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뱃머리처럼, 앞서 부딪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by KEN

'이 시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생각



1.

현실인식과 질문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 개신교가 단기간에 세계 선교 역사에서 주목받을 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민족이 절박한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교회가 그 자리에 서서, 비교적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응답해 왔기 때문일 겁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나라의 근대적 전환이 요구되던 시기였습니다. 교회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새로운 문명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다니엘서와 출애굽기의 메시지를 통해 억압 속에서도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는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는 단순한 예배 음악을 넘어, 한국인의 정서를 형성하는 중요한 문화적 토대가 되어주었습니다.


해방 이후와 산업화 시기에는 또 다른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전쟁의 상처로 무너진 삶을 보듬어야 했고, 급속한 도시화 속에서 뿌리 뽑힌 이들에게 공동체를 제공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도시 노동자들의 ‘고향’이 되었고, 쉼과 위로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독재 정권 시기에는 더욱 어려운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일부 교회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민주화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단지 종교 집단이 아니라, 사회적 양심으로서의 공신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 교회의 부흥은 단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시대적 질문에 어떻게 응답했는가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고통과 갈망 앞에서 교회가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그 대답이 곧 성장의 동력이었습니다.



2.

교회의 침체 — 본질로부터의 이탈, 그리스도인들은?


민주화 이후의 상황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국면이었습니다. 정치적 억압이라는 분명한 외적 과제가 사라진 자리에서, 교회는 새로운 시대적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방향을 잃기 시작했다고 진단하는 의견을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이른바 ‘악마의 맷돌’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가치를 효율과 이익의 언어로 환산하는 구조 속에서, 교회는 이에 대해 충분히 창조적이고 신학적인 응답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의견입니다. 시장의 논리가 삶의 기준이 되는 동안, 교회 역시 그 흐름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보다는 때로는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둘째, 권력과의 결탁 문제입니다. 일부 대형 교회는 자본력과 조직 동원력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를 과잉 대표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영향력의 확대가 아니라, 오히려 시민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사회 속의 한 공동체라기보다, 자기 내부로 수축된 ‘개토화’된 집단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셋째, 지난 COVID-19 팬데믹은 이 흐름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배에 대한 충성도는 눈에 띄게 약화되었고, 신자 수의 급감이라는 구조적 위기가 드러났다는 진단입니다. 이는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있던 변화가 외부 충격을 통해 가시화된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는 설명입니다.



3.

궁극적 물음 — 그래서 우리는?


결국 지금 우리가 마주한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린 몰락이라기보다, 시대적 전환의 문턱에서 충분한 방향을 세우지 못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더 이상 ‘교회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머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그리스도인인 나는, 우리는 그때 어떤 태도로 응했는가.


— 일부 리더들의 일탈적 행태가 드러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 신앙인으로서 책임 있는 목소리를 냈는가, 아니면 침묵 속에서 방관자로 남아 있었는가.

— 교회의 방향이 왜곡될 때,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질문을 던졌는가.


더 근본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 교회가 새로운 시대의 질문 앞에 서 있는데, 왜 우리는 그 질문 자체를 진지하게 제기하지 않는가.

— 교회는 어떤 언어로 이 시대와 대화해야 하는가.

— 어떤 실천으로 복음의 진정성을 드러낼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4.

리더에게 요구해야 할 것들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빗대어 말하자면 설교단은 배의 뱃머리와 같습니다. 배가 파도를 가를 때 가장 먼저 바람을 맞는 자리입니다.


설교자는 그 자리에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시대의 폭풍을 가장 먼저 마주해야 하고, 동시에 공동체를 향해 희망의 항로를 제시해야 하는 최전선의 지휘자 역할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엄중합니다. 그 엄중함에 걸맞는 진중함을 요구해야 합니다.


