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CIA는 왜 쿠르드 민병대와 접촉하며, 튀르키에는 왜 주시하는가?
Intro...
최근, 집중적으로 쿠르드족과 관련한 기사가 온통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기사의 핵심 내용들은 대체적으로 이런 류입니다.
- CIA의 쿠르드 무장 지원 및 봉기 유도
- 트럼프 대통령과 쿠르드 지도부의 직접 소통
- 이란계 쿠르드 정당들의 '대통합 전선' 형성
- 미국의 현실주의적 이란 내 '다전선 전략'
- 튀르키에의 반발
- 이라크 자치정부(KRG)의 중립성
- 이란 지상 작전의 개시 시점
- 이라크 쿠르드 전사 수천명, 이란으로 진격중
- 등등
이렇듯, 그동안 미국에 있어 쿠르드족은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대리인'이자 '가장 쉽게 버려지는 동맹'이었습니다. 이번 접촉이 이란 민중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도구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비극적 내전의 서막이 될지는 미국이 이들에게 약속한 '전후 지위'가 얼마나 구체적인지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쿠르드일까요? 그리고
그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런 소위 "쿠르드족 이슈"의 기원은 어떤 것일까요?
—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는 작업은 단순히 과거의 파편을 모으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정치적 갈등과 민족적 열망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서사를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 없는 민족’으로 불리는 쿠르드족에게 이러한 문제는 더욱 절실합니다. 그들에게 뿌리의 문제는 단순한 고고학적 관심사가 아니라, 오늘의 실존적 투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메소포타미아 평원과 자그로스 산맥에 걸쳐 살아온 이들의 역사는 고대 근동 문명의 여명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 긴 역사 속에는 끊임없는 적응과 저항, 그리고 외부 세력에 의해 반복되어 온 배신과 분열의 서사가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논의에서는 쿠르드족의 고대적 기원에서부터 현재 튀르키예와 이란을 둘러싼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 복합적인 역사적 궤적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고대 근동의 유산과 혈통의 기원
쿠르드족의 기원을 둘러싼 학술적 논의는 크게 두 가지 해석 틀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민족의 기원을 오래된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찾으려는 ‘원초론적Primordialist’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정체성이 역사적·사회적 과정 속에서 구성된다고 보는 ‘구조론적Constructionist’ 관점입니다.
특히 쿠르드 민족주의 서사에서 가장 강력하게 등장하는 상징은 고대 메디아Medes 인들입니다. 기원전 6세기경 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메디아인은, 오늘날 많은 쿠르드인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자 역사적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① 메디아 가설과 언어적 계보
쿠르드 국가(國歌)에서도 명시되듯이, 쿠르드인들은 스스로를 흔히 “메디아와 카이 호스로Kai Khosrow의 아이들”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들이 자신의 역사적 기원을 고대 메디아 전통과 연결하려는 강한 상징적 의식을 보여 줍니다.
언어학적 측면에서도 일정한 근거가 제시됩니다. 쿠르드어는 인도-유럽어족 가운데 이란어파의 북서부 분파에 속하는 언어로 분류되는데, 이 분류는 고대 메디아어와 일정한 연관성을 가질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의 엄밀한 검증을 살펴보면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메디아가 하나의 단일하고 중앙집권적인 제국을 형성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서술이 사실상 헤로도토스의 기록⟪역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학계에서 꾸준히 지적되어 왔습니다.
