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도서선정단 3-4차 대상 도서 독서 후기 및 평가
— 고립·은둔 청년에 대한 지난 10년간의 기록
우리 사회는 짧은 시간 안에 압축 성장을 이루며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도약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성과 중심의 능력주의와 극단적인 경쟁 구도가 굳어지는 부작용이 함께 누적되어 왔습니다. 바로 이 구조적 환경 속에서, 최근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현상이 ‘고립·은둔 청년’일 것입니다.
김혜원은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저자는 지난 25년간 청소년과 청년 상담 현장을 지켜온 전문가로서, 특히 최근 10여 년 동안 고립·은둔 청년과 그 가족들이 겪어온 고통의 심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문제의 진단에 그치지 않고, 회복을 위한 사회적·심리학적 대안을 함께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닙니다.
고립·은둔 청년의 개념적 정의
이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히 혼용되는 고립, 은둔, 그리고 니트라는 개념들 사이의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오랜 상담과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이 세 개념을 구별하며, 특히 사회적 관계의 단절 정도와 물리적 공간의 폐쇄성에 주목합니다.
먼저 고립(Isolation)은 타인과의 의미 있는 교류가 거의 없고,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지지 체계가 부재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경우 물리적인 외출은 가능할 수 있지만, 정서적·관계적 단절은 이미 깊이 진행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 속에 ‘나와 있지만’, 관계 안에는 들어가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에 비해 은둔(Withdrawal)은 훨씬 더 급진적인 형태입니다. 특정 공간, 대개는 방 안에 머물며 6개월 이상 일상적인 외출 자체를 하지 않는 상태로, 물리적 공간과 정서적 공간 모두에서 전면적인 폐쇄가 일어납니다. 은둔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세상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삶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한편 니트(NEET)는 취업, 교육, 훈련 중 어느 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통계적·경제적 범주입니다. 니트는 고립이나 은둔과 반드시 겹치지는 않으며,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외출을 하더라도 니트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사회적 단절이 아니라 경제 활동의 부재에 있습니다.
저자는 고립이 은둔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미해 보일 수는 있지만, 두 상태 모두 사회적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고통의 결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은둔형 외톨이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물리적인 문을 닫고 심리적 안전을 확보하려 하지만, 그 선택은 역설적으로 더 깊은 자기혐오와 고통을 내부에서 마주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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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본 실태
최근의 조사 결과들은 이 문제가 더 이상 소수의 예외적 사례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국무조정실의 「2024 청년의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고립·은둔 청년의 비율은 5.2%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2022년의 2.4%와 비교할 때, 불과 2년 만에 두 배 이상 급증한 수치입니다. 더 나아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추산에 따르면,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인 청년은 약 54만 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13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이 14만 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통계가 던지는 가장 심각한 경고는 바로 ‘고립의 연소화’와 ‘장기화’입니다. 은둔 상태에 있는 성인 청년 가운데 약 25%가 이미 청소년기부터 고립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는 사실은, 청소년기의 심리적 위기가 적절히 다뤄지지 않을 경우 그것이 성인기의 장기 은둔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장기화된 은둔은 흔히 말하듯 “입구는 넓지만 출구는 매우 좁은 구조”를 지닙니다. 고립의 문턱을 넘는 것은 비교적 빠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로 돌아오기 위해 감당해야 할 심리적·사회적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집니다.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굳어지고, 실패에 대한 공포는 축적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감각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고립·은둔을 유발하는 사회적 메커니즘 — 세 가지 시옷(ㅅ)의 상실
김혜원 교수는 사회학적 통찰을 통해 한국 사회가 청년들을 고립으로 내모는 근본적인 원인을 '능력주의'와 '사회적 시계'의 압박에서 찾습니다. 특히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이 빼앗겨버린 세 가지 핵심 가치를 '시옷(ㅅ)'으로 시작하는 단어들로 집약하여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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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시옷(ㅅ)
먼저 시도(Trial)입니다. 모든 행위가 취업이나 성공이라는 목표에 기여해야만 의미를 인정받는 사회에서,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순수한 시도는 쉽게 ‘시간 낭비’로 취급됩니다. 청년들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다양한 경험의 기회에서 배제되고, 그 결과 스스로를 탐색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점점 닫혀 갑니다.
다음은 실수(Mistake)입니다. 완벽함을 요구하는 초경쟁 사회에서 실수는 학습의 과정이 아니라 곧바로 무능함의 증거로 낙인찍힙니다. 실수를 통해 배우고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여유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강박적 불안입니다.
