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고도를 기다립니다, 결코 오지 않을 그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매개로 하여...

by KEN

"그리고 그는 근대성이 무너져 내린 또 다른 형태의 야만의 공간에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오지 않을 고도(Godot)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성 베네딕트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_ '강영안의 공부한다는 것' 214-215쪽


문장을 읽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이해하고 있는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는 고백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베네딕트도 모르는데 도대체 뭘 기다리거나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저, 대부분 이런 식이죠. 그냥 넘어가버리는 것 말입니다.

모른 채로, 아는 것처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안다고 착각하는 거죠. 스스로를 속이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살펴봐야죠. 고도를 찾아봅니다.


'알라딘' 적립금이 6,490원. eBook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편의 구입료는 6,300원.

거의 무료로 이북을 구입해 교보 Sam 리더기로 다운로드하여 읽습니다. 알라딘 이북을 교보 기기로...

삶이 참 그렇죠. 아이러니가 가득합니다.


그나저나 무척 속도감 있게 읽히네요. 대본 형식이다 보니...


Chapter I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 내용 이해하기



0.


1953년 1월 5일, 파리 바빌론 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되었을 때 관객과 평단은 깊은 당혹감에 빠집니다. 기승전결의 서사도, 인물의 분명한 배경도, 극적인 갈등과 해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연극의 고전적 문법이 거의 제거된 무대였던 겁니다.


그러나 이른바 그렇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연극’은 곧 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결국 사무엘 베케트는 196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어떤점에서 이 작품은 그의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떤이가 명명한 '부조리 연극'의 정수로 평가됩니다.

‘부조리’라는 말은 본래 음악 용어로, 조화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베케트는 이 개념을 이성과 논리가 무력화된 세계, 목적을 상실한 채 떠도는 인간 존재의 상태로 확장시켰습니다.

"부조리 연극은 구체적인 형상화를 통해, 인간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그 대화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관객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선사한다." — 마틴 에슬린


『고도를 기다리며』는 신이 침묵하고, 거대 서사가 붕괴한 포스트-아토믹 시대—핵의 공포와 파괴 가능성이 인류 의식에 깊이 각인된 시기—의 불안을 무대 위에 직접 드러냅니다. 그것은 단순히 줄거리가 없는 연극이 아니라, 의미가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다림’이라는 행위로 버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존적 풍경입니다.



1.

서사



고도를 기다리며의 줄거리는 사실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합니다.

“두 남자가 시골길에서 고도를 기다리나, 그는 오지 않는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단순한 설정 속에서,

사무엘 베케트는 1막과 2막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시간의 본질—정체성과 순환성—을 탐구합니다.


이 작품의 구조는 철저히 반복적입니다.

1막과 2막은 시간상 하루의 차이가 있다고 암시되지만, 실제로는 거의 동일한 패턴의 행동과 대화가 재현됩니다.

반복은 형식적 장치만은 아닙니다.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붕괴시키고, 존재의 권태와 공허를 무대 위에 가시화하는 장치가 됩니다.


제1막에서 에스트라공은 도랑에서 매를 맞고 등장합니다.

그는 장화를 벗으려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블라디미르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탄식으로 극을 엽니다. 이 첫 문장은 이미 작품 전체의 존재론적 분위기를 압축합니다.


두 사람은 성경 속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도둑’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중 한 명만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50 대 50이라는 확률적 희망, 혹은 절망을 읽어냅니다.

신학적 서사는 더 이상 확실한 구원의 약속이 아니라, 통계적 가능성으로 전락합니다.


포조와 럭키의 등장은 정체된 시간 속에 일시적 사건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럭키의 춤과 광기 어린 독백은 오히려 모든 합리적 담론과 지적 체계의 붕괴를 선언합니다. 말은 넘쳐나지만, 의미는 사라집니다.


제2막은 겉보기에는 1막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반복 속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습니다.

마치 엔트로피 법칙이 작동하듯, 모든 것은 더 쇠락해 있습니다.


나무에 잎이 돋는 장면은 유일한 시각적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희망을 상징하는지, 아니면 기다림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잔인한 시간의 연속성을 드러내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있지만, 구원은 없습니다.


포조는 눈이 멀고, 럭키는 말을 잃습니다.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기능이 점점 소멸해 가는 모습은 존재의 퇴락을 극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결국 2막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점진적 붕괴의 기록입니다.

시간은 흐르지만, 전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다리지만, 도착하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2.

