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묵상하며.

소돔성의 손님과 그들을 대하는 롯과 소돔인들의 태도와 행동을 보며...

by KEN

개인적인 글(묵상 글 등)은 가급적 네이버 블로그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의 묵상 내용을 기록하는 중에, 오늘의 내용은 브런치를 통해 공유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아래는 네이버에 올려진 오늘자 묵상 글 중의 일부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의 그 소돔성에서의 에피소드입니다.

소돔을 심판하기 위해 내려온 두 천사를 향해, 성 안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그들을 내놓으라”고 외치며, “우리가 그들을 알아야 하겠다”고 폭거를 행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지난겨울과 올봄에 우리가 겪었던 12·3 그들의 실패한 친위쿠데타와 그 전후 광화문과 여의도, 그리고 서부지법 일대에서 벌어졌던 여러 폭력적 장면들이 겹쳐 떠오르게합니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집단적 광기와 비이성적 폭력이 만들어내는 풍경에는 묘한 기시감이 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장면들 속에서 드러나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단편입니다.



소돔성에 찾아온 "사람들"과 그들을 대하는 롯과 소돔인들의 태도와 행동에 대하여...



장면. 1

(창세기 19:1-11)


그러나 이 평온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돔에 머물던 유일한 외국인이자 의로운 인물인 롯은, 앞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찾아온 천사들을 친절하게 맞이합니다. 그의 접대는 아브라함의 경우보다 간결하게 묘사되지만—“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하룻밤 머물기를 간청하는 장면에서 보듯—그 역시 삼촌에 못지않은 훌륭한 집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처음부터 그의 집에 들어가기를 주저했고, 소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 낯선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불길한 징조를 드러냅니다.


곧이어 그 불길함은 현실이 됩니다. “소돔 백성들”, 곧 온 도시의 군중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그의 손님들을 “알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표현은 본래 중립적인 말이지만, 문맥은 그것이 성적 폭력을 뜻함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19:8 참조).

[창19:8, 우리말성경] "보시오. 내게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소. 내가 두 딸들을 내보낼 테니 그 애들에게 여러분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온 사람들이니 이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도 하지 마시오."


이 맥락에서 롯이 딸들을 내어주겠다고 제안한 장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이 제안은 그가 손님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얼마나 절박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딸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다만 이를 현대적 기준으로 곧바로 성차별의 전형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주류 의견입니다. 성서의 저술 당시, 저자와 초기 독자들은 이 제안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롯의 제안은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필사적 노력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군중을 진정시킬 다른 어떤 수단도 떠올릴 수 없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결국 이 위기를 해결한 것은 롯의 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초자연적인 정체를 숨기고 있던 “사람들”, 곧 천사들의 개입이었습니다.



장면 2.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러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우선 관심을 두고자 하는 부분은 소돔성 주민들의 야만적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생각없음'에 기인한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이 없으니 "왜 그래야 하느냐"고 질문하지 않고, 질문이 없으니 결국 내 생각이 아니라 삶이 "남의 생각으로 사는 것"이 되어버린 전형적인 사건이 아닐까 싶은 겁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글을 썼습니다. 사탄(스크루테이프)은 조카(웜우드, 신참 악마)에게 논증 대신 책을 읽지 못하게 하고, 특히 삶의 소소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충고하는 편지를 씁니다. 여기서 환자는 각각의 악마들이 맡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들이 말하는 '원수'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감안하고 보시면 됩니다.

"네가 요즘 맡은 환자의 책 읽기를 지도하는 한편, 유물론자 친구와 자주 만나도록 신경 쓰고 있다는 이야기 잘 들었다. 하지만 좀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냐? 네 말을 듣자니, 넌 논증으로 환자를 원수의 손아귀에서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구나." (중략)

"아무튼 논증이라는 행위는 잠자고 있는 환자의 이성을 흔들어 깨우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야. 일단 이성이 깨어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때그때 드는 생각들이야 어떻게든 그 흐름을 비틀어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끌어올 수 있지만, 네 환자는 그런 사고의 과정을 통해 찰나적인 감각적 경험의 흐름에서 눈을 돌려 보편적인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치명적인 버릇을 들이게 될 게다. 그러니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시선을 감각적 경험의 흐름에 붙들어 두어야 해. 그것이야말로 '실제의 삶'이라고 믿도록 가르치되, '실제'가 무슨 뜻인지는 절대 묻지 못하게 하거라." (중략)

"너의 임무는 환자의 곁을 지키며 그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_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첫 번째 편지 내용 중에서 (책 15-20쪽)


더욱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이것입니다.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사탄)이 조카(악마)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오늘날 교회가 신자들을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역설적으로 사탄의 '가장 가까운 동맹자'가 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편지글 중의 일부를 보시죠.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다. 오해는 말도록. 내가 말하는 교회는 우리가 보는 바 영원에 뿌리를 박고 모든 시공간에 걸쳐 뻗어나가는 교회, 기치를 높이 올린 군대처럼 두려운 그런 교회가 아니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런 광경은 우리의 가장 대담한 유혹자들까지도 동요하게 만들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인간들은 그 광경을 전혀 보지 못한다.

