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고리로 읽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 '제8장 설교단’
이 혼돈의 시대에,
멜빌이 우리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아울러 설교단에 '서는 자들'에게 묻는 물음에
진지하게 답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대들의 공동체가 선수(船首)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얘기를 좀 길게 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제8장 설교단
내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기도 전에 건장하고 기품 있게 생긴 노인이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휘몰아치는 폭풍에 문이 다시 쾅 닫히고, 모든 사람의 존경심 어린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는데, 그들의 태도는 이 노인이 목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 그가 바로 고래잡이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저 유명한 매플 목사인 것이다. 그도 젊었을 때는 선원이요 작살잡이였지만, 오래전에 성직에 몸을 던졌다. (중략) 하지만 그는 모자와 외투와 덧신을 하나씩 벗어서 가까운 구석의 좁은 공간에 건 다음, 꼴사납지 않은 양복 차림으로 설교단을 향해 조용히 다가갔다.
구식 설교단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곳 설교단도 아주 높았다. 그렇게 높은 설교단은 바닥과 이루는 세로 각도가 크기 때문에, 통상적인 층계를 만들면 가뜩이나 좁은 예배당 공간이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는 매플 목사의 조언을 실천에 옮긴 것 같았다. 그는 계단을 만들지 않은 채 설교단을 완성했고, 계단 대신 보트에서 배로 올라갈 때 사용하는 줄사다리를 설교단 옆에 달아놓은 것이다. 어느 포경선 선장의 아내가 이 줄사다리에 알맞은 빨간색 소모사로 짠 난간줄 한 쌍을 예배당에 기증했다. (중략) 매플 목사는 사다리 밑에 잠시 멈춰 서서 두 손으로 난간줄의 둥근 장식을 움켜잡고는 위쪽으로 눈길을 한 번 던진 다음, 진짜 선원처럼 잽싸면서도 경건한 태도로 손을 번갈아 위로 올리며, 마치 자기 배의 망대에 기어 올라가듯 사다리를 올라갔다.
(중략) 매플 목사가 높은 단상에 이르자 천천히 돌아서서 설교단 위로 몸을 구부리고는 사다리 발판을 한 단씩 조심스럽게 끌어올리는 것을 보게 될 줄은 나도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매플 목사는 끌어올린 사다리 전체를 설교단 안에 집어넣었는데, 그러자 그는 마치 그의 작은 퀘벡 요새에 난공불락으로 틀어박힌 듯한 상태가 되었다.
(중략) 설교단 양쪽의 대리석 기념비 사이에 있는 설교단 뒷벽은 커다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파도가 검은 바위에 부딪혀 눈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 앞바다에서 무서운 폭풍우를 만난 호화로운 배 한 척이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소나기와 굽이치는 먹구름 위 높은 하늘에는 태양이 작은 섬처럼 떠 있고, 그곳에서 한 천사의 얼굴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중략) 무엇이 이보다 더 의미로 가득 찰 수 있겠는가? 설교단이야말로 이 세상의 맨 선두 부분이며,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모두 그 뒤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설교단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 하느님의 격한 노여움의 폭풍은 그곳에서 맨 먼저 발견되고, 뱃머리는 맨 먼저 하느님의 공격을 견뎌내야 한다. 순풍이나 역풍을 관장하는 신에게 순풍을 보내달라고 맨 먼저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이 세상은 항해에 나선 배다.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설교단은 바로 그 배의 뱃머리인 것이다.