인물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베케트는 인물을 전통적 의미의 ‘성격’으로 구축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심리적 일관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분해해 다시 조합한 형상에 가깝습니다.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흔히 ‘정신’과 ‘육체’라는 이중성으로 읽힙니다.


블라디미르 — 그는 상대적으로 지적이고 사색적입니다(정신).

과거를 기억하려 애쓰고, 시간의 선후 관계를 정리하려 합니다.

무엇보다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의무감은 그에게서 나옵니다.

도덕적 책임 의식 역시 그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는 배뇨 문제로 고통받습니다.

이 디테일은 상징적입니다.

머리로 사고하려는 존재라 해도, 결국 육체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에스트라공 — 그는 현재의 감각에 더 충실합니다(육체).

배고픔, 잠, 통증, 장화의 불편함에 집착합니다.

기억력은 낮고, 고도를 왜 기다리는지도 자주 잊어버립니다.

발을 조이는 장화는 땅에 묶인 인간, 물질적 실존의 속박을 상징합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다투고, 헤어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떨어지지 못합니다. 상호의존적입니다.

블라디미르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자장가를 불러주며 보호자의 역할을 합니다.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의 말에 반응함으로써, 그의 사고와 존재를 확인해 줍니다.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관계 속에 드러납니다.


포조와 럭키는 또 다른 거울 이미지입니다.

인간관계에 내재된 폭력성과 예속 구조를 극단적으로 드러냅니다.


포조 — 처음 등장할 때 채찍을 휘두르며 럭키를 ‘돼지’라고 부르는 오만한 지주입니다.

권력과 소유, 통제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2막에 이르면 그는 시력을 잃고 무력해집니다.

럭키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권력은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시간 앞에서 세속적 성공은 쉽게 붕괴됩니다.


럭키 — 밧줄에 묶여 짐을 들고 침묵하는 노예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포조에게 예술과 아름다움을 가르쳤던 인물입니다.

그의 유일한 장광설은 신학, 과학, 스포츠, 철학의 단편을 뒤섞어 쏟아냅니다.

의미는 파편화되고, 문장은 무너집니다. 이성은 말하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지적 체계에 대한 베케트의 냉소적 풍자입니다.

(유혜진이 주연했던 2016년 영화 "럭키"를 보면서, 이 럭키 캐릭터를 떠 올렸던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네 인물은 각각 분열된 자아의 단면을 드러냅니다.

정신과 육체, 권력과 예속, 기억과 망각, 말과 침묵 말입니다.



3.

대사 (언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베케트에게 언어는 더 이상 진리를 전달하는 신성한 도구가 아닙니다.

세계를 설명하거나 질서를 부여하는 체계도 아닙니다.

오히려 언어는 ‘침묵의 공포’를 잠시 유예하기 위한 장치,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한 일종의 유희에 가깝습니다.


베케트는 언어를 마치 “성벽의 틈으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처럼 다룹니다.

의미를 구축하는 견고한 구조물이 아니라, 이미 균열 난 세계를 스쳐 지나가는 잔향에 가깝습니다.

2막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나누는 대화는 베케트가 생각한 '바람 소리' 같은 언어의 본질을 완벽하게 묘사합니다.

에스트라공: 죽은 목소리들이 모두 들려.
블라디미르: 날개 치는 소리 같지.
에스트라공: 나뭇잎 소리 같기도 하고.
블라디미르: 모래 소리 같기도 해.
에스트라공: 나뭇잎 소리라니까.
(중략)
블라디미르: 속삭이는 소리 같아.
에스트라공: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아.


인물들은 서로의 말을 오해하고, 조금 전의 기억조차 부정합니다.

대화가 막히면 “그래, 그럼 서로를 모욕하자”거나 “연극을 하자”라고 제안하며 무의미한 놀이로 전환합니다. 말은 이어지지만, 이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소통은 흉내로 남습니다.


이 지점에서 베케트의 언어관은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유와 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 하지만, 그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소외를 낳습니다.

말은 존재를 확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정성을 드러냅니다.


결국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언어는 의미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부재를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침묵은 공포스럽지만, 언어 역시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베케트는 그 사이의 긴장—말해야 하지만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상태—를 무대 위에 드러냅니다.



4.

시간과 공간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는 극도로 미니멀합니다.

“시골 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시작 문장이자 지문이기도 한 이 짧은 문장은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철저히 비특정적입니다.

