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수업에 텍스트가 있는가』를 기반으로...
들어가며...
이렇게 접근해 보시죠. 우연찮게 봤던 영화가 있습니다. ⟪윤희에게⟫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화면이 꺼지고, 그 암전 상태에서 "나도 네 꿈을 꿔"라는 대사를 윤희(김희애가 분)가 독백하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마지막 대사 "나도 네 꿈을 꿔" 이 텍스트만 읽고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으실까요? 이 텍스트에 내포되어 박제된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작동에 의해서 '읽는 나에게서' 그 의미라는 것이 만들어지는(발생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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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읽고, 그 텍스트 위에 얹힌 수많은 의미를 해석하며 이해하고, 나아가 행동을 바꾸고 신념으로까지 끌어안게 되기까지—우리는 실로 많은 과정과 망설임을 거쳐 그 일을 수행해 갑니다.
‘해석한다’는 행위 자체가 지닌 무게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바로 그 무게를 두고, 수많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먼저 고민하고 정리해 왔으며, 또 서로를 비평하고 비판하면서 이 사유의 전통을 발전시켜 온 듯합니다.
일단은, 바로 그 '해석이라고 하는 행위'의 무거움을 인지하고 뒤늦게라도 이를 이해해 보려는 애씀은 반드시 필요한 행위 아닐까 싶습니다.
그 여정이 제게는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하나의 놀이가 되어버린 이런 읽기는, 천여 조각이 넘는 퍼즐을 하나씩 맞춰 가듯, 의미의 자리를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 수천의 조각 중 하나의 자리를 찾아가는 심정으로 길을 찾아 떠납니다. 아이작 뉴턴이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썼다는데, 제게도 또 다른 거인을 찾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 The Authority of Interpretive Communities)
0. Intro...
20세기 후반 서구 문학 비평은 하나의 분명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텍스트를 자율적이고 완결된 유기체로 보고, 그 안에 고정된 의미를 찾으려 했던 신비평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것이지요. 바로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인물이 스탠리 피시입니다.
1980년에 출간된 그의 대표작 『이 수업에 텍스트가 있는가: 해석적 공동체의 권위』는, 텍스트의 객관적 의미라는 믿음을 정면에서 해체하고, 의미의 주도권을 독자와 해석 공동체로 이동시킨 문제작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문학 이론서가 아니라, 우리가 ‘의미를 안다’고 말할 때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가를 근본에서 다시 묻는 인식론적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책을 중심으로, 피시가 초기의 정동적 문체론에서 출발해 ‘해석적 공동체’ 이론으로 어떻게 이동해 갔는지를 간략히 살펴보려 합니다. 아울러 그의 주장이 문학 연구를 넘어 법학과 언어학, 그리고 현대 사회의 소통 구조에까지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도 짚어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테리 이글턴, 로버트 숄즈, M. H. 아브람스 등 동시대 비평가들과의 논쟁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피시 자신이 이 이론을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하는 사유의 과정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피시의 책을 중심으로 내용을 요약•정리하면서 관련 이론을 습득하고자 합니다.
1. 이론화의 여정
1940~50년대를 풍미했던 신비평은 문학 연구를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W. K. 윔사트와 먼로 비어즐리는 이른바 ‘의도의 오류’와 ‘감동의 오류’를 통해,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반응을 비평에서 과감히 배제했습니다. 그들에게 텍스트란 ‘페이지 위의 단어들’로 이루어진 자족적 언어 구조물, 의미가 내부에 고정된 언어적 아이콘이었습니다. 비평가의 역할은 그 의미를 정밀한 분석으로 발굴하는 것이었고요.
바로 이 전제에 스탠리 피시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의미를 텍스트 안에 숨어 있는 보물로 보지 않습니다. 의미는 독자와 텍스트가 만나는 순간, 그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텍스트는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라는 거죠.
우리는 한 번에 모든 단어를 읽지 않습니다. 읽는 동안 독자는 가설을 세우고, 기대하고, 수정하며, 때로는 좌절합니다. 피시에게 의미란 바로 이 읽기의 과정, 그 역동성 자체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분명합니다.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행위 속에서 생성됩니다. 이 지점에서 피시는 신비평이 세워 놓았던 토대 자체를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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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의식은 스탠리 피시의 독창적인 방법론, 이른바. ‘정동적 문체론’으로 구체화됩니다. 그의 초기 대표 에세이. 「독자 안의 문학」(1970)은 그 선언문이라 할 만한 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동(Affective)’이란 독자의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텍스트의 언어 구조가 독자의 인지 과정에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가를 가리킵니다.
