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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4) 하시는 일(사역)

창조와 섭리, 악과 고난의 문제

by KEN
이 우주의 위대한 틀을 고안해 냄으로써 어떤 기쁨도 어떤 완전함도 당신에게 생기지 않았다.
해와 달과 별들이 그 쉴 새 없는 경주를 시작하기 전에
하늘의 둥근 얼굴이 자줏빛 구름으로 채색되기 전에
대기에 구름이 있고 구름이 비를 눈물처럼 흘리기 전에
바다가 지구를 포옹하기 전에
땅이 꽃을 낳기 전에
당신은 안식했다.
당신에게 우주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은 당신 안에 있으며 당신은 자족했다.

<가장 아름다운 것에 대한 찬사> 중,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의 대표시인 파에르 드 롱사르의 시


자족하는 부동의 정지점인 이상
결코 싫증 날 수 없는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는 왜 단지 즐기기만 하지 않았는가?
왜 자족의 상태에서 향유하지 않았는가?
자유롭고 평안하며 안전하고 자위하게
현명한, 영원한 쾌락주의자로 살지 않았는가?
그에게 행복은 여전히 마찬가지인데 왜 창조의 여섯 날을
칭송과 명성의 기념비로 세우려고 일했는가?
풍요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며, 자족하는 자가 무엇을 만들 것인가??

<창조성가> 중, 17세기 영국의 플라톤주의자 존 노리스의 시



이번 장에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그 사역의 의미를 탐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 섭리, 구원의 세 가지 주된 사역을 통해 이 세상의 주권을 행사하시며, 이를 통해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협력을 강조한다. 창조와 섭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본 자료는 기독교 신앙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유익을 주고자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 되겠다. (구원사역은 '구원론'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예정으로 본 고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1. 창조사역


이 내용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방식에 대해 철저히 탐구한다. 창조는 결정된 필요성에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로 시작되었으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창조 이전의 상태를 '무' 또는 '혼돈'으로 해석하며, 이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설계된 세상의 본질을 조명한다. 또한, 창조과학과 과학의 논쟁을 통해 신앙과 과학이 상호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함께 살핀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믿는 창조의 본질과 그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풍요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여... 1)

구약시대) 창조는 -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시간에 따라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자 일부로 이해되었다. (시 33, 136편; 느 9장; 사 40, 45장; 욥 9장 등)
신약시대) 사도 바울은 - 창조는 태초에 이루어진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일어나며 보존하고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역임을 재차 강조하였다. (고전 8:6)
고대, 중세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들 - "보존은 구분되는 창조의 행동이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다"(Conservatio non est actio a creatione distincta, sed continuata creatio)
종교개혁자) 루터, 츠빙글리, 칼뱅 - 창조 사역을 하나님의 섭리 사역 전반으로 확장하고 적용하여 이해하였다.
현대신학자) 틸리히,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 - '일으키는 창조', '지속적인 창조', '보존하는 창조', '인도하는 창조'와 같은 전문용어(개념)을 파생시켰다.


(1)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창조 이전의 상태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는 모든 신앙의 근간을 이룬다.

하나님의 창조는 어떤 필요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어떠한 선재하는 재료도 없이 존재하게 하는 행위로, 하나님은 창조사역의 유일한 주체이다.
- “창조사역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어떠한 선재하는 재료들도 사용하지 않고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역” 밀러드 에릭슨(Mlilard J. Erickson)
- 이런 하나님의 창조를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라 부른다.

창조 이전의 상태는 '무', 즉 '없음(nothingness)'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서는 상태로 이해된다.

성경에서는 창조 이전의 상태를 '혼돈'이라고 설명하며, 창조는 그 혼돈에서 질서와 형체를 부여하는 행위으로 묘사될 가능성이 있다.