어디라고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이 장소는 우주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보편적 공간이 됩니다.

특정한 지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상태를 상징하는 무대입니다.


이 작품에서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어제의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지, 아니면 꿈이었는지조차 인물들은 확신하지 못합니다.

기억은 불안정하고, 반복은 명확합니다.


포조는 “장님들은 시간관념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대사는 단순한 신체적 조건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 자체가 얼마나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구성물인지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붕괴된 시간 구조 속에서 인물들은 현재의 상태에 묶입니다.

과거는 희미하고, 미래는 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현재 속에 갇혀 있는 듯 보입니다.

기다림은 진행이 아니라 정지이며, 반복은 변화가 아니라 정체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됩니다.


무대 위의 ‘길’은 본래 이동을 전제하는 공간입니다. 길은 어디론가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이 길은 더 이상 통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멈춤의 장소, 대기의 장소로 변질됩니다.


그들은 “가자”고 말하지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떠날 수 있지만 떠나지 못합니다. 이 정지 상태는 단순한 우유부단이 아니라, 실존적 마비를 상징합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중력에 묶여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공간은 종종 연옥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혹은 꿈의 풍경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실존의 조건을 상징합니다.


길은 있지만, 도착은 없습니다.

시간은 흐르지만, 변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베케트는 이 황량한 시공간 속에서 묻습니다.

"우리는 정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가."



5.

상징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베케트는 무대 위에 놓인 지극히 평범한 사물들에 다층적인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물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존재를 해석하는 기호로 기능합니다.


나무 — 무대 위의 유일한 이정표입니다.


1막의 앙상한 나무는 죽음과 절망의 표식처럼 보입니다.

아무것도 맺지 못하는 상태, 고립된 존재의 메마름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2막에서는 잎이 돋습니다.

이 변화는 희망일까요, 아니면 무의미한 순환 속에서도 지속되는 생명의 아이러니일까요.


기독교적 맥락에서 보면, 이 나무는 십자가(Cross) 혹은 생명의 나무로 읽힐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인물들이 목을 매려 한다는 점에서, 이 나무는 죽음과 구원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은 이중적 매개체가 됩니다.


중산모(더비햇) 베케트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지시한 의상입니다.

모자는 ‘생각’을 상징합니다.

인물들이 모자를 바꿔 쓰는 장면은 정체성의 유동성과 사유 체계의 교체를 암시합니다.


특히 럭키는 모자가 있어야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모자를 벗으면 침묵하고, 쓰면 장광설을 쏟아냅니다.

이는 도구화된 지성, 외적 장치에 의존하는 이성을 풍자하는 설정으로 읽힙니다.

생각은 자율적 활동이 아니라, 조건에 묶인 기능으로 전락합니다.


장화 — 에스트라공의 육체적 실존을 상징하는 사물입니다.

장화는 발을 보호하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발을 압박합니다.

너무 작은 장화는 인간이 자신의 신체, 더 나아가 물질적 조건과 끊임없이 겪는 불화를 드러냅니다.


육체는 삶의 토대이지만, 동시에 고통의 근원입니다.


밧줄 — 권력관계를 가시화하는 도구입니다.

포조와 럭키를 연결하는 밧줄은 지배와 예속의 관계를 물리적으로 드러냅니다.

2막에서 밧줄이 짧아진 것은 두 인물의 의존 관계가 오히려 심화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지배자는 피지배자에게 묶여 있고, 피지배자는 지배자 없이는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스트라공의 바지를 지탱하던 끈이 끊어지는 장면은 희극적으로 연출되지만, 그 상징은 무겁습니다. 자살의 가능성도, 구원의 가능성도 동시에 무너진 상태를 암시합니다.


베케트는 이렇게 평범한 사물들을 통해 존재의 조건을 압축합니다.

무대는 비어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빈 공간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물은 말하지 않지만, 인물들보다 더 많은 것을 드러냅니다.



6.

작품의 컨텍스트


고도를 기다리며는 표면적으로는 구체적 역사 맥락을 철저히 지워낸 작품처럼 보입니다.

베케트 자신도 직접적인 시대 언급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그가 겪은 비극적 시대의 체험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무엘 베케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했습니다.