"무엇이 이보다 더 의미로 가득 찰 수 있겠는가? 설교단이야말로 이 세상의 맨 선두 부분이며,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모두 그 뒤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설교단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 하느님의 격한 노여움의 폭풍은 그곳에서 맨 먼저 발견되고, 뱃머리는 맨 먼저 하느님의 공격을 견뎌내야 한다. 순풍이나 역풍을 관장하는 신에게 순풍을 보내달라고 맨 먼저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이 세상은 항해에 나선 배다.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설교단은 바로 그 배의 뱃머리인 것이다."
_ 허먼 멜빌의 '⟪모비딕⟫ 제8장 설교단' 중에서


신자유주의에 물든 금권주의와 권력에의 결탁, 관성적 매너리즘으로 인해 스스로 고립되어 개토화 되어가고 있는 교회 현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굳건히 살아가기 위한 결기는 무엇일까요.


어느 원로 목회자의 전언처럼, 교회는 세상을 향한 '최전선'이자 '배의 뱃머리'에 서 있는 존재로서, 세상의 주류 담론에 저항하는 대항 담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성경 텍스트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일상에서의 적용으로, "누가 그렇게 해석(설교)하더라"의 얘기가 아니라 자기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지식과 지혜와 용기로, 설교를 이용하는 어긋난 리더들에게 수사학적 기교가 아닌, 진리를 권위로 삼는 신앙인의 삶(에토스)과 본질을 요구해야 합니다.



5.

요구 — 자세, 그 마음가짐


모범적인 종은 두 가지 특성을 지녀야 한다며, 앞서 언급한 강연자는 앨런 데이비스의 ‘하나님의 진심’을 인용합니다.


첫째, 교회 리더는 손 그늘 아래의 날카로운 칼과 화살과 같아야 한다고 했습니다(사 49:2). 거짓 가르침에 맞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용기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과 화살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 그늘 아래, 화살통 안에 숨겨진 채 준비되는 것이죠. 날카로움은 과시가 아니라 준비의 결과인 겁니다.


둘째, 리더는 숨겨진 자리에서 단련해야 합니다(딤전 4:7-8). 모범적인 종은 세속적인 가십이나 무익한 논쟁을 피하고, 영적 성숙을 위한 치열한 자기 훈련에 매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딤전 4:15). 공적인 사역은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그 준비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외진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형성된 영성이야말로, 위기의 시점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위기의 순간에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리더십에게 이런 태도와 자세를 요구해야만 합니다.




6.

요구 — 본질을 붙잡는 용기


위기의 시대에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용기라는 얘깁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본질은 붙들겠다”는 끈질긴 용기 말입니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설교자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갈 1:10)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단의 엄중함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박수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본질을 지키는 자리.

환호보다 진리를 선택하는 자리, 그 자리를 회복하라고 요구해야 됩니다.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고, 바른 길에 대한 의무 이행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 자세일 것입니다.



7.

요구 — 내용 (대항 담론)


설교는 단순한 교훈 전달만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주류 담론에 맞서는 대항 담론이어야 할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성공, 돈, 지배의 언어로 움직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강하게 지배하는 것이 삶의 목표처럼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설교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이 제시하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성경에서의 창조 이야기를 보시죠(창세기 1장).

거기에는 여타 다른 고대근동의 신화—에누마 엘리쉬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서와 같은 신들의 폭력적 투쟁이 아닙니다. 매우 독특하게 그리스도 신학은 '사랑과 기쁨'이 창조의 근본 원리로 제시됩니다. 세상은 경쟁의 산물이 아니라, '선하다고 선언된 세계'인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의 비전은 또 어떻습니까(이사야서 11장).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세상,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노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상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세계의 방향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존 질서를 강화하는 체제가 아니라, 때로는 그것을 해체하는 사건입니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 이 선언이 설교의 핵심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우리 신앙인들은, 교회의 리더십에게 기존 세계관에 대항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부합하는 담론을 선포하도록 요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8.