(2)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본질

하나님은 세상을 일부가 아닌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이 세계는 본래 선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하나님의 창조 결과가 아니며, 하나님은 본성상 선하시다.
- 물질은 본래 좋은 것이었으나, 인간의 타락 이후 악을 유발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지만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게 된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며, 각각의 방식대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


(3) 창조과학과 과학적 비판

신앙과 과학은 상호 층위가 달라 입장을 상호 비교할 필요가 없는 분야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창조론-진화론의 대립적 상황이 발생한 것은 과학의 발전을 신앙의 위기로 인식한 '근본주의자들'과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기반으로 한 '창조과학'의 등장으로 임함이다. 그들은 성경의 내용을 과학적 서술로 보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유발된 불필요한 논쟁에 기인한다.
- '고백의 층위'인 신앙 vs. '검증의 층위'인 과학
[참조] 창조과학의 주장 요약

창조과학은 진화론과 과학적 갈등을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지구의 나이 측정과 열역학 제2법칙 등을 기반으로 진화론을 반대한다.

창조과학은 진화론이 반기독교적 윤리와 신앙을 양산한다고 주장하며, 홍수 관련 기사와 같은 성경의 내용을 '비유로 읽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을 비판하며, 창조과학이 과학이 아닌 근본주의적 종교운동이라고 지적하고 지구의 역사와 포유동물, 인간의 출현을 근거로 제시한다.

기독교 내에서도 창조과학의 성경 해석 방식과 문자주의에 비판이 존재하며, 성경의 초월적 내용과 과학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조과학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다루지 못하고 오히려 성경을 우상화하거나 신앙을 절대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비판된다.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며, 신학이라고도 볼 수 없는 요설(饒舌)이다.

3.1. 창조와 과학: 논쟁과 창조과학회의 주장

기독교 신앙과 과학의 갈등은 '창조냐 진화냐'에 대한 논쟁으로 증폭되어 왔다.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와 과학적 증명 노력이 갈등을 확산시켰다.

창조과학회는 지구의 나이 측정, 열역학 제2법칙 등을 근거로 진화론을 반대하며, 진화론을 무신론이나 인종차별주의 등과 연결한다고 주장한다.

조정일은 창조과학이 성경의 설명모델이 자연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과학이 객관적 진리가 아님을 강조한다.

<창조과학의 기본 입장> (조정일)
(1) 과학도 객관적이거나 보편적 진리가 아니다.
(2) 창조과학은 이미 답을 가지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지 못하지만, “창조는 진화만큼 과학적이며, 진화는 창조만큼 종교적이다.”
(3) 창조과학은 성경의 설명모델이 자연현상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학문이다.
(4) 기본적으로 성경의 신실성을 믿는다.
(5) 홍수관련 기사를 비유나 교훈으로 읽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자세하고 명확하게 기술했다면, “그는 사기꾼임이 틀림없다.”
(6) “과학적 방법과 과학은 성경에 비하면 풋내기에 불과하다.”
(7) “역사적으로 진화론은 항상 인류에게 피해를 주어왔고 (나찌의 인종학살, 인간실험조작 등) 현재도 주고 있다.

창조과학회는 무로부터 창조, 진화 과정의 비충분성, 종의 고정성 등을 주장하며, 사람과 원숭이의 조상이 다르다고 본다.

<창조과학>의 가설들에 대한 추론
(1) 무로부터 갑작스런 창조가 일어났다.
(2) 돌연변이나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3) 현존하는 종들은 고정되어 있으며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사람과 원숭이는 조상이 다른다.
(5) 지질학적 형성은 대홍수를 통해 설명 가능하다.
(6) 지구와 생물의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

3.2. 창조과학에 대한 과학계의 부정적 반응

창조과학은 근본주의 종교운동으로, 과학이 아니라고 많은 과학자들이 주장한다.

지구의 역사를 45억년으로 이해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의 지구연대측정을 허황된 것으로 간주한다.
- 아더 피콕(Arthur Peacock)은 지구의 역사 45억년을 48시간으로 줄여 가정하면, 포유동물은 최근 30분 전에, 인류는 1초 전에 출현했다고 반박했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진화를 분자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진화론이 비윤리적이지 않다고 강조한다.

커트 놀(Kut Noll)은 창조과학자들에게 과학자 흉내를 내지 말고, 그들의 주장을 "쓰레기과학"이라고 칭하며 버리라고 주장한다.