_ ⟪모비 딕⟫(허먼 멜빌, 김석희 역) 중에서
— 인간사(史)의 선수(船首)
0.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단순한 해양 모험담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을 응시하는 거대한 형이상학적 텍스트로 평가받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8장 설교단’은 작품 초반부의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이슈메일(구약의 이스마엘에서 유래된 이름)이 피쿼드 호에 오르기 전, 뉴베드퍼드의 포경선원 예배당에서 마주하는 설교단의 물리적 형상과 상징은, 소설 전체의 신학적·철학적 토대를 예고하고 구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공간 묘사만은 아닐 겁니다. 멜빌은 설교단이라는 건축 구조물을 통해, 인간이 거대한 운명 혹은 신적 권위와 대면할 때 취하게 되는 고립과 선도의 자세를 하나의 알레고리로 형상화합니다. 설교자는 공동체 위에 서 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먼저 폭풍을 맞는 존재입니다. 그 고립된 자리야말로 운명을 향한 응시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멜빌이 이 독특한 ‘바다 위 지성소’를 통해 무엇을 시도하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익숙한 근대 기독교의 정통성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흔들고 해체하며, 그 자리에 새로운 실존적 진리를 세우려 합니다.
결국 이 설교단은 단순한 예배 공간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심연을 향해 돌출된 전초기지입니다. 그 위에서 선포되는 말은 교리의 반복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이 『모비딕』이라는 작품 전체를 떠받치는 근본적 긴장입니다.
1.
이슈메일의 시선
소설에서 묘사되는 포경선원 예배당은 완전한 허구의 공간은 아니라는 전언입니다. 멜빌이 1840년 12월, 자신의 첫 포경 항해를 떠나기 직전에 실제로 방문했던 ‘선원들의 벧엘’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군요. 그러나 그는 그 실제 공간 위에 창조적인 허구를 덧입혀, 훨씬 더 깊은 상징성을 부여합니다.
—
이 장의 서두에서 이슈메일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안의 침묵에 압도됩니다. 내부에는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선원들을 기리는 검은 테두리의 대리석 기념비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이 공간은 더 이상 단순한 예배의 장소가 아닙니다. 죽음과 애도가 상존하는, 인간 실존의 한계 지점으로 변모합니다. 신앙은 여기서 위로의 언어이기 이전에, 죽음과 맞닿아 있는 언어가 됩니다.
그 자리에 앉은 이슈메일 앞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매플 목사입니다. 그는 단순한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의 서사이자 상징입니다. 젊은 시절 선원이었고 작살잡이였던 그는, 노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노년의 튼튼한 겨울”과 같은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비치는 “새로운 꽃의 미미한 빛”은, 신앙이 노쇠한 육체 안에서도 어떻게 내적인 갱신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미학적 장치로 읽힙니다.
매플 목사는 바다라는 원초적 혼돈의 공간과 설교단이라는 질서의 공간을 연결하는 가교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바다를 아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 바다를 해석하려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멜빌은 설교를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혼돈을 언어로 붙드는 시도로 제시합니다.
—
설교단에 이르는 과정의 묘사
멜빌은 설교단의 구성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해양적 기능을 신학적 상징으로 전환시킵니다. 이 설교단은 일반적인 교회처럼 계단으로 오르는 구조가 아닙니다. 대신 줄사다리를 통해 접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장치는 당시 선원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장면, 곧 배의 주범대에 오르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신앙의 상승은 결코 안락하거나 점진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리적 긴장을 동반하는 수직적 결단인 것입니다. 오르는 순간, 이미 위험과 노출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 묘사되는 상징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수직 줄사다리입니다. 배에서 보트로 오를 때 사용하는 형태와 닮아 있습니다. 이는 신앙이 단지 관념적 사유가 아니라, 몸을 사용해 오르는 실천적 행위임을 상징합니다. 신앙의 상승은 노동과 결합된 수직 운동인 것입니다.
둘째, 붉은 모사제 줄입니다. 선장의 아내가 기부한 화려한 장식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에는 공동체의 지지와 동시에 세속적 연민의 흔적이 함께 배어 있습니다. 설교단은 철저히 초월적 공간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손길과 역사적 현실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셋째, 선수 형태의 앞부분입니다. 설교단의 전면은 배의 앞머리를 형상화합니다. 설교자는 공동체를 이끄는 선두에 서 있다는 선언입니다. 종교적 권위는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돌출된 자리에서 행사됩니다.
