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은 지성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

수전 손택의 "해석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을 생각하며...

by KEN

해석에 반하여(Against Interpretation)



0.

그녀 '수전 손택'


1966년 출간된 수전 손택의 첫 비평집 《해석에 반하여》는 20세기 중반 서구 문화의 지각 변동을 예고한 예언서이자 하나의 미학적 선언문이라는 평가입니다.


손택이 이 책을 집필하던 1960년대 초반, 뉴욕의 지성계는 라이오넬 트릴링이나 필립 라브 등으로 대표되는 ‘뉴욕 지성인(New York Intellectuals)’ 그룹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파르티잔 리뷰(Partisan Review)》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문학을 도덕적·사회적 책임의 맥락에서 해석하거나,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를 결합한 깊이 있는 의미 탐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택은 이러한 기존의 엄숙주의적 비평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그녀는 모더니즘의 끝자락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동기 사이에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위계가 무너지는 현상을 예민하게 포착했고, 이를 이론화한 최초의 비평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1.

폭력 — 본질을 대체해버린 모방(미메시스)


손택의 이론적 기반은 서구 예술론의 기원, 곧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되돌아가는 데서 출발합니다.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논쟁을 불러내는 것이 핵심적인 출발점입니다.


수전 손택은 서구 미학이 오랫동안 예술을 ‘실재의 모방’으로 규정하는 미메시스 이론에 갇혀 있었다고 진단합니다. 플라톤에게 예술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의 사물을 다시 모방하는, 말 그대로 “모방의 모방”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침대 그림은 실제 침대를 모방한 것일 뿐이며, 그 실제 침대조차 이데아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플라톤의 관점에서 예술은 진리로부터 두 단계나 멀리 떨어진 열등한 활동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실용적 가치도 없는 무용한 것이었습니다. 침대 그림 위에서는 잠을 잘 수 없다는 식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지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등장합니다. 그는 예술이 인간의 위험한 감정을 정화, 즉 카타르시스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술의 ‘치료적 유용성’을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플라톤의 공격을 방어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손택은 바로 이 지점을 서구 미학의 결정적 패착으로 봅니다. 예술을 옹호하기 위해 예술이 ‘무엇을 하는가(기능)’ 혹은 ‘무엇을 말하는가(내용)’를, 예술이 ‘어떻게 존재하는가(형식/존재)’보다 앞세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잔 손택은 그의 칼럼집의 표제 칼럼인 "해석에 반하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여기서 해석이란 말을 나는 특정한 코드, 해석의 어떤 '규칙들'을 보여주는 의식적 행위라는 뜻으로 썼다.

예술에서 해석은 전체 작품에서 어떤 요소들(X, Y, Z 등등)을 뽑아내는 일을 뜻한다. 해석이라는 일은 실질적으로 번역과 같은 일이다. 해석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봐요, X는 사실 A잖아요(또는 A를 의미하잖아요)? 저 Y는 사실 B이고, 저 Z는 사실 C라는 거 모르겠어요?" _ ⟪해석에 반하여⟫ 23-24쪽



그 결과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율적 실체가 아니라, 특정한 진술이나 도덕적 교훈을 담는 그릇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수천 년간 이어질 ‘내용(Content)’과 ‘형식(Form)’의 파괴적인 이분법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 환원주의적 폭력 —

해석자는 작품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않고, "이것은 실은 저것을 의미한다(X is really A)"라는 도식을 강요한다. 예를 들어,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침묵》에 등장하는 탱크를 남근의 상징으로 해석하거나,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서구 문명 쇠퇴의 알레고리로 읽는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해석은 작품이 가진 고유한 신비, 불투명성, 감각적 디테일을 제거하고, 비평가가 미리 준비한 지적 체계(이데올로기나 심리학) 속에 작품을 구겨 넣는 폭력이다.



2.