3.3. 창조과학과 성경 해석의 문제점 (기독교 내에서의 비판)

<창조과학의 성경관과 관련한 문제점> 구약학의 천사무엘:
(1) 창조과학은 근본주의적 성경문자주의에 기초해있다.
(2) 창조과학은 성경의 고대 세계관에서 기록된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3) 창조과학은 성경 안에 다양하고 상충되는 진술들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체계만을 절대화한다.
- (예) 창조 순서의 차이
.. 창세기 1장: 빛∙궁창∙땅/식물∙해/달/별∙물고기/새/지상동물∙사람∙안식일
.. 창세기 2장: 사람∙식물∙동물∙여자 순서로 언급.
- 창 69장의 홍수이야기:
.. A형: 정결한 짐승 7쌍, 부정한 짐승 2쌍, 87일 홍수
.. B형: 모두 1쌍씩, 1년 11일간의 홍수
(4) 성경의 모든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성경은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을 말하고 있고, 과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유한한 피조세계를 다루는데 한정된다.
- 창조과학의 방법론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초월적 영역을 간과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 이런 태도는 오히려 성경을 우상화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 과학의 연구를 경멸하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것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도 신앙의 본질에서 역행하는 행동이다.

기독교 내부의 비판은 성경 해석 방법과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된다.

창조과학은 근본주의적 성경문자주의에 기반하여 성경의 고대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다양한 성경 진술들의 차이를 무시하고 하나의 체계를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성경 내의 상충되는 진술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적 존재를 다루고, 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유한한 세계를 연구하는데, 창조과학은 이를 혼동하여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님의 초월적 측면을 왜곡할 수 있다고 비판받는다.

과학적 증명을 시도함으로써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신앙의 본질에 역행하며, 과학과 신앙을 대립시켜 오히려 신앙을 절대화하려는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다.


(4) 신앙과 과학의 대화 필요성

성경은 창조와 관련하여 '왜'(why)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 '어떻게'(how)를 검증해야 하는 과학적 서술이 아니다.

신앙과 과학의 갈등은 단절이나 정복이 아닌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도움을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 신앙은 고백의 언어, 성경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기술.
- 과학은 검증의 언어.



2. 섭리의 사역

섭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하는 이 내용은 하나님의 사역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연결짓고 있다. 섭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이후 계속해서 세상을 보존하고 통치하는 활동으로 정의되며, 이는 전적인 주권 아래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 법칙과 인간의 자유는 충돌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활용하여 섭리를 이루신다고 설명한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선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협력 관계'라는 주제를 통해 신앙인들에게 깊은 위로와 방향성을 제공한다.
섭리의 어의는 '미리 보는 것'(pro-videre) 인데,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하나님이 인간과 교회 그리고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로 해석합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이 모든 일의 결과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예정'과 하나님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간다는 '섭리'의 구별이 쉽지 않은데요. 사실상 모든 섭리는 예정적이고 모든 예정은 섭리적입니다. 즉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은 미리 예정한 섭리를 통해 자신의 창조 세계와 그 안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돌보며 구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히 4:13) 드러나므로 섭리에 의한 그의 강제적 사역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섭리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롬 8:28-30; 약 1:2-4; 벧전 157, 엡1:11-14, 살전 5:16-18 등) 1)


(1)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믿는 것이자 곧 그의 섭리를 믿는다는 뜻이다.1)

섭리(providence)는 창조 이후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로 구분된다.
- 일반섭리가 “창조 전체에 대해 행해지는 하나님의 돌봄”
- 특별섭리는 "특별한 수령자들을 향하거나 또는 정상적이지 않은 수단에 의해 수행되는 하나님의 활동"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뒤로 물러나 관망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 세상을 주관하고 인도하는 하나님이다.
- '계속적 섭리' 개념은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와 구분된다.
- 계속적 섭리가 '태초의 창조처럼 무로부터 창조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만일 '무로부터의 창조가 계속된다면, 하나님의 첫 창조가 불완전해서 계속 창조사역을 해야 한다는 의혹을 줄 수 있다.