넷째, 비행하는 천사의 벽화입니다. 폭풍 후의 바다를 지켜보는 형상처럼 묘사됩니다. 숭고한 공포와 테러의 감각 속에서도, 여전히 신적 희망이 세계를 관통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신앙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너머를 응시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받침대입니다. 배의 머리 장식과 같은 모양으로 조각된 스크롤 형식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류라는 배의 최전선에 놓여 있음을 상징합니다. 말씀이 방향을 제시합니다. 말씀이 항로를 정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2.
설교자
—
제8장에서 가장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장면은, 매플 목사가 설교단에 오른 뒤 스스로 줄사다리를 끌어올리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와 회중 사이의 물리적 연결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행위입니다. 설교단은 그 순간, 하나의 섬이 됩니다. 아니, 하나의 요새가 됩니다.
이슈메일은 이 장면을 보며 자문합니다. 이것이 혹시 “모든 외부의 세속적 인연과 관계로부터의 정신적으로 잠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고립은 외로움이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충만함을 위한 조건인 것입니다. 매플 목사는 신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인간적 동정이나 세속적 타협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합니다. 그는 회중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말씀과 연결되기 위해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의 시각적 선언으로 보입니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대중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앞에 서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권위는 타협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철저한 내적 독립에서 나온다는 웅변 말입니다.
—
멜빌은 이 고립된 설교단을 두 개의 요새에 비유합니다. ‘작은 퀘벡’과 ‘에렌브라이트슈타인’입니다. 퀘벡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북미의 전략적 요충지였고, 에렌브라이트슈타인은 라인강 유역의 견고한 요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안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는 묘사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외부의 지원 없이도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내부의 자원, 곧 영적 자족성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공급에 의존하지 않고도, 말씀이라는 ‘고기와 포도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선언인 것이죠.
이 지점에서 매플 목사의 설교단은 이후 에이허브의 광기 어린 독백과 강렬한 대조를 이룹니다. 에이허브의 권위는 집착과 집념에서 나오지만, 매플의 권위는 절제와 고립에서 나옵니다. 한 사람은 집단을 자기 광기의 궤도로 끌어들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분리함으로써 참된 주권을 드러냅니다.
결국 멜빌은 이 장면을 통해 묻습니다. 진정한 영적 주권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고 말입니다. 대중의 열광인가 아니면 말씀 앞에서의 고독한 결단에서인가를.
3.
설교단
제8장에서 멜빌이 남긴 이 문장, "설교단이야말로 이 세상의 맨 선두 부분이며,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모두 그 뒤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설교단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는 그의 문학적 천재성이 응축된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설교단은 인류라는 배가 거친 존재의 바다를 항해할 때, 가장 먼저 파도와 맞닥뜨리는 선수(船首)로 재정의됩니다. 설교단은 상징입니다. 항해의 최전선인 것입니다.
—
배의 선수는 폭풍우의 충격을 가장 먼저 받아내는 자리입니다. 가장 안전한 곳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이 비유는, 종교적 권위란 성전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의 진노와 자연의 폭풍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그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자리입니다. 멜빌이 말하듯, “하느님의 격한 노여움의 폭풍은 그곳에서 맨 먼저 발견되고, 뱃머리는 맨 먼저 하느님의 공격을 견뎌내야 한다”는 서술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앙은 단순한 위안의 언어가 아닌 겁니다. 그것은 진리를 향한 처절한 증언이며, 때로는 희생의 자리입니다. 설교단은 위로를 제공하는 공간이기 전에, 먼저 진실을 감당하는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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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빌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항해에 나선 배다.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이 문장은 19세기 낙관적 진보주의나 고정된 교조주의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라는 평입니다. 세계는 완성된 체계가 아닌겁니다. 여전히 항해 중입니다. 여전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방향을 필요로 합니다.
이 관점에서 설교단은 단순히 과거의 교리를 반복하는 장소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해 중인 세계의 키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때로는 방패가 되고, 때로는 방향을 설정하는 나침반이 됩니다.
“설교단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말은 과장된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인류의 실존적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선제적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당위의 표현인 것입니다.
4.
벽화 묘사의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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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 뒤편에 걸린 대형 유화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핵심 개념, 곧 ‘숭고’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평입니다.