그리고 실패(Failure)입니다. 한국 사회는 이른바 ‘패자 부활전’이 극히 드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실패가 인생 전체의 낙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는, 청년들로 하여금 차라리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선택—곧 은둔을 택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시도·실수·실패, 이 세 가지 ‘시옷’이 허용되지 않는 환경에서 청년들은 점점 극도의 거절 민감성을 갖게 됩니다. 타인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관계에서 완전히 배제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가장 안전한 선택으로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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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시계와 당위적 잣대 — 그 폭력성
한국 사회는 연령대마다 완수해야 할 과업을 비교적 명확하게 설정해 두고, 이를 이른바. ‘사회적 시계’로 관리해 왔습니다. 대학 진학,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이 째깍거림은, 그 속도에 조금이라도 맞추지 못하는 이들에게 곧바로 가혹한 낙인으로 되돌아옵니다.
저자는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요즘은 어떻게 지내?”라는 일상적인 질문조차, 실은 그 사람이 사회적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검열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안부를 묻는 말이 어느 순간 성취를 확인하는 질문으로 바뀌는 사회, 그 안에서 보편적 궤도를 이탈한 청년들은 자신을 마치. ‘부적절한 행성’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감각은 단순한 좌절을 넘어 깊은 수치심으로 이어지고, 그 수치심은 다시 청년들을 방 안으로, 관계와 세계로부터 더 멀어지는 방향으로 밀어 넣습니다. 은둔은 그래서 개인의 선택이기보다, 사회적 시계에서 탈락했다는 감각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지금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과연 이 시계가 누구를 위해, 어떤 속도로 째깍거리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웅크린 마음 — 심리적 내면과 방어 기제
방 안으로 숨어든 청년들의 심리 상태는 단순히 '게으름'이나 '회피'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층위를 지닌다고 합니다. 저자는 상담 현장에서 만난 청년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겪는 실존적 고통과 자기 보호의 메커니즘을 분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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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움에 대한 불신과 사회적 페르소나의 붕괴
은둔 청년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나다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과 취향, 생각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거나 가치 없다고 느끼며,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꾸며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갑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부족하고, 포장된 나만이 받아들여진다는 감각이 일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 낸 페르소나는 무한히 유지될 수 없습니다. 감정과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 더 이상 연기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이들은 관계를 끊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선택을 합니다. 방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실패의 선언이 아니라, 더는 자신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선택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통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납니다. 청년들이 은둔을 선택한 이유는 사회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나답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은둔은 무기력이 아니라, 진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피난처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고립과 은둔을 향한 판단의 언어를 내려놓고 회복의 언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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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와 은둔 — 결국 '다른 방식의 소통'인 것
우리가 흔히 ‘잠수’라고 부르는 갑작스러운 연락의 단절은, 겉으로 보기에 무책임한 행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이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절박한 SOS 신호에 가깝다는 겁니다.
은둔은 세상을 향한 거부가 아니라, 외부의 과잉된 요구와 자극으로부터 상처 입은 자아를 지키기 위한 심리적 방패인 것이죠. 방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도망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 방 안의 시간은 결코 무의미한 공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어진 마음을 하나씩 추슬러 가며, 다시 살아갈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필사적으로 탐색하는 치열한 투쟁의 시간인 겁니다. 이 시간을 단순한 나태나 회피로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보내는 가장 분명한 신호를 끝내 읽어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가족 역동과 '공동 고립'의 비극
고립·은둔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족 전체의 삶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답니다. 저자는 특히 한국의 유교적 가족주의 전통이 고립 청년의 가족들에게 가하는 특유의 압박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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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수치심과 사회적 관계의 전염적 단절
자녀의 은둔은 부모에게도 깊고 무거운 상처를 남깁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의 성취를 곧 자신의 성공으로 동일시해 온 만큼, 자녀가 방 안으로 물러난 순간 극심한 자책과 수치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이의 근황을 더 이상 주변에 말할 수 없게 되면서, 부모들 역시 점차 사회적 관계를 끊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이른바 ‘공동 고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마음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빨리 바뀌길 바라는 조바심,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결국에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한데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 감정들이 제대로 말로 풀리지 못할 때, 가정 안에서는 대화가 줄어들고 침묵이 늘어나며, 작은 긴장들이 갈등으로 증폭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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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 방식에 대한 환원론적 비판의 함정
많은 이들은 은둔형 외톨이의 원인을 부모의 잘못된 양육이나 과보호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접근이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가정 내 요인이 일정 부분 작용할 수는 있겠지만, 핵심은 개인이나 가족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 구조, 그리고 능력주의라는 거대한 압력 속에서 청년들이 눌려 왔다는 데 있습니다.