요구 — 방향


우리가 교회 공동체의 리더, 특히 설교자들에게는 요구하는 설교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첫째, 개념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합니다. 신학적 개념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탈락시키기 쉽습니다. 설교자는 그 틀 밖으로 밀려난 특수한 삶의 고통과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다시 복원해내야 합니다. 개념이 덮어버린 현실의 얼굴을 다시 드러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설교는 익숙한 말씀을 낯설게 제시함으로써, 교인들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익숙함을 흔들 때 비로소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익숙한 설교 패턴에 길들여져 왔습니다. 기승전-헌금, 기승전-전도라는 공식은 말씀을 살아 움직이는 사건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결론으로 만들어버리는 진부 함입니다. 익숙한 말씀을 낯설게 제시함으로써 우리 성도들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도와야 한다고 요구해야 합니다.


셋째, 현실을 반영한 일상의 언어로 가르치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씨 뿌리는 농부, 잃어버린 양,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모두 일상의 이야기였습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요. 거룩함을 신비한 언어로 감싸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이웃 사랑, 약자를 보호하는 삶이라는 구체적 언어로 번역해서 전달하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는 단지 ‘모이는 교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보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가 되도록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직장에서, 어떤 이는 사업 현장에서, 또 어떤 이는 가정과 학교에서, 혹은 사회의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그 자리 각각 또한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또 다른 사역의 현장인 것입니다. 각 영역은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또 다른 형태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성도들이 그 자리에서 신앙인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준비시키고 격려하는 말씀 선포를 요구해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통용되는 언어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말씀, 각자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설교와 가르침을 말입니다.


설교는 결국 하늘의 이야기를 땅의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가 시대의 주류 담론과 긴장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설교는 대항 담론이 될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걸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9.

요구 — 권위(오직 진리로만)


설교의 권위는 단순히 직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용과 태도, 그리고 삶 전체에서 형성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수사학의 세 요소를 설교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첫째, 로고스(Logos)입니다. 설교가 전달하고자 하는 논리적 내용, 그리고 성경적 근거입니다. 말씀이 텍스트에 깊이 뿌리내려 있지 않다면, 아무리 감동적인 언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설교는 철저히 말씀에 의해 검증되어야만 합니다.


둘째, 파토스(Pathos)입니다.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과 전달 방식입니다. 진리가 차갑게 전달될 때는 그 생명력을 잃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심장에 닿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단지 설명이 아니라, 마음을 깨우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토스(Ethos)입니다. 말하는 자(메신저)의 삶과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설교자의 권위는 직함이 아니라 삶에서 나옵니다. 진리를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권위로 삼고 그 앞에 먼저 서는 사람. 청중은 결국 설교자의 언어보다 먼저 그의 삶을 듣습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리더들에게 이런 자세와 태도를 요구해야 합니다.

— 삶으로 보이는 인격을 요구해야 하고,

— 진리로만 권위를 내세우는 태도를 요구해야 합니다.

— 비 신학적 태도인 '제사장적 권위'를 내세우는, 즉 직분을 내세우는 태도는 퇴출시켜야 할 것입니다.



10.

마무리하며...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인간의 조건』 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말합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시작’의 가능성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곧 인간사의 영역을 그것이 지닌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파멸로부터 구원하는 기적은, 궁극적으로 탄생성(natality)이라는 사실 그 자체이다.” _ 『인간의 조건』 제5장 '행위(Action)'의 마지막 부분
"시작이 존재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이전에 아무도 없었던 존재인 인간이 창조되었다."(Initium ut esset, creatus est homo, ante quem nemo fuit.) _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론』(12권 21장),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탄생성 철학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제시한 문구


그렇다면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아무리 현실이 비관적으로 보일지라도,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희망이다”라고 말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를 포함한 공동체의 리더(메신저)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잃지 않고, 본질 위에 설 때—그의 말과 해석(메시지)은 비로소 권위를 갖게 될 것입니다. 권위는 강압이나 주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충실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리더들에게 그런 관점에서 질문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 그들은 과연 본질 위에 서 있는가.

—그가 맡겨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을 선포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어찌 보면,

리더의 궤도 이탈은 일정 부분 성도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그 동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1. ⟨하나님의 진심⟩, 엘런 데이비스, 양혜원 역, 2017, 복있는 사람

2. ⟨수사학/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2017, 도서출판 숲

3.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2019, 한길사

4. 김기석 목사 강연, 2025.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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