피시는 질문 자체를 바꿉니다.
“이 문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이 문장은 독자에게 무엇을 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이지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존 밀턴이나 토머스 브라운의 난해한 문장을 분석합니다. 이 문장들은 독자를 어떤 결론으로 이끄는 듯하다가, 갑작스러운 문법적 반전이나 논리적 균열을 통해 그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피시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피시에게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을 읽는 동안 독자의 의식 속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의미는 문장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읽으며 겪는 이 인지적 흔들림 속에서 생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동적 문체론이 보여주고자 했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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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의 첫 번째 주저 『죄에 놀란(Surprised by Sin)』(1967)은 그의 방법론이 실제 비평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피시는 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밀턴이 독자를 의도적으로 사탄의 화려한 수사학에 매혹되게 만든 뒤, 그 매혹 자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깨닫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읽는 과정에서 겪는 오독과 혼란,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텍스트가 의도한 핵심적인 종교적 체험, 곧 의미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 시기 피시 이론의 핵심 개념이 바로 ‘정보를 갖춘 독자’입니다. 그는 아무 방식의 읽기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피시가 상정한 독자는 모국어 화자로서의 언어 능력을 갖추고, 문학적 관습에 익숙한 이상적 독자입니다. 이는 그가 여전히 텍스트의 객관적 구조가 독자의 반응을 어느 정도 통제한다고 믿었음을 보여줍니다.
요컨대, 초기의 피시에게 텍스트는 여전히 권위를 지닌 존재였습니다. 다만 그 권위는 의미를 고정해 놓는 데 있지 않고, 독자의 경험을 특정한 방향으로 촉발하는 힘에 있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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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동적 문체론은 곧 이론적 난관에 부딪힙니다. 의미가 오로지 독자의 경험 속에서만 발생한다면, 왜 서로 다른 독자들이 같은 텍스트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놀라울 만큼 유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 것이지요.
피시는 텍스트의 형식적 특징이 독자의 반응을 유도한다고 설명했지만, 곧 이런 반문에 직면합니다. “그 형식적 특징 자체가 이미 해석의 결과가 아닌가?” 예컨대 어떤 독자는 한 문장을 모호하다고 느끼며 멈춰 서지만, 다른 독자는 아무 문제 없이 읽고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모호성’은 텍스트에 원래 들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독자가 만들어낸 것일까요.
피시는 1970년대 중반까지 바로 이 질문과 씨름합니다. 그리고 점차 결론에 이릅니다. 텍스트 자체에 남아 있던 마지막 권위마저 내려놓고, 의미 형성에서 독자의 구성적 역할을 훨씬 더 급진적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쪽으로 말입니다. 이 전환이 바로, 이후 그가 해석적 공동체 이론으로 나아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2. 해석적 공동체로의 전환
피시의 이론적 여정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된 글이 바로 1976년에 발표된 「변이본 해석하기(Interpreting the Variorum)」입니다. 이 에세이는. 스탠리 피시가 존 밀턴의 소네트를 둘러싼 다양한 편집자와 비평가들의 주석(variorum)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피시는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포착합니다. 비평가들은 같은 시 구절을 두고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으면서도,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문법적 증거는 거의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전통적 관점은 이렇게 말합니다. 텍스트의 형식적 특징이 먼저 존재하고, 해석은 그 결과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피시는 이 인과관계를 과감히 뒤집습니다. 그의 유명한 명제는 이것입니다.
“해석적 전략이 형식적 특징을 결정한다.”
우리가 텍스트에서 어떤 구조나 패턴을 ‘발견했다’고 느낄 때, 실제로는 이미 특정한 해석적 틀을 가지고 텍스트를 그렇게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텍스트 안에 증거가 있어서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 증거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 에세이를 통해 피시는 더 이상 텍스트의 객관적 형식에 기대지 않습니다. 의미의 주도권은 이제 완전히 해석의 전략, 그리고 그것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그가 이후 전개하게 될 해석적 공동체 이론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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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오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렇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마음대로 상상해 내는 허구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이른바 주관주의나 유아론(solipsism)의 위험이지요.