또한 언어학자들 역시 메디아어와 쿠르드어 사이에 일정한 친연성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다른 북서부 이란계 언어들보다 특별히 쿠르드어와 더 가깝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② 유전학적 통찰과 이질적 통합
최근 인류학과 DNA 연구의 성과를 살펴보면, 쿠르드족의 기원이 하나의 단일한 혈통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여러 집단이 결합한 복합적인 ‘융합’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유전학적 자료에 따르면, 쿠르드족의 가장 오래된 조상은 초기 신석기시대 비옥한 초승달 지대 북부에 살던 토착 주민 집단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해 온 전사 엘리트 집단—유전학적으로는 R1a1 하플로그룹과 관련된 집단—이 이 지역에 들어오면서, 이들 토착 집단이 언어적으로 '이란화'되는 과정이 진행된 것으로 분석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쿠르드족은 자그로스 산맥 일대의 토착 집단과 이동해 온 이란계 집단이 결합하여 형성된 일종의 ‘크리올Creole’적 성격의 민족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식민지나 이주지에서 형성된 후손 집단, 여러 인종·민족·문화·언어 전통이 섞여 새로운 사회적·문화적 규범과 정체성을 만들어 낸 집단을 의미)
특히 역사학자 마이클 이자디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합니다. 그는 고대 후르리인Hurrians이 쿠르드 문화와 종교 전통의 기층을 형성했으며, 이후 인도-이란계 집단이 유입되면서 언어는 변화했지만 문화적 원형은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쿠르드족은 단일한 민족의 직선적 후손이라기보다 고대 근동에서 토착민과 이주민이 오랜 시간 교차하고 결합하면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중세 쿠르드 '막간극'과 이슬람 시대
이슬람의 정복이 이루어진 이후, 쿠르드족은 칼리프 체제 안에서 점차 중요한 군사적·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7세기 무렵 사용되던 ‘쿠르드Kurd’라는 용어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특정한 혈통적 집단을 가리키는 개념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이 표현은 주로 자그로스 산맥 서쪽 지역에 거주하던 유목 집단을 지칭하는 사회경제적 용어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집단들은 점차 자신들만의 공통된 역사와 문화, 언어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게 됩니다.
① 쿠르드 왕조의 번영과 '쿠르드 막간극'
950년에서 1050년 사이의 시기는 학자들에 의해 흔히 ‘쿠르드 막간극Kurdish Interlude’이라고 불립니다. 이 시기에는 아바스 칼리프 체제가 점차 약화되는 틈을 타 여러 쿠르드 부족들이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고, 각지에서 자체적인 국가를 세우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하산와이이드 왕조(Hasanwayhids, 959–1015)입니다. 이들은 자그로스 산맥 동부와 지발 지역을 중심으로 통치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행정 체계를 구축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다음으로 마르완 왕조(Marwanids, 983–1085)를 들 수 있습니다. 디야르바크르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이 왕조는 비잔틴 제국과 파티마 왕조 사이에서 능숙한 외교를 펼치며 정치적 균형을 유지했고, 동시에 지역 문화의 발전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세력이 샤다드 왕조(Shaddadids, 951–1199)입니다. 이 왕조는 아르메니아와 아란 지역에서 활동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캅카스 전선에서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들 쿠르드 왕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군사 구조에 있습니다. 당시 부이드 왕조를 비롯한 여러 세력이 튀르크계 노예 군인, 즉 길만Ghilman을 중심으로 군대를 운영했던 것과 달리, 이들 쿠르드 왕조는 자체적인 부족 기반의 기병대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보여 줍니다.
② 아이유브 왕조와 살라딘의 유산
쿠르드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가운데 하나로 흔히 언급되는 시기가 바로 살라딘Salah ad-Din이 세운 아이유브 왕조의 시대입니다.
하다바니 부족의 라와디야 분파 출신이었던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로 부상하여 십자군 세력을 격퇴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군사적 승리를 넘어, 이슬람 세계 전체에 큰 상징적 의미를 남긴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물론 아이유브 왕조가 현대적인 의미의 쿠르드 민족 국가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왕조의 핵심 지배 엘리트가 쿠르드 출신이었으며, 이 시기를 통해 쿠르드인들의 군사적 역량과 행정 능력이 이슬람 세계 전반에서 널리 인정받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12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셀주크 튀르크의 대규모 이주와 정복이 이어지면서 쿠르드 지역의 토착 왕조들은 점차 그 세력에 흡수되거나 합병되었습니다. 그 결과, 쿠르드 정치 세력의 독자적 기반은 서서히 약화되며 하나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3.