그 그림에는 거친 폭풍우와 검은 바위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는 배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마치 “작은 햇살의 섬”처럼 빛나는 천사의 얼굴이 떠 있습니다. 이 대비는 우연이 아닙니다. 혼돈과 빛, 절망과 초월이 동시에 존재하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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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 벽화는 에드먼드 버크가 말한 ‘공포를 동반한 숭고’를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압도적인 공포를 느낍니다. 그러나 그 공포는 단순한 파괴로 끝나지 않습니다. 천사의 존재는 그 공포를 미적, 영적 고양으로 전환시킵니다.
천사가 전하는 메시지—“아아, 고귀한 배여! 나아가라”—는 실존적 절망 한가운데서도 포기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멜빌은 여기서 희망을 값싼 낙관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폭풍을 통과하는 의지로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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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빌은 천사의 빛이 배의 갑판을 비추는 장면을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 제독이 쓰러진 자리에 박힌 은판에 비유합니다.
넬슨이 전사한 지점을 표시한 그 은판은 상징적입니다. 승리의 영광과 죽음의 비극이 한 자리에 공존하는 표식입니다. 멜빌은 바로 그 역설을 끌어옵니다.
구원의 빛은 안락한 평원 위에 임하지 않습니다. 가장 치열한 전투의 현장, 가장 격렬한 희생의 자리 위에 임합니다. 빛은 폭풍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폭풍 속에서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배당에 모인 선원들에게 이 그림은 단순한 장식만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선언입니다. 그들이 앞으로 바다에서 겪게 될 고난과 공포가 단순한 무의미한 소멸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고난은 소멸이 아니라, 견뎌내야 할 항해의 일부라는 메시지입니다.
5.
'정통'에 대한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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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플 목사의 설교단은 멜빌이 평생 붙들고 씨름했던 ‘진리’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라는 설명입니다. 멜빌은 한 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악한 책을 썼지만, 어린양처럼 깨끗함을 느낀다.”
이 역설적인 문장은 멜빌 특유의 종교적 반전을 드러냅니다. 겉으로는 도전적이고 파괴적인 텍스트이지만, 그 내면에는 오히려 진리를 향한 순결한 갈망이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긴장이 제9장에서 시작되는 매플 목사의 설교와, 이후 전개될 에이허브의 신성모독적 반항을 연결하는 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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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에 매플 신부의 설교는 요나 이야기라는 전형적 본문을 통해 회개와 순종을 강조하는 정통적 설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통 칼뱅주의에 대한 전복적 접근인 것입니다.
일부 평론가들이 매플 목사를 ‘종교적 에이허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두 인물 모두 타협 없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합니다. 다만 한 사람은 설교단 위에서, 다른 한 사람은 작살을 들고 바다 위에서 그것을 추구할 뿐입니다.
설교단이 요새처럼 고립되어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진리는 다수의 합의나 민주적 타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입니다. 멜빌은 대중적 도덕주의가 아니라, 고립 속에서 단련된 진리를 더 신뢰하는 듯 보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엘리트주의적 진리관도 엿보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소수의 고독한 자들에게 먼저 맡겨진다는 관점입니다. 동의되지는 않지만 그렇습니다. 멜빌의 세계관인 것이죠.
—
매플 신부가 사다리를 끌어올리는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보시죠. 그 행위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중재의 구조를 차단하는 몸짓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제도적 교회가 매개하기보다, 개인이 직접 거대한 신적 힘과 마주해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리바이어던으로 상징되는 그 압도적 존재 앞에서, 인간은 집단의 울타리 안이 아니라, 고독한 자리에서 서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멜빌은 전통적 교회론을 넘어섭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 신의 진노와 침묵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통찰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정통 기독교의 틀을 흔드는 동시에, 일종의 영지주의적 혹은 초기 실존주의적 사유를 예고합니다.
6.
알레고리를 통해 사회를 말함 (당시와 지금의 사회를...)