텍스트의 객관적 실체가 사라진다면, 비평은 결국 개인적 망상의 나열로 전락하지 않겠느냐는 비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피시는 자신의 핵심 개념인 ‘해석적 공동체’를 도입합니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정면 돌파입니다.
먼저, 공동체의 정의입니다. 해석적 공동체란 텍스트를 읽기 위해 모인 집단이 아니라, 텍스트를 쓰고, 다시 말해 구성하기 위해 동일한 해석적 전략을 공유하는 집단입니다.
둘째, 개인의 부재입니다. 피시에게 독자는 고립된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 사회, 교육 제도, 학문 전통, 비평 학파 속에서 읽습니다. 독자가 텍스트에 접근할 때 사용하는 기대, 가정, 질문 방식은 개인의 독창물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학습된 공적인 자원입니다.
셋째, 객관성의 재정의 입니다. 의미는 텍스트라는 객체 안에 있지도 않고, 독자의 주관적 내면에 있지도 않습니다. 의미는 그 둘을 동시에 규정하는 해석적 공동체의 규범 속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흔히 ‘객관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특정 시점에 특정 공동체가 합의해 공유하고 있는 해석 관습에 불과합니다.
이로써 피시는 두 극단을 동시에 거부합니다. 신비평식 객관주의도, 아무렇게나 읽어도 된다는 자유방임적 주관주의도 아닙니다. 독자는 텍스트를 마음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자의 인식 구조 자체가 이미 공동체의 규범에 의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텍스트 역시 스스로 의미를 발산하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오직 공동체의 해석 전략이 투사될 때에만, 비로소 의미 있는 대상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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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적 공동체라는 개념이 갖는 힘은, 해석의 안정성과 변화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안정성입니다. 왜 우리는 텍스트를 두고 서로 말이 통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같은 해석적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최소한 그 공동체의 규칙과 관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실에서 교수와 학생이 어떤 해석에 합의할 수 있는 이유도,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학계’라는 제도가 요구하는 읽기 방식과 판단 기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해석은 왜 달라질까요? 독자가 속한 공동체가 바뀌거나, 공동체 자체의 해석 전략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문학적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던 텍스트가 오늘날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텍스트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우리 공동체의 비평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도, 무작위적으로 흩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의미는 공동체의 규범 속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면서도, 그 규범이 바뀌는 순간 함께 이동합니다. 이것이 피시가 말한 해석의 사회적 성격입니다.
3. 핵심 텍스트 심층 분석
이 책은 피시 이론이 가장 날카롭게 성숙했던 시기의 에세이들을 묶은 저작입니다. 특히 후반부 강연록, 곧 13장부터 16장까지는 그의 구성주의적 입장이 가장 선명하고 도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지요. 여기서 피시는 의미의 생성, 객관성의 성격, 해석의 권위를 정면으로 문제 삼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주요 에세이들을 하나씩 짚어보며, 피시가 어디까지 나아갔는지, 그리고 그 주장이 왜 지금까지도 논쟁적인지를 함께 살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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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수업에 텍스트가 있는가?」 _ 아티클 원문 (소스: MIT)
이 에세이의 제목이 된 일화는 피시 이론의 핵심을 단번에 보여주는 하나의 알레고리입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랍니다. 학기 첫날 한 학생이 이렇게 묻습니다. “이 수업에 텍스트가 있나요?(Is there a text in this class?)”
교수는 이를 교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하고 “네, 노턴 앤솔러지를 씁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학생이 다시 묻지요. “아니요, 제 말은 우리가 시와 사물을 믿나요, 아니면 그저 우리만 있나요?” 이 질문은 교재가 아니라, 교수의 이론적 입장, 곧 객관주의냐 구성주의냐를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시는 이 짧은 일화를 통해 맥락의 선재성(priority of context)이라는 자신의 핵심 주장을 밀도 있게 제시합니다.
첫째, 문자적 의미의 부재입니다. 전통적 언어관, 이를테면 M.H.아브람스 같은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이 수업에 텍스트가 있는가?”라는 문장은 하나의 고정된 문자적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보듯, 이 문장은 교재의 유무라는 의미로도, 이론적 입장이라는 의미로도 완벽하게 이해됩니다. 어느 쪽도 비문이 아니지요.
둘째, 상황적 구속성입니다. 교수가 처음 질문을 오해한 것은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학기 첫날의 행정적 상황’이라는 일상적 맥락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생의 추가 설명 이후에야 질문의 진짜 뜻을 이해한 것은, 그가 ‘현대 문학 이론의 논쟁’이라는 또 다른 맥락으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문장은 맥락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어떤 상황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 상황이 의미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자적 의미’란, 사실상 가장 익숙하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표준적 맥락(standard context)에서의 의미일 뿐입니다.