오스만-사파비 시대와 분단된 국경
16세기 이후 쿠르드 지역은 수니파 오스만 제국과 시아파 사파비 제국 사이에 놓인 중요한 완충 지대이자, 동시에 끊임없는 전장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두 제국의 경쟁 속에서 쿠르드 땅은 전략적 경계선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그 결과 지역 전체가 장기간에 걸쳐 군사적 긴장 속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1639년에 체결된 주합 조약Treaty of Zuhab을 통해 하나의 분수령을 맞습니다. 이 조약은 쿠르드 지역을 두 제국 사이에 분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그 경계선은 훗날 형성되는 튀르키예·이라크·이란 국경의 기본적인 원형이 되었습니다.
① 쿠르드 토후국Emirates의 자치권
오스만 제국은 초기 단계에서 쿠르드 지역을 통치할 때 비교적 유연한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즉, 쿠르드 부족장들의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그들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분권적 지배’ 전략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아르달란Ardalan, 바디난Badinan, 소란Soran, 바반Baban과 같은 여러 쿠르드 토후국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 토후국은 자체적인 궁정을 운영하고 화폐를 주조하는 등 사실상 준독립적인 정치 체제로 기능했습니다.
특히 1597년에 샤라프 칸 비틀리시가 저술한 『샤라프나마Sharafnama』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 저서는 쿠르드 토후국들의 역사와 계보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문헌으로, 쿠르드 민족의 정체성과 정치적 통치 역량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② 탄지마트와 자치권의 상실
19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이 추진한 탄지마트Tanzimat, 즉 중앙집권화 개혁은 쿠르드 사회에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오스만 정부는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제국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에 존재하던 쿠르드 토후국 체제를 폐지하고 이 지역을 제국의 직할령으로 편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곧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베디르 칸 베이가 주도한 대규모 반란이었습니다.
이러한 중앙집권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쿠르드 사회가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전통적 지배 구조를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러한 과정이 쿠르드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4.
현대 쿠르드 문제의 발단 — 세브르와 로잔의 배신
현대의 쿠르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직접적인 기원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의 해체와 영토 재편 과정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쿠르드족에게는 한때 ‘자신들의 국가가 세워질 수 있다’는 기대와 약속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국제정치는 이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결국 그 약속은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속에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쿠르드인들에게 이 시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약속된 국가가 좌절된 배신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① 세브르 조약(1920)의 희망
1920년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국제법적 차원에서 처음으로 쿠르드족의 자치와 독립 가능성을 명시한 문서로 평가됩니다.
특히 조약 제62조부터 제64조에 이르기까지의 조항에서는 쿠르드 지역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이후 1년 이내에 국제연맹의 동의를 거쳐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절차적 경로까지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브르 조약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족 자결권의 역사적·상징적 근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② 로잔 조약(1923) — '국가 없는 민족'의 탄생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튀르키예 민족 운동의 승리는 결국 세브르 조약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후 1923년 체결된 로잔 조약은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대신, 세브르 조약에 포함되어 있던 쿠르드족의 독립과 자치에 관한 모든 조항을 완전히 삭제했습니다.
결국 연합국은 석유 자원과 지역 안정이라는 현실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며 쿠르드족의 민족적 열망을 외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쿠르드 지역은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라는 네 개의 서로 다른 민족 국가에 의해 분할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쿠르드족의 분열은 단순한 물리적 경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주권'과 '민족적 자결권'이 충돌하는 철학적 딜레마를 낳았습니다.
5.
튀르키예의 쿠르드 정책 — 탄압에서 2025년의 대전환까지
로잔 조약 이후 성립된 튀르키예 공화국은 강력한 민족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국가 통합을 명분으로 쿠르드족의 독자적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정부는 쿠르드인을 ‘산악 튀르크인Mountain Turks’이라는 명칭으로 규정하며 별도의 민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쿠르드어 사용과 전통문화 역시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① PKK의 발흥과 무장 투쟁
이러한 억압적 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1978년 압둘라 오잘란은 쿠르드 노동자당(PKK)을 창설하게 됩니다.
초기 PKK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으며, 1984년부터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약 40여 년 동안 이어진 튀르키예군과의 충돌 속에서 4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튀르키예 정부는 PKK를 국가 안보에 대한 최대 위협이자 테러 조직으로 규정해 왔으며, 이러한 문제는 단순한 국내 갈등을 넘어 튀르키예의 대외 관계와 NATO를 비롯한 국제 정치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해 왔습니다.
