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1~2세기 저자들은 과거문서를 어떻게 해석했나

신약성경과 2세기 교부들의 구약성서 해석 및 적용방식 고찰

by KEN

앞 장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해석의 역사를 살피는데 가장 주요한 텍스트는 성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유무와 관련없이 '해석학'이라는 학문의 출발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텍스트를 발견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1세기 및 2세기, 신약성서를 저술한 저자들과 당시의 교부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했는지, 그 해석 전통의 흐름을 통해 그 당시의 사람들은 과거의 기록을 어떻게 현재에 해석하고 적용했는지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신약의 성서, 구약


신약 저자들에게 구약성서는 단순한 고대 문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가 가진 유일한 성경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인 참조 틀이었습니다. 신약의 신학과 복음 선포는 모두 이 구약이라는 토양 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어떻게 인용하고 해석했는지를 살피는 일은, 초기 기독교 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 될 것입니다.



2.

구약성서: 신약의 근본적인 참조 틀 및 전이해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몇 구절을 증거 본문으로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그들은 구약 전체를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거대한 참조 틀, 곧 전이해로 삼았습니다. 구약의 역사와 주제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해석하는 배경과 지평을 제공한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신약학자 울리히 루츠의 말처럼, 바울에게 구약은 이해의 대상이기보다 이해를 낳는 근원이었습니다. 이러한 접근 덕분에 신약의 메시지는 단절된 새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랜 구원 역사와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됩니다.


바울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구약 전체를 복음의 의미를 해명하는 거대한 서사로 활용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4에서 “성경대로”라는 선언은 특정 구절이 아니라, 고난을 거쳐 궁극적 승리에 이르는 구약의 구원 패턴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2; 3:21–22는 복음이 “미리 약속된 것”이며,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언 위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우르는 “우리 조상”으로 제시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원리를 구약의 핵심 인물로 논증합니다.
고린도전서 10:6, 11은 광야 이스라엘의 역사를 현재 공동체를 위한 본보기와 경고로 읽어, 구약을 살아 있는 교훈으로 제시합니다.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 복음을 새 창조로 재해석합니다. 이는 창조·아담·이스라엘이라는 구약의 대주제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용해, 복음의 우주적 중요성을 설명하는 전략인 것입니다.


바울에게 구약은 과거의 문헌이 아니라, 복음을 생성하고 규정하는 해석의 토양이었던 겁니다. 이 전이해 위에서 신약의 신학은 연속성과 깊이를 얻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역시 구약이라는 참조 틀 없이는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한 흐름으로 보시면 분명해집니다.

세례 장면에서 예수님은 시편 2편 7절과 이사야 42장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자 ‘고난 받는 종’으로 동시에 규정됩니다.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 전체를 완성하시는 분임을 상징합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며 ‘새로운 모세’로서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여기에 ‘다윗의 자손’, 다니엘 7장에서 유래한 ‘인자’라는 칭호, 그리고 유월절을 배경으로 한 최후의 만찬까지—이 모든 요소는 구약적 배경 위에서 비로소 또렷해집니다.

결국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구약의 예언적 인물과 출애굽이라는 구원사적 사건의 틀 안에 배치함으로써, 예수께서 바로 메시아이심을 설득력 있게 증언(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구약의 언어로 예수를 해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는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즉각 떠올리게 하고,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요 1:14)는 표현은 구약의 성막 모티프를 불러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선언하신 말씀은 광야의 만나 사건을 새롭게 읽게 하며(요 6장),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든 사건은 예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으로 제시됩니다(요 3:14; 민수기 21장).

즉, 요한복음은 구약의 상징(말씀, 성막)과 제도(만나, 유월절)를 재해석하여 예수의 신적 기원과 본질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둡니다. 여기서 구약은 배경이 아니라, 예수를 드러내는 신학적 언어(해석) 그 자체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시면 이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요엘서 2장과 예레미야서 31장에 약속된 새 언약이 성취된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초대 교회의 지도부를 열두 사도로 구성한 것은, 회복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함으로써 교회가 구약 이스라엘의 연속선상에 있는 언약 공동체임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구약성서를 광범위한 참조 틀로 사용하는 것은, 신약의 메시지를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랜 약속과 계획 위에 세우는 핵심적인 접근이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큰 틀 위에서, 보다 구체적인 해석 방식인 예표론과 알레고리를 살펴 보겠습니다.



3.

예표론과 알레고리


신약 저자들의 구약 해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표론(Typology)과 알레고리(Allegory)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역사성을 다루는 방식과 해석의 목표에서 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먼저 알레고리입니다.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의 해석과 잘 연결됩니다. 알레고리는 본문의 역사적 현실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영원한 도덕·철학적 진리를 찾는 데 초점을 둡니다. 구약의 인물과 사건은 영혼의 여정이나 덕 같은 추상적 개념의 상징으로 읽히며, 핵심은 두 관념 체계 사이의 평행입니다.