이 일화를 통해 스탠리 피시는 말합니다. 의미는 문장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서 있는 자리, 곧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고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가 던지는 가장 도발적인 메시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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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알아보는 법」 — 급진적 구성주의 _ 아티클 원문 (소스: 알버타 대학)
이 에세이는 피시가 수행한 유명한 수업 실험을 다룹니다. 이야기 자체가 그의 이론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피시는 아침의 언어학 강의에서 칠판에 과제로 내준 언어학자들의 이름 목록을 적어둡니다.
목록: Jacobs-Rosenbaum, Levin, Thorne, Hayes, Ohman (?)
그리고 다음 시간, 17세기 종교시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이 목록을 지우지 않은 채 “이것은 시다. 해석해 보라”고 주문합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학생들은 즉각 이 명단을 종교시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Jacobs-Rosenbaum’은 야곱과 장미, 곧 구약과 성모 마리아 혹은 십자가의 상징으로,
‘Thorne’은 가시 면류관으로,
‘Ohman’은 “O Man(오, 인간이여)”라는 시적 호칭으로 해석됩니다.
심지어 이름들의 배열 구조는 십자가의 형상이나 상형문자처럼 분석되었습니다.
피시의 통찰은 분명합니다. 이 목록 안에 원래부터 시적 상징이나 은유가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텍스트에서 시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시다”라는 교수의 선언, 곧 프레임에 따라 시를 읽는 해석적 전략을 작동시켰고, 그 결과 이름 목록을 시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피시는 말합니다. 인식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행위가 아니라, 대상을 특정한 범주로 분류하고 구성하는 행위라고요. 이 실험을 통해 그는 객관적 데이터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데이터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해석적 틀의 산물임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의 핵심 주장이 또렷해집니다. 의미는 텍스트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의미는 우리가 어떤 읽기의 규칙을 가지고 그 앞에 서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생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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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적인 상황, 문자적 언어, 직접 화행...」 — 언어철학 비판
이 긴 제목의 에세이에서 피시는 존 서얼로 대표되는 화행 이론(Speech Act Theory)을 검토합니다. 서얼은 언어 행위를 ‘직접 화행’과 ‘간접 화행’으로 구분하고, 맥락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정상적인 상황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피시는 단호하게 반박합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란 결코 중립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익숙해 맥락으로 인식하지 못할 뿐인, 특정한 문화적 맥락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대표적 사례가 바로 “The air is crisp(공기가 맑다)” 논쟁입니다. E.D.허시는 이 문장의 ‘문자적 의미’가 기상학적 묘사이며, 연주에 대한 칭찬 같은 의미는 부차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피시는 이를 뒤집습니다. 우리가 이 문장을 날씨 묘사로 듣는 이유는 문장 자체가 그 의미를 강제해서가 아니라, ‘기상학적 맥락’을 기본값(default)으로 설정하는 관습 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만약 음악회 도중 이 말을 들었다면, 날씨가 아니라 연주에 대한 평가로 듣는 것이 오히려 문자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그래서 피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장은 결코 맥락 밖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의미는 고정된 규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의미는 언제나 상황적 필요와 목적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주장은 형식주의 언어관의 근간을 흔들며, 의미의 주도권을 다시 맥락과 해석의 관습으로 돌려놓습니다.
요컨대, 피시에게 언어는 규칙의 산물이 아니라 사용의 산물이며, 정상성은 자연이 아니라 공동체가 만든 관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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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증 대 설득」 — 설득으로서의 비평
책의 마지막 장에서 스탠리 피시는 비평 활동의 본질을 분명히 규정합니다. 객관주의 모델에서 비평이란 텍스트 속에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논증(demonstration)으로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피시의 모델에서 비평은 그런 작업이 아닙니다. 비평은 본질적으로 설득(persuasion)입니다.