동료들의 체포와 처형을 목격했고, 나치의 추적을 피해 프랑스 남부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작품의 대상 중에 “설마하니 여기가 보클뤼즈 지방을 닮았다는 건 아니겠지!"라는 대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일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유대인들이 국경을 넘기 위해 안내자—어쩌면 ‘Godot’—를 기다렸다는 역사적 정황은 이 작품이 전쟁의 트라우마를 보편적 상징으로 전환했음을 시사합니다.

블라디미르 그래도 설마하니 여기가(몸짓) 보클뤼즈 지방을 닮았다는 건 아니겠지! 거기하고 여긴 아무튼 굉장한 차이가 있으니까.
에스트라공 보클뤼즈라니? 왜 별안간 보클뤼즈는 들먹이는 거지?
블라디미르 넌 보클뤼즈에 가본 일이 있잖아?
에스트라공 무슨 소리야? 난 보클뤼즈엔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다! 평생을 여기서 똥오줌 갈기고 살았다니까! 여기 이 똥클뤼즈11)에서 말이다!
블라디미르 하지만 우린 보클뤼즈에 같이 갔단 말이다. 거짓말이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우린 포도를 땄지. 그래 루시용의 보넬리라는 사람 집에서.
에스트라공(약간 진정된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거긴 사방이 온통 시뻘겋지 않았니?
에스트라공(짜증스럽게) 글쎄 난 아무것도 못 봤다니까!


럭키가 겪는 학대와 굶주림, 닭 뼈를 두고 다투는 장면은 단순한 희극적 장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의 기억을 은근히 환기합니다.

인간이 극한 상황 속에서 얼마나 쉽게 비인간화되는지를 암시합니다.

에스트라공(조심스럽게) 선생님…….
포조 왜 그러시오?
에스트라공 저…… 선생님께선…… 저…… 안 잡수시겠죠? ……이젠 필요없으시겠죠…… 뼈다귀는……?
블라디미르(화를 내며) 좀 더 기다리지 못해?
포조 아니, 아니, 괜찮아요…… 뼈다귀가 필요하냐고?(채찍 끝으로 뼈다귀를 굴리며) 아니, 난 이제 필요없소.(에스트라공이 뼈다귀를 주우려고 한 걸음 나선다.) 하지만……(에스트라공, 멈춘다.) 하지만, 저 뼈다귀는 본래 저 짐꾼 몫이오. 그러니 저놈에게 달래 보시구려.(에스트라공은 럭키 쪽으로 돌아서더니, 망설인다.) 달래 보라니까. 어서 달래 봐요. 겁낼 것 없어요. 뭐라고 대답하겠지.(에스트라공은 럭키 쪽으로 가서 멈춘다.)
에스트라공 여보세요…… 실례합니다. 여보세요…….


1950년대 관객들에게 이 연극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핵전쟁의 위협 아래 놓인 세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대치 상태 속에서 인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고도는 구원일 수도 있고, 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이 침묵하는 우주에서 인간이 홀로 서야 한다는 선언처럼 들렸습니다.


이렇게 『고도를 기다리며』는 특정 사건을 직접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전쟁과 냉전이라는 20세기의 집단적 불안을 압축해 냅니다.


베케트는 역사적 참사를 보편적 실존의 풍경으로 변환합니다.

무대는 비어 있지만, 그 빈 공간에는 시대의 상흔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7.

비평과 수용


이 작품은 읽히는 텍스트이기 이전에, 무대 위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이라는 평입니다.

이 연극은 공연되는 순간, 관객 각자의 삶과 맞물리며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특히 사회적·실존적 소외를 경험한 이들에게 이 작품은 강력한 정서적 연대를 형성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57년 미국 샌퀜틴 교도소에서 이 작품이 상연되었을 때의 반응은 상징적입니다.

지식인 평단은 난해하다고 평했지만, 죄수들은 열광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출소를 기다리는 고고와 디디’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삶의 조건이었습니다.

그 무대는 교도소 담장 안의 시간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1969년 임영웅 연출로 이루어진 한국 초연은 한국 현대 연극사의 분수령으로 평가됩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궁핍 속에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은 고도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무대 위의 기다림은 곧 시대의 기다림이었다는 겁니다.

지난 2023.12 ~ 2024.2월까지 국립극장에서 올려진 신구, 박근형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공연되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8.

지금의 우리에게 '고도'는...


이제 이 작품은 단순한 20세기 부조리극의 대표작을 넘어,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위기들과 공명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우리는 봉쇄와 격리를 경험했습니다. 정지된 일상, 반복되는 하루, 예측 불가능한 내일.