섭리는 창조 행위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창조사역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 섭리는 기본적으로 “만든다기보다 유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섭리는 신자들에게 방향성과 위로를 제공하고, 질서 있는 현실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계속적 섭리는 기독교 사상에서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보존방식은 세상에 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과 직접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자연의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 이런 점에서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자연의 유지와 보존 차원에서 계속적인 '작은 창조'인 것이다.
- 하나님은 세상을 보존하고, 통치하고, 협력하는 '섭리'를 실행하신다.

1.1.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및 인간의 자유의지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선택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한 바를 주권적으로 달성하기 때문이다.

에드가 멀린스(Edgar Young Mullins)는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이 선택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주를 인도하거나 통제하는 것이라 정의하였다.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발생하며, 섭리신앙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은 아무 것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섭리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섭리는 물리적, 도덕적 법칙을 존중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거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섭리의 방식은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는 중요한 관점으로 기능한다.

1.2. 운명과 자유의 상호작용

섭리는 주어진 것과 우리의 자유가 만나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랭던 길키(Langdon Gilkey)는 역사의 구조를 "'운명'과 '자유'의 양극성"(a polarity of destiny and freedom)으로 파악하였다.
- '운명과 자유의 양극성'이라는 것은 '역사가 현실태와 가능태의 양극성으로 다가온다는 말'과 같다.
- 주어진 현실로서 '운명'과 가능성으로서 '자유', 이 둘의 관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 속에서 우리의 존재론적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운명>은 과거의 유산으로, 비인격적 요소로 나타난다. 그러나 단순히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경험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운명은 '시간적 존재'와 '역사의 존재론적 구조'의 버팀목이자 가장 의미심장한 요소이며, 우리가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명이 <숙명>으로 변하는 것은 '자유가 타락한 것'으로, 교회는 숙명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운명과 자유는 현실과 가능성의 양극성으로 나타나고, 우리의 경험 속에 존재론적 구조를 반영한다.

1.3.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존재

죄와 악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허용적 차원에서 악이 존재한다는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악을 직접적으로 의도하지 않으셨으나, 그 악이 자행되도록 허용하신 것은 사실이다.

일어나는 많은 것들은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가 개입될 여지를 두어 가능하게 된다.

악을 행하는 주체는 인간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감당해야 한다.

1.4. 하나님의 보존과 사상적 오해

보존(preservation)은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행위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경은 요셉의 생애, 이스라엘의 출애굽, 다니엘과 그 친구들 등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보존을 강조하고 있다.

이신론(deism)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뒤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여, 하나님의 '기적이나 특별한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다.

하나님의 보존방법을 전동드릴에 비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세상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범신론(pantheism)은 초월적인 신적 행위자를 부정하고, 자연 자체를 신으로 보며 인격적인 신의 통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점에서 이신론과 공통점을 가진다.


(2) 하나님의 협력적 섭리와 창조의 방식

협력(concurrence)은 '하나님의 섭리가 외부적 힘이 아닌 피조물과의 내적인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부분도 있지만, 피조물과의 협력을 통해 목적을 달성할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협력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인격적 관계를 존중하며, 이로 인해 인간의 참여를 열어둔다.

성경에 따르면 창조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피조물의 능동적인 활동과 협력하여 세상을 창조하였다.

창세기 1장 24-25절은 창조 명령의 주체는 하나님이지만, '실제 생성 과정은 피조물이 참여했음'을 나타낸다.
- 창조를 명령하신 주체는 하나님이지만, 실제로 가축과 짐승을 종류대로 생산해 낸 것은 땅임을 알 수 있다(24절)

[창 1:24-25]
24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25 하나님이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들에 사는 모든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3)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의 관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항상 우리 삶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지요. 때때로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도 하지만(이사야 38:1-6) 그런 경우마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1)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 (petito decentium a Deo)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르쳤다.1)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선을 이루어 나가기를 원하며, 그 과정에서 독단적으로 일하기를 원치 않을 때도 있다.
- 히스기야 왕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이 변경된 것(사 38:2)
- 고향에서 능력을 행하지 못한 예수의 경우(막 6:6)
- 베드로가 요청함으로 그에게 물 위를 걷도록 허락하신 것(마 14:22-33) 등

데일 무디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도가 신학의 독특한 특징임을 언급한다.