반면 예표론은 전혀 다릅니다. 예표론은 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사이의 실제적 연속성에 근거합니다. 구약의 사건·인물·제도는 신약에서 드러날 더 위대한 실체, 곧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type)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심화되는 하나님의 구원 패턴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신학자 제임스 스마트의 지적처럼, 예표론은 사건의 역사적 실재성에 기반하는 반면, 알레고리는 그 실재성을 상대화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구분을 분명히 할 때,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어떤 신학적 의도로 사용했는지가 또렷해집니다.


갈라디아서 4장 21–31절의 하갈과 사라 해석은 예표론과 알레고리의 차이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핵심 사례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이를 “비유”(allēgoroumena)라고 불렀기에 알레고리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프레드릭 피비 브루스를 비롯한 다수의 학자들은 이것이 필론적 알레고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표론이라고 봅니다.


차이는 해석의 지향점에 있습니다.

먼저 필론의 알레고리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사라·이삭을 덕과 지혜 같은 추상적 관념, 하갈을 세속 학문, 이스마엘을 궤변으로 읽어,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철학적 아이디어로 치환했습니다.


반면 바울의 해석은 다릅니다. 바울은 하갈과 사라를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 채, 그들의 관계를 통해 구원사의 두 역사적 현실을 대비합니다. 곧 율법 아래의 종 됨(하갈·시내산·옛 언약)과 복음 안의 자유(사라·하늘의 예루살렘·새 언약)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관념이 아니라, 종 됨과 자유함이라는 실제 구원사적 전환입니다.


결론적으로, 예표론은 구약의 역사성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고 궁극적인 의미로 성취됨을 드러내는 강력한 신학적 (해석)도구입니다.



4.

직접 인용과 예언의 성취


신약성서—특히 마태복음—에서 두드러지는 구약 사용 방식은 이른바 예언 성취 모델입니다.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공식을 통해, 예수의 탄생과 사역, 고난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경륜의 정점에 이르렀음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지요. 이는 예수의 삶이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메시아적 정체성의 성취임을 입증하려는 명확한 신학적 목표를 갖는 해석을 적용했습니다.


두 가지 핵심 사례를 보겠습니다.
첫째, 마태 1:22–23에서 이사야서 7:14를 인용할 때, 마태는 히브리어 ‘알마(‘almâ, 젊은 여성)’ 대신 칠십인역의 ‘파르테노스(parthenos, 처녀)’를 사용합니다. 이는 동정녀 탄생을 강조하여 예수를 다윗에게 주어진 표징의 성취, 곧 약속된 다윗의 자손으로 연결하려는 해석적 의도입니다. 크리스터 스텐달은 이러한 읽기를 페셔(pesher) 전통—“이것이 곧 그것이다”—과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마태 1:22-23]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3 "처녀가 잉태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를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둘째, 마태 2:15의 호세아서 11:1 인용입니다. 원문은 출애굽의 과거를 말하지만, 마태는 이를 예수의 애굽 체류와 귀환에 적용합니다. 이는 문맥 무시가 아니라 예표론적 상응입니다. 마태는 예수를 새 이스라엘,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여, 이스라엘이 겪은 출애굽의 역사를 예수가 자기 삶 안에서 체현하고 완성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함을 논증합니다.

[마태 2:15] 이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정리하면, 마태의 성취 인용은 단순한 증명 구절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선포하는 신학적 선언(해석)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 12절은 신약의 구약 인용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한 본문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사야서 6장 9–10절을 인용하며,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마가 4:12] 이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해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사야 6:9-10] 9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여라. '듣기는 들어도 너희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보기는 보아도 너희는 알지 못할 것이다.' 10 이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고 눈을 감기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치료를 받을까 걱정이다."


논쟁의 핵심은 접속사 hina(‘~하기 위하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이를 목적으로 읽으면, 예수께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신학적으로 매우 어려운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반대로 당시 헬라어 용법을 따라 결과로 읽으면, 문제는 비유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완악함이며, 그 결과로 깨닫지 못함이 초래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선택은 단순한 문법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것인가라는 신학적 긴장과 직결된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보듯, 예언 성취 인용(해석)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드라마의 일부였음을 확증하는 강력한 논증 도구였습니다.



5.


지금까지 살펴본 보편적 방법론 외에도, 신약 저자들은 각자의 신학적 목적과 공동체의 상황에 맞추어 구약을 매우 창의적이고 독창적으로 (해석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히브리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들은 저자 고유의 신학적 비전이 구약 해석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며, 신약의 신학적 증언을 한층 풍성하게 만듭니다.