② 2024-2025년의 역사적 화해 시도
2024년 말부터 튀르키예 정치권에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주목할 만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튀르키예 극우 민족주의 정당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지도자 데블레트 바흐첼리가, 수감 중인 압둘라 오잘란에게 의회에서 연설하고 PKK의 해산을 선언할 것을 제안한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라기보다,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지정학적 계산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필요입니다. 헌법 개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친 쿠르드 성향 정당(DEM)의 지지가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둘째, 지역 안보 환경의 변화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동시에 미국의 시리아 철수 가능성이 거론되는 상황 속에서 튀르키예로서는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 세력(YPG)과의 연결 고리를 차단할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25년 2월, 오잘란은 옥중 성명을 통해 PKK의 무장 해제와 조직 해산을 촉구하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PKK를 지탱해 왔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더 이상 시대적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이 발언은 40년에 걸친 분쟁의 종식을 향한 중대한 분수령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극우 민족주의 세력의 반발과 정치적 불확실성이 남아 있지만, 이러한 변화는 튀르키예가 그동안 내부 안보에 집중해 왔던 국가 역량을 경제와 외교 분야로 전환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
이란의 억압과 2026년 '에픽 퓨리' 작전
이란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중앙 정부로부터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차별과 탄압을 경험해 왔습니다.
특히 2022년 마흐사 아미니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여성, 생명, 자유’ 시위에서 쿠르드 지역이 중요한 진원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들은 이란 정권의 강도 높은 보복과 통제의 주요 대상이 되었습니다.
① 2025년 12일 전쟁 이후의 탄압
2025년 6월, 이란과 이스라엘-미국 연합군 사이에서 이른바 ‘12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란 정권은 소수 민족이 외부 세력과 결탁할 가능성을 우려하며 내부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2025년 한 해 동안 이란에서 처형된 사람 가운데 약 14%, 구금된 사람 가운데 약 47%가 쿠르드족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전체 인구 비중을 고려할 때 매우 높은 수치로 평가됩니다.
특히 국경 지역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쿠르드족 짐꾼, 즉 ‘콜바르Kolbar’들이 ‘이스라엘의 스파이’로 몰려 사살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이 극단적인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② 2026년 쿠르드 민병대의 대공세와 지정학적 격변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시설과 지도부를 겨냥한 대규모 공습 작전, 이른바 ‘에픽 퓨리Operation Epic Fury’를 개시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한 핵심 수뇌부가 사망하면서, 이란 내부에는 전례 없는 권력 공백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계기로 이란 내 쿠르드 무장 세력들은 서로 연합 전선을 구축하며, 중앙 정부를 상대로 한 공격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이란 쿠르디스탄 정치 세력 연합(CPFIK)이 형성되었습니다. 2026년 2월 22일, PDKI, PJAK, PAK, Komala 등 6개 정파가 연합하여 이란 정권 타도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이후 지상 작전도 빠르게 전개되었습니다. 3월 초부터 마리완과 코야 등 국경 인근 도시에서 경찰서와 보안 시설을 공격하며, 점차 실질적인 영토 장악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미국 역시 이 상황에 일정 부분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쿠르드 세력을 이란 내부에서 활동하는 ‘지상군Boots on the Ground’으로 활용하기 위해, CIA를 통해 무기 지원과 군사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7.