기도는 항상 1인칭 곧 나-너라는 믿음의 차원 안에 있다.
그것은 믿음의 기본적 형태로서 믿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 관해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와 관련하여 칼 바르트는 기도가 없는 곳에 신학도 없다고 주장했다.
"신학적 작업은 단지 기도로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것으로 인해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신학이 기도의 행위 안에서만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신학의 독특함이며 특징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해 협력하여 일하시며, 이는 신인협력설(Synergism)로 해석될 수 있다.

[롬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참된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뿐이다. 1)


(4)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의 특성

통치(government)는 모든 존재(만물)가 자신의 목적에 맞게 반응하도록 다스리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이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체 창조세계를 움직이신다.

밀러드 J.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하나님의 통치활동의 주요 7가지 특징>을 정리했다.

- 첫째는 우주적 통치다.
.. 하나님의 통치는 창조세계의 종류에 따라 법칙을 정한 대로 어디서나 적용된다.
..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법칙의 보편성)
- 둘째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통치다.
.. 악인이나 선인이나 하나님의 통치는 골고루 미친다(마 5:45).
- 셋째는 선한 통치다.
..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어 나가신다.
- 넷째는 인격적 통치다.
..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다(마 10:30).
.. 그만큼 우리의 사정과 형편에 관심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뜻이다.
- 다섯째는 인간의 행동을 포함하는 통치다.
..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의학을 발전시키고 그 기술을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여섯째는 주권적 통치다.
.. 하나님은 결국 당신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
.. 우리가 일시적으로 그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신다.
- 일곱째는 비숙명적 통치다.
.. 역사에서 발생한 특정 사건이 하나님의 통치로 왜곡되지 않아야 한다.
.. 히틀러의 행동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숙명론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통치를 잘못 이해한 대표적인 견해
- 극단적 예정론의 한 형태인(숙명론(fatalism). 모든 일을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미래를 개척해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 또 다른 극단적 오해는 우연론(casualism)이다. 이것은 숙명론에 정반대되는 입장으로써 아예 하나님의 통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일은 다 우연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로는 하나님에 대한 간구와 기도가 불가능하다.

그 점에서 피조세계는 단지 수동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 피조세계는 "스스로를 유지하고 목적을 향해 움직여나가는 자신만의 운동"을 한다.
- 하나님의 섭리는 그런 피조세계의 운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섭리와 악 및 고난의 문제

이 내용은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를 다루며, 고난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욥기의 사례를 통해,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허용하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믿음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또한, 잘못된 신앙관념의 수정과 함께, 신자의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1) 욥기를 통한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이해하기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하여 험난한 삶과 수많은 악의 현실에서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는 질문들이 제기된다.
- "나는 왜 이토록 험하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악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욥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 고통이 우리의 죄 때문만은 아님을 가르친다.
-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잘못된 추궁을 책망하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자기 죄로 인한 것이라 자책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 욥의 두 번째 교훈은하나님의 허용하심으로,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것을 하나님이 막지 않고 허용하셨으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욥기는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상황을 이겨내는 것이 진정한 신앙임을 강조한다.


(2) 신약의 재앙과 회개에 대한 교훈

신약의 교훈은 누가복음 13장 1-5절의 두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 첫 번째 사건은 의도적인 악행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한 것이며,
- 두 번째 사건은 자연재해로 18명이 참변을 당한 사례다.

예수는 '이러한 고난이 그 사람들의 죄 때문이 아님을 강조하며, 전통적 인과응보 관점을 뒤집는다.'

회개해야 할 대상으로는 '독재와 폭력을 일삼던 사람들과 구조적 부패를 저지른 자들이 포함'된다.

악과 관련된 책임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에게 전적으로 있다.


(3) 하나님과 악의 관계에 대한 이해

오거스터스 스트롱(Augustus H. Strong)은 하나님의 악에 대한 네 가지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죄를 방지”, “악한 성향을 허용", “악한 행동을 관리”, 그리고 "악을 제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천적으로 악을 막고, 세계의 법칙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악을 관리하며, 예를 들어 요셉의 삶에서처럼 악한 상황을 선한 것으로 바꾸신다.