부모를 가해자로 낙인찍는 방식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부모에게 또 하나의 죄책감을 덧씌워, 자녀를 지지하고 기다릴 수 있는 심리적 힘마저 빼앗아 버리는 결과를 낳는 것이죠.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리는 순간, 사회는 스스로를 면책하고 구조를 바꿀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겁니다.
회복을 위한 6가지 가족 가이드라인
저자는 가족들이 자녀의 닫힌 문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추상적인 위로나 당위가 아니라 상담심리학적 원리에 기반한 매우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합니다. 이 조언들은 자녀를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다시 연결되어야 할 존재로 대하는 태도 전환에서 출발합니다.
첫째,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기입니다. 자녀를 고쳐야 할 문제로 규정하기보다, 이미 깊은 상처를 입은 존재로 다시 인식하라는 요청입니다. 관점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말도 닿지 않습니다.
둘째, 부모의 바람과 조바심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부모의 사회적 체면이나 불안을 앞세우기보다, 지금 이 순간 자녀가 어떤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셋째, 함께 바위를 굴리듯 돌아보기입니다. 과거의 양육을 후회하거나 책임을 따지는 데 머무르기보다, 지금 이 관계에서 다시 연결될 수 있는 작은 고리를 찾는 데 집중하라는 조언입니다.
넷째,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고통을 읽어주는 대화법이 제시됩니다. 비난이나 훈계 대신, 자녀가 겪고 있는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대화가 관계 회복의 결정적 열쇠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대화의 고수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침묵을 견디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실(Fact)을 캐묻기보다, 그 이면의 감정(Feeling)을 묻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다섯째, 불안의 핵심을 부모 자신에게서 들여다보기입니다. 자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종종 부모 자신의 불안에서 비롯되며, 이를 자각하고 먼저 다스리지 않으면 어떤 개입도 오히려 부담이 된다는 점을 짚습니다.
여섯째, 실패해도 문을 열어두는 태도입니다. 결과와 무관하게 자녀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안전망을 구축할 때에만, 자녀는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특히 저자는 이 가운데 ‘고통을 읽어주는 대화법’이 은둔 청년과의 관계 회복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숨 먼저 쉬고,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말처럼, 자녀보다 앞서 부모 자신의 심리적 안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역시 저자는 반복해서 상기시킵니다.
결론 — 웅크린 마음을 위한 사회적 환대의 공간
이 책 『웅크린 마음이 방 안에 있다』는 고립된 청년들의 방 안으로 건네는 따뜻한 위로인 동시에, 그들을 그 방으로 내몬 우리 사회를 향한 준엄한 경고장입니다. 저자 김혜원은 25년에 걸친 상담 현장의 경험을 통해, 고립의 문을 여는 열쇠가 강요된 교정이나 성급한 치료가 아니라 진심 어린 공감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청년들에게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나올 세상이 실패해도 괜찮고, 실수해도 손가락질받지 않는 안전한 곳임을 먼저 증명하는 일입니다. “시도하고,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청년들에게 넉넉히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이들을 가장 자유롭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저자의 말은, 오늘의 교육자와 부모, 그리고 정치인 더 나아가 우리 시민 모두가 가장 먼저 새겨야 할 지침입니다.
고립과 은둔은 인간다움의 단절이며, 그 고통은 개인과 가족을 넘어 사회 전체의 역동성을 잠식합니다. 그러나 웅크린 마음들이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다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우리가 손을 내밀 때, 방 안의 고립은 성장을 준비하는 인고의 시간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은 바로 그 연결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어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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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들을 통해 저자는 이 현상을 매우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 덕분에 그동안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은둔형 외톨이의 실제 모습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청년 인구의 약 5%에 해당하는 규모라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숫자는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이러한 청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다시 한번 용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지원하는 사회적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 책은 분명히 환기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분명 유익한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한 번쯤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지점이라는 생각에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특히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있거나, 이 분야에 전문적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매우 밀도 높은 자료와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고민이 남습니다. 상담심리학의 전문 영역이 아닌 일반 시민들까지 이처럼 내밀한 이야기들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가라는 점입니다. 이 지점에서는 개인적으로 약간의 유보적 의견입니다.
따라서 이번 책에 대한 제 평가는 신중한 유보에 가깝습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함께 들어 보고, 이 책이 어떤 독자층에게 가장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조금 더 숙고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는 순전히 시민들이 한 해 동안 함께 읽고 토론하고 저자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는다는 관점에서 살펴본 개인적 의견임을 밝힙니다.
[참고]
◻︎ 선정을 위한 (임시) 도서평가점수 = 9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