정치철학적 고찰 — 주권과 자결의 딜레마
쿠르드 문제는 현대 국제법의 핵심 원리인 ‘국가 주권Sovereignty’과 ‘민족 자결권Self-determination’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17년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KRG)에서 실시된 독립 주민투표에서는 약 93%라는 압도적인 찬성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결국 ‘영토적 통합성territorial integrity’이라는 기존 주권 국가들의 원칙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민족 자결이라는 이상보다 국가 체제의 안정과 기존 국경 질서를 유지하려는 국제 정치의 현실 논리가 더 강하게 작동한 사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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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인들은 현재 자신이 거주하는 국가의 법적 국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과 일치하는 ‘쿠르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쿠르드인들은 스스로의 처지를 ‘심리적 무국적 상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증언 가운데에는 “직업은 있지만 집은 없는 상태와 같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그들이 느끼는 정체성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로잔 조약 이후, 쿠르드족은 다른 많은 민족들이 경험했던 탈식민지화의 흐름에서 배제된 채, 자신들이 속한 여러 주권 국가들에 의해 다시 지배를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쿠르드인들은 흔히 ‘이중의 소외’, 다시 말해 민족적 자율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또 다른 형태의 정치적 종속을 경험해 왔다고 이야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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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란에서 전개되고 있는 쿠르드 민병대의 투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오랫동안 고착되어 온 중동의 국경 질서 자체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도전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쿠르드족은 과거 여러 차례 강대국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무장 세력으로 활용되었다가, 이해관계가 바뀌는 순간 다시 버려지는 패턴을 반복적으로 경험해 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026년의 이른바 ‘쿠르드의 순간’이 단순한 봉기의 국면을 넘어 실질적인 국가 건설의 계기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군사적 성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공존의 정치 모델, 예컨대 오잘란이 제시했던 민주적 연방주의 구상과 같은 정치적 비전을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 함께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8.
정리하자면...
쿠르드족의 역사는 흔히 그들이 말하는 “산 이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여명기에서 시작된 그들의 역사적 뿌리는 한때 제국의 형성과 번영의 시기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근대 이후 민족 국가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운명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변화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 튀르키예에서 나타나고 있는 화해의 움직임, 그리고 2026년 이란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규모 봉기는 쿠르드족이 더 이상 역사의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지역 질서를 능동적으로 재편하려는 정치적 행위자로 등장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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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죠.
오늘자(200305) 유튜브 채널 '장윤선의 취재 편의점'에서 유승달 교수의 진단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번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사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표면적 명분을 넘어, 그 핵심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공격의 가장 본질적인 목표가 국제 에너지 질서와 달러 중심 통화 체제, 즉 이른바 ‘페트로 달러 체제’를 방어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유교수가 평가한 지난 수십 년 동안 국제 정치의 여러 사례를 보면, 달러 중심의 에너지 결제 구조에 도전하려는 시도가 나타날 때마다 강력한 지정학적 충돌이 뒤따르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진단입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의 경우, 2001년 사담 후세인 정권이 석유 결제 대금을 달러가 아닌 유로화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2003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결국 후세인 체제는 붕괴하게 됩니다.
리비아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나타납니다. 2009년 무아마르 가다피는 금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통화 체계를 구상하며 달러 중심 구조에 도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2011년 NATO의 군사 개입 이후 정권은 붕괴되고, 가다피 역시 사망하게 됩니다.
또한 베네수엘라는 2011년 이후 석유 거래에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장기간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으며, 마두로 대통령이 피랍되고 미국의 압박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란 역시 2006년 자체 석유 거래소를 설립하고 달러 외 결제 체계를 모색하면서 미국과의 긴장이 심화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경제 제재와 군사적 압박 속에서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하에서 미-이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이러한 흐름을 종합해 보면,
미국의 전략은 단순히 특정 국가를 견제하는 수준을 넘어
에너지 거래와 통화 질서를 둘러싼 글로벌 구조를 유지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란을 강하게 압박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친미 아랍 국가들이 중국 중심의 위안화 경제권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고,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전략적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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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과연 쿠르드족이 오랫동안 품어 온 열망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들의 열망이 현실 정치의 성과로 이어지기까지는 여전히 넘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부족주의적 분열, 그리고 외부 강대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라는 오래된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과거와 동일한 역사적 패턴이 다시 반복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일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긴 역사적 경험과 현대 국제 정치의 전략적 선택이 교차하는 이 시점에서, 쿠르드족은 오랫동안 의지해 왔던 산맥의 그늘을 넘어 자신들만의 정치적 ‘집’을 세울 수 있는 문턱에 서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강대국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었다가 다시 버려지는 존재, 이른바 ‘쓰고 버려지는 족속’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쿠르드족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전략적인 정치적 접근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