해석 — 지성의 예술에 대한 복수


수전 손택이 표제 에세이 「해석에 반하여」에서 비판의 칼날을 겨누는 대상은 20세기 중반을 지배하던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적 비평입니다. 그녀는 이러한 경향을 “공격적이고 불경스러운 해석학”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고대의 해석은 신화나 텍스트를 당대의 요구에 맞게 수정하려는 비교적 보수적인 시도였습니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신들을 도덕적으로 알레고리화하는 작업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해석은 성격이 다릅니다. 그것은 텍스트의 표면을 그대로 두지 않고 파괴한 뒤, 그 뒤에 숨겨져 있다고 가정되는 ‘진정한 의미(Latent Content)’를 발굴하려는 일종의 채굴 작업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손택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해석은 지성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Interpretation is the revenge of the intellect upon art)

그녀는 같은 칼럼에서 또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지성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에너지와 관능성을 억누르는 문제를 안고 있는 문화에서 «해석은 지성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해석은 지성이 세상에 가하는 복수이기도 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로 이루어진 그림자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세계를 척박하게 만들고 고갈시키는 것이다. 세계를 이 세계로 바꾸는 일이다 ('이 세계'라고! 또 다른 세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_ 「해석에 반하여」 26쪽


— 그림자 세계의 구축 —

손택에 따르면, 해석한다는 것은 세계를 빈곤하게 만들고 고갈시키는 행위다. 해석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shadow world of meanings)"를 세우기 위해 실재하는 세계를 훼손한다. 이는 예술 작품을 관리 가능하고(manageable), 편안한(comfortable) 대상으로 길들이는 행위이며, 예술이 가진 전복적이고 야생적인 힘을 거세하는 것이다.



3.

대안 — 예술의 에로틱스


그렇다면 수전 손택은 해석의 대안으로 무엇을 제시하고 있을까요?


그녀는 에세이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해석학(hermeneutics)이 아닌 예술의 성애학(erotics of art)이 필요하다.” (36쪽)


이 선언은 지적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반지성주의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적 태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대신, 작품의 형식과 감각적 표면에 고도로 집중하는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 예술을 설명하려 들기보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감각되고 어떻게 현존하는지를 경험하는 현상학적 비평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 형식의 기술(Description)

비평가의 임무는 작품에서 의미를 캐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어떻게' 그 효과를 만들어내는지를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손택은 "작품의 감각적 표면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표면을 드러내는 비평"을 옹호한다.


— 투명성 —

예술에서 가장 해방적인 가치는 '투명성'이다. 이는 사물의 반짝임, 그 자체의 존재감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상태를 말한다. 손택은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이나 오즈 야스지로(Yasujiro Ozu)의 영화를 예로 들며, 이들의 작품은 해석을 거부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관객의 감각을 사로잡는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예술은 우리의 무디어진 감각을 깨우고 회복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손택의 칼럼 마지막에 그녀가 하고픈 결론적 서술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것 말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지금 중요한 것은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가 할 일은 내용에 대한 관심을 줄여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예술 비평의 목적은 예술 작품을(또한 그러면서 우리의 경험을) 더욱 생생한 것으로 (그 반대가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비평의 기능은 그것이 어떻게 그런지를 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해석학이 아닌 예술의 성애학이 필요하다"

_ 「해석에 반하여」 36쪽



4.

정리하자면...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하여」는 20세기 비평사의 흐름을 내용 중심에서 형식과 감각 중심으로 전환시킨 중요한 저작입니다. 그녀는 예술 작품을 지적 해부의 대상으로 다루는 관행에서 해방시켜, 우리 몸의 감각 기관이 직접 부딪히고 체험해야 할 ‘실재하는 사물’로 다시 자리매김했습니다.


오늘날을 생각해 봅니다. 유튜브 알고리즘과 소셜 미디어의 짧은 글들이 거의 모든 문화적 현상을 즉각적으로 해석하고 소비해버리는, 말 그대로 ‘초해석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택의 메시지는 오히려 더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과연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미 입력된 데이터베이스의 패턴에 따라 대상을 재단하고 있는 것일까요? ('현상'을 과연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누군가가 해석한 방식과 결과'에 따라 그저 휘둘리고 있는 것일까요?)


손택은 우리에게 해석의 안경을 벗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술 작품이 발산하는 빛과 표면의 감촉을 맨눈으로 마주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뎌진 우리의 감각을 다시 날카롭게 벼리라고, 그녀는 준열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참고도서]

1. 《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홍한별 역, 윌북, 2025.



ps. 오늘의 주제와 관련한 재미있는(의미있는) TED 영상 한 편 보시죠.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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