겁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이 시기 예루살렘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음을 보여준답니다. 예루살렘은 10~12 에이커 규모의 작은 고지대 요새에서 150 에이커에 달하는 거대 도시로 확장되었다는 것이죠. 인구의 급증은 사회 구조의 복잡성을 초래했다고 합니다. 늘어난 인구를 통제하고, 식량을 분배하고, 앗수르의 침공에 대비해 성벽을 쌓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효율적인 관료제가 필요했던 것이죠. 관료제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문자의 확산과 기록의 일상화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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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시대의 문해력 급증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LMLK 인장(Lamelek Jars)이랍니다. '왕에게 속한 것(lmlk)'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수천 개의 저장 항아리 손잡이는 히스기야가 앗수르와의 전쟁을 대비해 유다 전역에 군수 물자 조달 시스템을 구축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이 항아리들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다의 변방 요새와 마을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중앙 정부의 명령을 해독하고 물자를 관리할 수 있는 하급 관리들이 지방 곳곳에 배치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문자는 더 이상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가 행정의 말단까지 침투한 실용적 도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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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가 앗수르의 포위(산헤립의 침공)에 대비해 건설한 실로암 터널에서 발견된 비문은 당시 문해력의 질적 변화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합니다.
고대 근동의 기념비는 대부분 왕의 이름으로 시작하여 왕의 업적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실로암 비문에는 히스기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군요. 대신, 양쪽에서 굴을 파오던 기술자들이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마침내 관통하게 된 감격적인 순간을 묘사했답니다. 이는 왕의 명령이 아니라, 공사에 참여한 기술자나 감독관이 자발적으로 남긴 기록이라는 증거인 것이죠.
또한 슈니더윈드와 렌즈버그의 연구에 따르면, 실로암 비문에는 북이스라엘 히브리어 방언의 특징이 나타난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터널 공사에 북이스라엘 출신 난민 기술자들이 참여했음을 시사하며, 문해력이 출신 지역과 계층을 넘어 확산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라는 얘깁니다.
결국 기술자들이 자신의 성취를 문자로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 '중간 계층'의 문해력이 형성되었음을 방증한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글쓰기가 권력의 정점(왕)에서 저변으로 흘러내리는 소위 ‘문해력의 민주화'의 초기 단계를 보여준다는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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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잠언 25장 1절은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슈니더윈드는 이 구절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고 봤습니다. 히스기야는 멸망한 북왕국의 유산을 흡수하고, 남유다 중심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대대적인 문학 수집 사업을 벌였다는 것이죠.
이 시기에 북쪽의 예언자들(호세아, 아모스)의 구전 메시지가 문서화되었고, 남쪽의 이사야와 미가의 예언도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또한, 구전되어 오던 지혜 문학(잠언)과 왕실 연대기들이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다고 합니다. 즉, 히스기야 시대는 성경이 구전의 바다에서 문자의 방주로 옮겨 타기 시작한 텍스트화의 여명기였던 것입니다.
6.
요시야와 글의 혁명
히스기야 시대에 시작된 문학적 흐름은 기원전 7세기 후반, 요시야(재위 640-609 BCE) 시대에 이르러 폭발적인 텍스트 혁명으로 완성된다는 설명입니다.
열왕기하 22장은 요시야 왕 18년에 성전 수리 중 율법책(Sefer ha-Torah)을 발견하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슈니더윈드는 이 사건을 인류 종교사에서 가장 심오한 혁명 중 하나인 텍스트 정통성의 탄생으로 규정합니다.
이전까지 종교적 권위는 주로 제사장의 제의적 행위나 예언자의 살아있는 목소리(charisma)에 의존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은 '발견된 책'을 최고의 권위로 내세웠던 겁니다. 왕조차도 이 책의 낭독을 듣고 옷을 찢으며 회개해야 했고, 국가의 모든 제의와 법적 행위가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재편되었습니다. 이는 텍스트가 왕과 제사장이라는 인격적 권위를 넘어서는 초월적 권위를 획득했음을 의미한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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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시대에 발견된 '율법책'은 오늘날의 신명기의 원형으로 여겨집니다. 현대 학자들은 신명기의 구조와 언어가 기원전 7세기의 신앗수르 조약(Neo-Assyrian Treaties), 특히 에사르하돈의 계승 조약(Vassal Treaties of Esarhaddon, VTE)과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슈니더윈드는 유다의 서기관들이 앗수르의 외교 문서를 모방하고 전복하여 야훼와 이스라엘 간의 계약 문서를 작성했다고 분석합니다. 앗수르 왕에게 바쳐야 했던 절대적인 충성을 야훼 하나님에게로 돌린 것이었죠. 이 과정에서 '언약(covenant)'은 추상적인 약속이 아니라, 낭독되고, 서명되고, 보관되어야 할 물리적인 '문서'가 되었던 겁니다. 이는 성경이 고대 근동의 문학적 관습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도, 독자적인 신학을 구축해 나간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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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시대(기원전 7세기말) 유다의 고고학적 지층에서는 문해력의 폭발적 증가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얘깁니다.