백신과 ‘정상’의 회복을 기다리며,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인물과 닮아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본질을 다시 묻게 했던겁니다.


무대 위의 잎 없는 나무는 오늘날 기후 위기로 신음하는 지구의 초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전 지구적 해결책, 또 다른 ‘Godot’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지연되고, 언어만 무성합니다.

베케트의 정지된 무대는 행동하지 않는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서늘함을 품고 있습니다.


초연결 사회,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엮인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가상공간에서의 파편화된 소통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헛된 대화를 연상시킵니다.

육체성을 상실한 채 루틴을 반복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장화를 벗지 못하는 에스트라공이나, 명령에 따라 ‘생각’하는 럭키의 형상과 겹쳐집니다.


결국, 『고도를 기다리며』는 시대가 변해도 사라지지 않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과연 살아는 있는것인가.



9.

감상을 마치며...


사뮈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는, 이른바 비극적 낙관주의를 제시합니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다음 날 다시 나무 아래로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그 행위 자체가, 부조리한 세계를 향한 가장 조용하면서도 단단한 저항입니다.


이 작품은 삶을 목적지에 도달하는 여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견뎌내야 하는 ‘시간의 무게’, 바로 그 질량이 삶이라고 말합니다.

고도가 누구인지가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곁에 선 타인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베케트의 황량한 무대는 결국 우리 자신의 거울입니다.

그 위에서 우리는 매일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자신의 존엄을 시험받습니다.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끝나지 않는 연극입니다.

막이 내려도 관객은 삶이라는 무대 위로 다시 돌아가, 각자의 기다림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그 불가능한 가능성 속에서, 인간의 실존은 역설적으로 완성됩니다.


고도는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II

해석적 고찰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단순히 ‘의미가 부재한' 텍스트가 아니라, ‘의미를 생성하는 주체로서의 독자/관객’을 소환하는 해석적 장치로 읽혀집니다.


1. 해석자가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지평을 투사하도록

이해란 '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만나는 지평의 융합 과정'입니다(가다머).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도'의 정체나 시대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소거함으로써 극단적인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이 비어 있음은 해석자(관객/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적·개인적 지평—즉, 전쟁의 상흔, 실존적 고독, 혹은 팬데믹의 격리 등—을 적극적으로 투사하게 만듭니다.


결국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고정된 텍스트나 대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자신의 삶이라는 지평을 이 ‘시골 길’ 위에 겹쳐놓을 때 비로소 발생되는 것입니다.


2.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전체성, 그 순환의 구조

이 작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조각조각난 대사나, 장화를 애써 벗으려는 반복적 행위(부분)는, 인간 존재의 영원한 정체성과 순환성(전체)을 끊임없이 나타냅니다. 관객/독자는 1막과 2막의 미세한 차이(나무의 잎사귀 등)를 통해 정지된 듯 보이는 삶 속에서도 엔트로피가 흐르고 있음을 이해하며, 그 속에서 ‘기다림’이라는 전체적 의미를 재구성하게 됩니다.


3. 언어의 사건성과 침묵의 해석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세계를 여는 ‘사건’입니다(리쾨르). 베케트의 인물들이 내뱉는 무의미한 지껄임과 그 사이에 심겨있는 실질적 침묵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해석적 사건이 됩니다. 언어가 진리를 전달하는 데 실패할 때, 그 실패의 자리(침묵)에서 인간 실존의 벌거벗은 민낯이 드러납니다. 관객인 나는 그 침묵을 통해 언어 너머에 있는 ‘말해질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합니다. 그러므로써 텍스트와 인물들이 거부한 정답 대신 내 내면의 나만의 응답을 찾게 됩니다.


4.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 = 기다림이라는 해석의 과정을 견뎌내는 인간 존엄에 대한 경의

어쩌면 ‘고도’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독자나 관객에게 스스로의 해석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추동력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다머는 우리가 전통과 역사 속에 던져진 존재임을 강조했더랬습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행위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도 끝내 의미를 찾으려는 Dasein—다자인(독), Da_거기 + sein_존재, 즉 현존재, 실존적 존재—의 숙명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고도의 정체를 알아 맞추는 퀴즈 극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해석의 과정을 견뎌내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경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각자가 어쩌면 결코 오지 않을지도 모를 고도를 끝끝내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의지를 담아, 스스로의 사랑을 담아 말입니다.



[참고자료]

1.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1969작), 2000,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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