하나님은 악의 확산과 파괴력을 제한하며, 욥의 경우처럼 제한된 파괴력만을 가진다.

설령 하나님이 허용하신 일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작정이 아니라 할지라도 궁극적인 큰 그림 속에서 진행되며, 이는 우리에게 자유와 책임을 부여한다.


(4) 고난과 올바른 신앙적 시각

모든 고통의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한 '목적'(롬 8:28; 9:11)과 '뜻'(롬 9:19)이 있다는 걸 바울은 믿었다.1)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숙명적 신앙>은 잘못된 시각'이며,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방임적 신앙>은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믿는 태도로, 이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고난을 해석하게 만든다.

<건전한 신앙>은 숙명적 신앙과 방임적 신앙의 '중간을 유지'하는 것으로,
-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주권적, 윤리적, 개별적으로 나누는 것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숙명적 관점과 유사하다.

의도적 뜻, 환경적 뜻, 절대적 뜻으로 구분하면 고난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지 않게 된다.

4.1. 고난에 대한 시각과 신앙적 질문

고난은 때로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는 신앙적으로 잘못된 시각으로,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며, 이를 통해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를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난은 하나님의 뜻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는 신앙적 난제를 제기하며, 특히 신자가 직면하는 고난은 이 질문을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고난을 하나님의 의도된 뜻으로 해석하면, 욥의 고통조차도 단순히 하나님의 뜻으로만 받아들이게 될 위험이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절대적 주관 하에 두어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는 신앙적 성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4.2. ️ <방임적 신앙>의 문제점과 그 영향

방임적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방관하신다고 믿는 것'으로,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다.

이러한 신앙은 세상의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게 하며, 따로 신앙적 교훈을 찾지 못하게 한다.

신학적으로 방임적 신앙은 이신론(deism)이나 무신론과 연결되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방임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 일에 무관심하다고 여긴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마음이 달라지는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며, 이는 일상을 무시하는 방임적 태도로 드러난다.

4.3. 하나님의 뜻과 고난에 대한 바람직한 신앙 태도


하나님의 뜻은 단면적인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며, 이는 고난의 문제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보통 "주권적인 뜻," "윤리적인 뜻," "개별적인 뜻"으로 구분되지만, 결국 하나로 통합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나 갑작스러운 갓난아이의 죽음 같은 사건은 다양한 측면에서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해 해야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만 보는 견해는 고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4.4. 하나님의 뜻의 구분과 고난의 이해

하나님의 뜻은 의도적 뜻, 환경적 뜻, 절대적 뜻으로 구분된다.

'의도적 뜻'은 모든 인간이 잘 되고 구원받기를 원하며 고통 없이 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망적 뜻이다.
- 하지만 인간의 죄악과 완악함은 하나님의 의도적 뜻을 방해할 수 있다.

'환경적 뜻'은 불순종과 반항으로 변화한 상황에서 나타나며, 본래 뜻과는 다를 수 있다.

'절대적 뜻'은 어떤 상황에서도 폐기되지 않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으로, 인류 구원이라는 목표는 무산되지 않는다.


(5) 신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뜻

신자에게 찾아온 고난은 반드시 의미가 있으며,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켜보심 아래 있다는 확신이 중요한 힘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환경적인 뜻을 통해 그 고난 속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일 수 없으며, 따라서 고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목회현장에서 신자의 고난을 해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명이며,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고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위로 방법이다.

신자가 겪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의도적인 뜻, 환경적인 뜻, 절대적인 뜻으로 구분하는 해석체계가 문제를 이해하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에게는 어떠한 결함도 일어날 수 없다. 히브리서 4장 13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무지의 [결함이 없고, 이사야 59장 1절에서 말한 것처럼,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기]" 때문에 무능의 [결함도 없으며], 예레미야애가 3장 25 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를]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기]" 때문에 또 좋은 의지의 [결함도 없다]. 따라서 로마서 5장 5절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이가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도록 하는 소망은 소망하는 이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 _ <신> p.573 재인용 1)


[참고 자료]

1)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신> 김용규, Ivp

2) <기독교 신학의 숲> 김형원, 대장간

3)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김용복, 하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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