아라드 서신(Arad Letters) & 라기스 서신(Lachish Letters)은 유다 왕국의 요새들에서 발견된 것으로 군사 지휘관들이 부하들과 문자로 일상적인 명령과 보고를 주고받았음을 보여준 것이랍니다. 라기스 서신 중 하나에는 "당신의 종이 읽을 줄 모른다고 하셨나이까?"라는 항변이 등장하는데, 이는 문해력이 군대 내에서 일반적인 요구 사항이었음을 시사한다는 설명입니다.
아울러 수백 개의 개인 인장과 봉인(Bulla)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왕족뿐만 아니라 일반 관리나 개인의 이름도 새겨져 있답니다. 이는 상업적, 법적 거래에서 문서 사용이 보편화되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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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이야기는 구술 예언이 어떻게 문자로 고정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예레미야 36장에서 예레미야는 서기관 바룩을 고용하여 자신의 구술 메시지를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합니다. 여호야김 왕이 이 두루마리를 칼로 베어 화로에 태워버리지만, 예레미야는 다시 기록했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예언의 기능이 변화했음을 보여준 것이라는 증거라는군요. 예언은 더 이상 특정 시점에 선포되고 사라지는 '소리'가 아니라, 보존되고 복제되어 후대에도 영향을 미치는 '책'이 되었다는 얘깁니다. 예언자의 권위는 그의 육체적 현존을 떠나 텍스트를 통해 영속성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7.
토라가 글로 기록되기까지
성경의 첫 다섯 권인 토라의 형성 과정은 슈니더윈드의 논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는 모세라는 인물이 텍스트화 과정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었는지, 그리고 토라가 언제 확고한 텍스트로 정착했는지를 탐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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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역사적으로 볼 때, 모세는 초기 전승에서 출애굽의 영웅이자 기적을 행하는 구원자로 묘사되었죠. 그러나 신명기와 요시야 시대를 거치면서 모세의 이미지는 '저자'로 변모합니다. 신명기 31장은 모세가 율법을 다 써서 책에 기록하고, 이를 언약궤 곁에 두어 보존하게 했다고 묘사됩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회가 텍스트 중심 사회로 전환되면서, 그 텍스트의 권위를 보증할 원초적인 권위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모세가 기록하였다"는 선언은 토라가 단순한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 신적 기원을 가진 불변의 진리임을 확증하는 문학적 장치이자 신학적 선언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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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비평학자들이 토라의 주요 내용(특히 제사장 법전, P문서)이 포로기 이후에 작성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슈니더윈드는 케테프 힌놈(Ketef Hinnom)의 발견을 통해 이를 반박합니다.
1979년 예루살렘 힌놈 골짜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두 개의 작은 은판 부적은 기원전 7세기말에서 6세기 초로 연대 측정됩니다. 이 은판에는 민수기 6장 24-26절의 '제사장의 축복'("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과 신명기 7장 9절의 내용이 고대 히브리어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 발견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는 설명입니다.
그 하나는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이미 토라의 핵심 본문이 고정된 형태(fixed form)로 존재했다는 것이고, 성경 텍스트가 단순히 성전이나 왕궁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개인의 안녕을 비는 부적으로 사용될 만큼 일반인들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는 것이 또 하나입니다. 이는 텍스트의 권위가 대중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는 겁니다.
8.
망명지(바빌론)에서의 글쓰기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 파괴는 유다 왕국에 치명적인 종말을 고했었습니다. 엘리트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국토는 황폐 해졌던 겁니다. 그러나 슈니더윈드는 이 바빌론 유수기가 문학적 단절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의 보존과 편집, 그리고 신학적 성찰이 이루어진 결정적 시기였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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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니더윈드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 왕과 그의 측근들에 주목합니다. 바벨론에서 발굴된 배급 명단 토판(Ration Tablets)은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들, 그리고 유다의 서기관과 장인들이 바벨론 왕실의 보호 아래 식량을 배급받았음을 문자로 증명하고 있답니다.
이는 유다의 왕실 서기관 구조가 바벨론 포로지에서도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얘깁니다. 열왕기하 25장이 여호야긴이 감옥에서 풀려나 바벨론 왕의 식탁에서 먹게 되었다는 기사로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죠. 슈니더윈드는 소위 '신명기 역사서(신명기-열왕기)'의 최종 편집이 바로 이 망명한 유다 왕실, 즉 '망명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들은 과거의 기록들을 정리하며 자신들이 왜 멸망했는지를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미래의 회복을 위한 텍스트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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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잃은 유다인들에게 텍스트는 잃어버린 성전과 국토를 대신할 '휴대용 성소'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그리고 신명기 역사서는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편집되고 확장되었다는 얘깁니다. 반면, 황폐화된 유다 땅에 남은 자들은 생존에 급급하여 문학적 생산 활동을 할 여력이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주요 전승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벨론의 강가에서, 망명한 서기관들에 의해 보존되고 다듬어졌다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9.