먼저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 제사 제도의 완성이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논증하기 위해 구약을 정교하게 엮어냅니다. 그 중심에는. 시편 110편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 시편을 서신의 기둥으로 삼아, 예수께서 아론 계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왕이심을 반복적으로 입증합니다(히 1:3; 10:12; 12:2). (참고, 반차(班次)는 ‘품계나 신분의 차례’를 뜻하는 고전 용어로, 제사장이나 문지기 등의 직무를 순번대로 수행하는 순서를 나타내는 용어임)

[시편 110:4] 여호와께서 맹세하셨으니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핵심은 대속죄일 모델의 재해석입니다. 히브리서는 레위기 16장의 대속죄일을 끌어와, 해마다 동물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가던 옛 제사와 대비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단번에(ephapax)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히브리서는 옛 언약의 제사보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질적으로 “더 좋은” 것임을 힘 있게 선언합니다.


요컨대, 히브리서는 구약을 단순히 인용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제사적 세계를 통째로 재구성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의 탁월함을 논증하는, 고도로 조직된 신학적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흩어져 있던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참조서와 같습니다. 저자는 이를 위해 구약을 적극적으로 호출합니다.


먼저 정체성의 언어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사용되던 표현—“거룩한 제사장”, “영적인 집”, “택하신 족속”, “하나님의 백성”(벧전 2:4–10)—을 그대로 수신자들에게 적용합니다. 이를 통해 한때 이방인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구약의 약속을 상속받은 언약 공동체임을 분명히 각인시킵니다.


다음은 구원의 전이해입니다. 베드로는 구원을 설명하는 기본 틀로 출애굽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속(벧전 1:18–19)은 흠 없는 어린양의 희생 제사라는 구약적 배경 위에서 비로소 그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요컨대 베드로전서는 구약의 언어와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도록 이끄는, 정체성 형성의 신학을 (해석적으로) 제시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독보적입니다. 여기서는 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직접 인용보다, 구약 전체를 묵시적 비전을 구성하는 ‘상징의 보고’로 (해석적으로) 활용합니다.


먼저 상징의 변용입니다. 저자는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 이미지를 가져와, 그 특징들을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제국 권력을 하나의 짐승으로 형상화합니다(계 13장). 구약의 상징을 현재의 역사 현실에 맞게 재배치한 것이지요.


다음은 이미지의 전환적 적용입니다. 이사야서 63장에서 원수를 심판하고 피 묻은 옷을 입고 오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계시록 19장에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됩니다. 여기서 피는 원수의 피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의미가 전환됩니다.

[계시록 19:13] 그는 피로 물든 옷을 입고 있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구약을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약의 상징 세계 안에 거주하며, 그 묵시적 문법을 창의적으로 재배치해 로마 제국에 맞서는 새로운 신학적 비전을 제시(하는 해석을 적용)합니다. 구약은 배경이 아니라, 계시록의 언어 그 자체입니다.



6.

정리하자면...


오늘 우리는 신약 저자들이 구약성서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 다양한 해석 및 적용 방식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전체를 복음 이해의 참조 틀로 삼는 접근에서부터, 예표론, 예언 성취 인용, 그리고 묵시적 상징의 차용에 이르기까지—그 방법은 참으로 다채롭고 역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적 작업에는 분명한 신학적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첫째, 신적 계시의 연속성을 확립하는 이었습니다. 신약 저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단절된 두 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의 구원 역사로 제시했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오랜 약속의 성취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 중심적 통일성을 부여했습니다. 구약의 역사와 인물, 율법과 제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수렴하며, 그분 안에서 비로소 의미가 완성된다고 해석혔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 전체는 하나의 중심축을 갖게 되었습니다.


셋째,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언어로 교회를 아브라함의 약속을 잇는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으로 규정(해석)했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공동체가 자신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2세기에 마르키온과 영지주의가 구약을 거부하려 했던 시도는, 역설적으로 신약 저자들의 작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레나이우스의 비유처럼, 그들은 왕의 초상화를 해체해 여우의 형상으로 바꾸었지만, 신약 저자들은 오히려 성경의 통일성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의 초상화를 온전히 드러내려 했던 겁니다.


결국 신약의 구약 해석은 학문적 기교가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 자체를 건 신학적 투쟁이었고, 그 투쟁 속에서 기독교 신학의 기초가 단단히 세워졌던 것입니다.


결국 초기의 해석의 목적에 의해 변용과 차용이 가능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해석이라는 행위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되겠습니다.


참고도서

⟪HERMENEUTICS⟫ Anthony C. Thiselton, 2009,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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