네 환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신축부지에 반쯤 짓다 만 듯 서 있는 싸구려 고딕 건물뿐이야. 그나마 안으로 들어가면, 동네 가게 주인이 아첨하는 표정으로 뜻도 모를 기도문이 적힌 반들반들한 소책자 한 권, 엉터리로 변조된 저질 종교시가 깨알처럼 박혀 있는 낡아빠진 소책자 한 권을 내밀며 떠들어대는 모습과 마주치기 십상이고, 또 자리를 찾아 앉은 뒤 주위를 둘러보면 이제껏 되도록 얼굴 마주치지 않고 살려고 애써 왔던 이웃들만 어쩌면 그렇게 골라서 앉아 있는지. 넌 그런 이웃들을 잘 이용해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몸' 따위의 표현들과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실제 얼굴 사이에서 환자를 오락가락 헷갈리게 만들라구." (중략)

"단지 환자의 머릿속에 이런 질문만 떠오르지 못하게 하면 돼. '나 같은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옆에 앉은 저들의 다른 결점만 보고 그들의 종교가 위선이자 인습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머리가 아무리 떨어지기로서니, 그렇게 당연한 의문이 떠오르는 걸 막는다는 게 도대체 가능한 일이냐고 묻고 싶겠지. 하지만 웜우드,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우리가 적당히 주물러 주기만 하면 그런 생각은 간단히 막을 수 있지. 원수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진짜 겸손을 배웠을 리 없거든. 무릎을 꿇고 앉아 죄를 고백한다 한들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해. 사실 마음 밑바닥에서는 이렇게 회심까지 해 두었으 니 이만하면 원수의 장부에 상당량 초과 액수를 달아 놓은 셈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데다가, 이렇게 교회에 나와 별 볼일 없으면서도 '잘난 척하는' 이웃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겸손이요 선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구. 그러니 이런 심리상태를 되도록 오래오래 유지하도록 신경 잘 쓰거라."

_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두 번째 편지 내용 중에서 (책 15-20쪽)


이 글을 C.S. 루이스가 썼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죠. <순전한 기독교>를 저술한 20세기 최고의 변증론자로 알려진 그가 사탄의 사역에 '최대의 협력자 중의 하나가 교회'라고 에둘러 비판하고 있음을 감안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 협력의 형태가 무엇인지는 다른 편지와 저술, 그리고 이후 많은 후학들의 해석에 의해 밝혀진 바입니다.


그중의 한 사람인 미국 칼빈신학교 철학신학 교수인 강영안은 그의 저서 <생각한다는 것>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따지지 마세요."

"무조건 믿으세요."

"아멘' 하세요."

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각하지 않기를 강요하는 상황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런 '묻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태도는 C.S. 루이스의 말을 빌려 사탄의 전략과 유사하며, 신앙을 맹목적으로 만들고 이단에 취약하게 하는 위험을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장면. 3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시죠.

소돔성의 주민들 또한, 결국은 '생각없음'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다시 스크루테이프(사탄)의 입을 통해, 소돔성의 그들을 포함하여 그렇게 휘둘리는 교인들을 향해 일갈하는 목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들 중에 원수 진영의 위대한 용사가 하나쯤 끼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저 아래 계신 우리 아버지 덕분에 네 환자는 바보 천치가 되어 있거든."

_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세 번째 편지 내용 중에서 (책 22쪽)


여기서 '환자 = 사람(신앙인)'이라는 점을 다시 환기시켜드립니다.


시류에 휩쓸려 잘못된 가르침을 비판 없이 따르다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루뭉술한 말로 포장된, 이른바 ‘고도로 영적인 기도’만을 반복하며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는 모습은, C. S. 루이스가 경고했던 바람직하지 못한 신앙인의 전형일 수 있습니다.

"2.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것까지 막을 수 없다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적어도 그 기도가 해악을 끼치지 못하도록 막을 방법은 있지. 고도로 '영적'인 기도만 줄창 읊어대게 하거라. 어머니의 류머티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그 영혼의 상태만 가지고 노심초사하게 만들라구. 여기에는 두 가지 이득이 있다."

_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세 번째 편지 내용 중에서 (책 27쪽)


신앙은 현실을 도피하는 언어가 아니라, 세상과 개인이 마주한 구체적인 문제를 붙잡고 깊이 숙고하며, 책임 있게 해결하려는 태도 속에서 뿌리내려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질문하고 씨름하지 않는 신앙은 쉽게 왜곡되고, 결국 소돔 사람들이 보여 준 오류를 되풀이할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며 질문하는 신앙생활을 선택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질문하게 되고, 질문은 이해를 더 깊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성숙한 신앙이 자랄 것일테고 말입니다.


오늘도 평안을 기원합니다.


[참고 자료]

1. 매일성경, 2026년 0102월, 성서유니온

2. IVP 성경연구주석 구약, 오경・역사서・시가서, 고든 웬함 등, 강상열 역

3.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C.S. 루이스, 2018, 홍성사

4. 생각한다는 것, 강영안, 2024, 두란노


[출처]

1. 매일묵상 블로그 글: 260126_ 죄악의 도시에서 (창 1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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