페르시아 시대의 '암흑기'와 경전의 부상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학계의 통념을 뒤집는 부분은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39-332 BCE)에 대한 재평가로 보입니다. 최소주의자들은 이 시기를 성경 저술의 황금기로 보지만, 슈니더윈드는 이를 암흑기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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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니더윈드는 고고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최소주의자들의 '페르시아 시대 창작설'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시대의 유다(예후드 지방)는 극도로 빈곤하고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다는 겁니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은 기원전 2세기까지도 도시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다는 설명입니다.
이 시기 히브리어 비문의 발견 빈도는 철기 시대 후기에 비해 급격히 감소합니다. 슈니더윈드는 "성경과 같이 방대하고 정교한 문학을 창작하고 편집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잉여와 도시적 기반이 필요한데, 페르시아 시대의 예후드에는 그러한 인프라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대부분은 이 암흑기가 도래하기 전, 즉 유다 왕국이 번영했던 시기에 이미 작성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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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페르시아 시대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슈니더윈드는 이 시기가 창작의 시기가 아니라 '해석'과 '권위 투쟁'의 시기였다고 본다는 겁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에스라와 느헤미야 공동체는 성전을 재건했지만, 그들 내부에는 구술적 권위(성전/제사장)와 문자적 권위(텍스트/서기관) 간의 긴장이 존재했다는 겁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율법책을 가져와 백성 앞에서 낭독하고 해석했다(느 8장)는 얘기죠. 이는 성전 제의보다 텍스트의 해석이 공동체의 중심에 서게 됨을 상징한다는 주장인 것이죠.
그러나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들은 텍스트가 자신들의 제의적 권위를 제한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구전 전통과 제의를 중시했다는 것이죠. 반면, 평신도 중심의 서기관 그룹과 바리새파의 전신들은 고정된 텍스트(성경)를 통해 제사장의 권위를 견제하고 율법을 민주화하려 했다는 주장입니다.
페르시아 시대는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이미 권위를 획득한 텍스트(성경)를 두고 "누가 이 텍스트의 올바른 해석자인가"를 다투는 시기였다는 것이 핵심 주장인 것입니다.
10.
결론
윌리엄 슈니더윈드의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는 성경을 단순한 신학적 교리서가 아닌, 역동적인 역사적 산물로 복원해내고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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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형성기는 페르시아/헬레니즘 시대가 아닌 후기 철기 시대(기원전 8~6세기)이었고, 이는 고고학적, 비문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주장입니다.
아울러 앗수르 제국의 팽창에 대응한 히스기야의 도시화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문자의 확산과 문학 생산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이며, 문자는 초기에는 신비한 주술적 힘을 가진 도구였으나, 국가 행정의 도구를 거쳐, 마침내 신의 뜻을 담은 불변의 경전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실로암 비문, LMLK 인장, 케테프 힌놈 은판 등은 성경 텍스트가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증명하는 물적 증거들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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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경이 하늘에서 완성된 형태로 떨어진 책이 아니며, 후대 유대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위조한 책도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난민들의 절망, 제국의 위협, 왕들의 야망, 예언자들의 외침, 그리고 나라를 잃은 망명자들의 눈물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탄생했다는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겪은 '텍스트화'의 과정은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가 '책의 종교'가 된 기원이라는 얘깁니다. 야훼 종교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갇혀 있지 않고, 두루마리에 기록된 텍스트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할 수 있는 종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는 성전이 파괴된 후에도 유대교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이며, 오늘날까지 성경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근원적 힘이라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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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학습 기간을 통해 발제 및 논의등을 통해 깊이를 더해가려 합니다.
관련 분야에 대한 학습자들이 늘어나, 성경을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기를 기대합니다.
이 책은 2026년 1월 ~ 4월까지 전개될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주관의 아카데미아 시즌 5. 학습의 주 교재로, 사전학습을 겸해 책의 관련 내용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주관하는 권지성 교수는,
이 책은 고고학, 역사, 언어학을 함께 사용해 “언제, 왜, 어떻게 말씀이 글이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히스기야·요시야 시대의 문자 문화 확대, 포로기와 이후 시대의 편집 작업, 서기관 교육의 배경 등을 통해 “성경이 책이 되기까지”의 큰 흐름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이 책은 “저자(author)” 중심이 아닌 “서기관(scribe)” 중심에서 성경 기록의 역사를 다시 서술합니다. 고대 유다의 서기관 학교, 문서 작성과 보존 방식, 익명성과 공동 작업의 세계를 설명하며, “누가 성경을 썼는가”라는 질문을 보다 현실적인 역사 속에 놓습니다.
라고 정리합니다. 학습에는 관심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참여 가능합니다.
[아카데미아] 히브리어 성서는 어떻게 책이 되었는가? Season.5 구약성서의 기원과 형성
관련서적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_ 윌리엄 슈니더윈드, 박정연 옮김, 에코리브르,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