—
사회적 알레고리와 19세기 미국: 팽창주의의 선수(船首)
멜빌은 설교단이라는 종교적 상징을 통해, 단지 개인의 신앙 문제를 넘어서 당대 미국 사회의 정치적·사회적 역학 관계까지 날카롭게 통찰합니다.
“설교단이 세계를 이끈다”는 선언은 단순한 신학적 과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19세기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기독교 중심의 제국주의적 팽창론에 대한 은유적 진술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트럼피즘으로 똘똘 뭉친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는 또 어떨까요.
이 시점에서 허먼 멜빌의 '설교단' 담론은 끌어낸 의도이기도 합니다.
—
19세기 중반 미국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구호 아래 서부와 해양으로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었습니다. 영토 확장은 단순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신의 섭리라는 언어로 정당화되었던 겁니다.
이때 교회, 곧 설교단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 팽창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학적 명분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했었습니다.
멜빌이 설교단을 배의 선수에 비유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선수는 방향을 가르는 자리이지만 동시에 가장 공격적인 부분입니다. 종교적 열정이 국가적 야망과 결합될 때, 그것은 세계를 위험한 항해로 이끌 수 있습니다. 멜빌은 이 점을 명백히 경고합니다. 지금의 교회를 향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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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내부를 다시 보시죠. 그곳에는 이교도 퀴퀘그와 기독교인 이슈메일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설교단은 문명화된 기독교 세계의 정점을 상징하지만, 그 아래 모인 청중은 인종과 종교가 뒤섞인 혼합된 인류의 집합체입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설교단의 질서와, 그 아래 모여 있는 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생명력 사이에는 긴장이 흐릅니다. 멜빌은 바로 이 긴장을 통해 묻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제도화된 질서 위에 있는가, 아니면 혼합되고 충돌하는 삶의 현장 속에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 질문은 이후 이슈메일의 행보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퀴퀘그의 우상 숭배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우상 숭배자가 되어야 한다”('10장 진정한 친구'에서)는 역설적인 말을 내놓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도발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플 목사의 설교단이 상징하는 폐쇄적 정통성에 대한 창조적 파괴인 것입니다.
멜빌은 정통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습니다.
문명과 야만, 정통과 타자, 교리와 삶 사이에서 신앙은 어디에 서야 하는가— 바로 그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7.
정리하면서...
허먼 멜빌의 『모비딕』 '제8장 설교단’은 그저 한 종교적 공간을 묘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거대한 우주의 신비와 마주할 때 어떤 실존적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형상화한 장면이었던 겁니다.
매플 목사가 사다리를 끌어올리며 완성한 그 고립된 성소는,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의 엄중함을 선언합니다. 동시에 그 진리가 얼마나 위태롭게, 그리고 긴장 속에서 평범한 인간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설교단이 세계를 이끈다”는 이슈메일의 통찰은 오늘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시대의 ‘선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폭풍우의 충격을 먼저 감지하고, 그 타격을 견뎌내며,
항해의 방향을 제시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까?라고 말이죠.
매플 신부의 설교단은 고정된 항구의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출항 중인 배’의 일부였던 겁니다. 안전한 정박지가 아니라, 언제든 폭풍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멜빌은 우리에게 안락한 교회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파도가 들이치는 뱃머리에 서서, 신의 진노와 은총을 동시에 마주하는 치열한 실존을 요구합니다.
진리는 보호막이 아니라 노출이라며, 위로이기 이전에 대면이라면서 말입니다.
이 장을 통해 우리는 이슈메일과 함께 피쿼드 호의 비극적 항해를 준비하게 됩니다.
설교단이라는 요새에서 얻은 영적 무장은 이후 백고래와의 처절한 사투 속에서 시험받게 됩니다.
결국 멜빌이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폭풍 속에서 끝까지 서 있는 인간의 고귀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설교단 위에서 선포된 그 엄중한 진리가, 실제 항해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질문말입니다.
이 혼돈의 시대에,
멜빌이 우리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아울러 설교단에 서는 자들에게 묻는 물음에
진지하게 답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대들이 선수(船首)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1. ⟪모비딕⟫ 허먼 멜빌, 김석희 역, 2011년판, 작가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