왜냐하면 절대적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가는 자신의 해석이 유일하게 옳다고 증명할 수 없습니다. 대신 자신의 해석적 전략이 더 유용하고, 더 흥미롭고, 더 정합적이라는 점을 독자, 곧 공동체에 설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득에 성공하는 순간, 그 해석은 공동체의 상식이 되고, 곧 사실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문학 연구는 초월적 진리를 향한 탐구가 아니라, 어떤 해석의 틀을 채택할 것인가를 둘러싼 수사학적 경쟁, 다시 말해 권력의 장(field)에서 벌어지는 설득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바로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도발적인 결론입니다. 비평은 증명이 아니라 설득이며,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지고 굳어지는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4. 비평적 수용과 이론적 논쟁
피시의 이론은 1980년대 비평계에 그야말로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스탠리 피시의 주장은 특정 진영에만 도전한 것이 아니라, 좌파와 우파, 전통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 모두를 동시에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이 논쟁들은 단순한 이론 다툼이 아니라, 피시 이론이 지닌 정치적·윤리적 함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험대였습니다. 의미와 진리, 권위가 공동체의 합의와 설득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어떤 책임을 지게 되는가—이 질문이 비평의 장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번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피시를 둘러싼 논쟁은 소란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사실’이라 부르고, 누가 그 사실을 말할 권리를 갖는가를 묻는, 근본적인 사유의 계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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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적 반격 — M.H.아브람스
이 논쟁의 한복판에 선 인물이 바로 M.H.아브람스입니다. 『노턴 앤솔러지』의 편집자이자 낭만주의 비평의 거두인 그는, 자크 데리다, 해럴드 블룸과 함께 스탠리 피시를 묶어 “새로운 독자들(New Readers)”이라 명명하며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 정점이 바로 에세이 「해체주의적 천사(The Deconstructive Angel)」입니다.
아브람스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언어에는 공유된 규범과 고정된 의미가 있어야 하며, 의미가 전적으로 독자—혹은 공동체—에 의해 구성된다면 저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인류의 지적 유산은 보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문명사회의 토대인 합리적 의사소통을 붕괴시킨다는 경고이지요.
이에 대해 피시는 단호히 응수합니다. “걱정하지 마라(Not to worry).” 사람들은 추상적 규칙 때문에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관습을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해석적 공동체는 개인의 자의적 해석을 강력하게 통제하며, 그 결과 의미의 안정성은 오히려 확보됩니다. 다만 그 안정성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당분간 유효한 합의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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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비판 — 테리 이글턴
피시에 대한 비판은 보수 진영에서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오히려 피시의 이론이 겉보기와 달리 매우 보수적이라고 공격합니다.
이글턴의 핵심 비판은 이것입니다. 피시의 ‘해석적 공동체’는 현재의 학문 제도를 사실상 절대화한다는 것입니다. 피시는 우리가 어떻게 읽는지를 기술할 뿐, 그 해석 전략이 어떤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이렇게 읽는다”는 말이 현재의 지배적 관습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고, 문학 비평이 사회 변혁의 도구가 될 가능성은 차단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글턴은 피시를 ‘지적 기업가’, 나아가 비꼬아 “학계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진리나 정의의 문제보다, 논쟁에서 이기고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능숙한 소피스트적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입니다. 이글턴에게 피시의 이론은, 어떤 비판이 제기되더라도 “그 또한 너희 공동체의 해석일 뿐”이라며 모두 흡수해 무력화시키는 궤변(sophistry)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글턴의 문제 제기는 단순한 이론 논쟁이 아닙니다. 피시의 이론이 권력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가, 아니면 현존 질서를 안정화하는가라는, 문학 비평의 정치적 책임을 정면으로 묻는 도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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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저항 — 로버트 숄즈
또 한 명의 중요한 비판자는 기호학자 로버트 숄즈입니다. 그는 피시가 텍스트의 물리적 실체를 지나치게 경시한다고 지적합니다.
숄즈의 핵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텍스트는 언어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 구조는 독자의 해석에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는 것이죠. 숄즈는 피시가 해석적 공동체의 힘을 과장한 나머지, 텍스트가 가하는 최소한의 저항마저 무시하는 ‘해석적 제국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합니다.
이에 대한 피시의 대응도 단호합니다. 그는 텍스트의 “물리적 특징”조차 해석의 산물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숄즈가 말하는 “언어적 구속” 역시 숄즈가 속한 기호학적 공동체가 공유하는 해석 전략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 공방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텍스트가 해석을 어디까지 제약할 수 있는가, 혹은 그 제약마저도 결국 해석의 산물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피시는 끝까지 해석의 사회적 조건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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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한 또 하나의 약점은 바로 ‘변화(change)’의 문제입니다. 만약 개인이 공동체의 해석 전략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면, 새로운 해석은 어떻게 등장하고, 비평의 패러다임은 어떻게 전환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지요.
이에 대해 피시는 변화가 외부의 영웅적 개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서 작동하는 해석 원리들 사이의 충돌과 확장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의 규범이 다른 규범과 맞부딪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읽기 방식이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여전히 논쟁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 속에서 개인의 창의적 주체성, 곧 agency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시의 이론은 변화의 가능성을 말하면서도, 그 변화를 실제로 만들어내는 주체를 끝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5. 법학 및 문화 연구로의 확장과 현대적 의의
『이 수업에 텍스트가 있는가』 이후 스탠리 피시는 자신의 이론을 법학으로까지 확장합니다. 이는 문학 이론이 학문 내부에 머무르지 않고, 해석과 권력이 실제로 작동하는 사회적 장—특히 법이라는 제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행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피시의 작업은 ‘해석’이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권력의 문제임을 드러내며, 문학 이론이 사회 전반의 의미 생산 방식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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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미국 헌법과 법률 텍스트의 해석을 둘러싼 실제 논쟁 속으로 적극 개입합니다. 그는 보수 법학자들이 내세우는 원전주의(Originalism)—법의 의미가 제정 당시의 의도나 문언에 고정되어 있다는 주장—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첫째, 법적 텍스트의 불확정성입니다. 스탠리 피시에 따르면, 헌법 조항 역시 문학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고정된 의미를 발산하지 않습니다. 법의 의미는 판사, 변호사, 법학자로 이루어진 법적 해석 공동체가 그 시점에 공유하는 합의와 관습 속에서 결정된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권력으로서의 해석입니다. 따라서 판결은 “법에 무엇이 쓰여 있는가”를 발견하는 작업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법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치적 행위라는 겁니다. 이 관점은 비판 법학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으며, 법의 중립성이라는 신화를 해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요컨대, 피시는 법 해석을 기술적 판독이 아니라 제도적 선택으로 재정의합니다. 해석은 언제나 공동체의 규범과 권력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법 역시 그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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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오늘의 상황에서 스탠리 피시의 이론은 뜻밖의 현실성을 얻습니다. 이른바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 소셜 미디어와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파편화된 공간 속에서, 피시가 말한 해석적 공동체들은 극단적으로 분화되어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첫째, 반향실 효과(Echo Chamber)입니다. 서로 다른 정치적·이념적 공동체들은 동일한 뉴스라는 텍스트를 두고 전혀 상반된 해석을 내놓고, 상대의 해석을 ‘가짜 뉴스’로 규정합니다. 이는 피시가 말했듯, 사실(fact)은 해석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산물이라는 명제가 사회적 현실로 드러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설득의 윤리입니다. 이 상황에서 절대적 진리에 호소하는 전략은 거의 효력을 잃습니다. 피시의 이론은 오히려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해석적 전제와 공동체적 규범 속에서 텍스트를 읽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전제를 공유하거나 수정하도록 설득하는 수사학적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피시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어떤 해석의 조건 위에서 서로를 설득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우리가 그의 이론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6. 정리를 정리하며...
스탠리 피시의 『이 수업에 텍스트가 있는가』는 텍스트 숭배의 시대를 끝내고 독자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운 해방의 서사인 동시에, 진리의 기준을 전문가 집단, 곧 공동체에 이양한 엘리트주의적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남긴 가장 중요한 통찰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본다는 것이죠. 해석적 공동체는 우리에게 의미의 안정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는 감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피시는 말합니다. 이 감옥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다만 하나의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로 이동할 뿐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피시의 질문은 결코 “이 텍스트의 올바른 의미는 무엇인가?”가 아닙니다. 그의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어떤 권위로, 어떤 목적을 위해 이 텍스트를 이렇게 읽게 만드는가?”
이것은 문학적 질문이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입니다.
결국 텍스트가 사라진 수업에 남는 것은 권력과 설득, 그리고 끝나지 않는 해석의 게임입니다. 이것이 바로 피시가 우리에게 보여준 현대 비평의 민낯, 그리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지적 운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극이지만, 어쩌겠습니까.
받아들이고 적응하든지, 대응해야죠.
[관련서적]
1.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 The Authority of Interpretive Communities』, 스탠리 피시, Harvard Univ Pr., 2007.
2. 『HERMENUTICS』, 엔서니 티슬턴,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