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존재방식
필멸(必滅)하는 모든 것과 불멸(不滅)하는 모든 것은
오직 성부의 사랑에서 나온 이데아의 빛을 받고 있으니,
빛나는 본원에서 흘러나오되 그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또 삼위이면서 일체인 사랑[성령]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아,
그 살아 있는 빛[성자]은 스스로 영원한 〈일자〉에 남아 있으면서,
그 선의 힘[성령]으로 자신의 빛[형상 idea]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들에게 비추고 있소.
위 시구들은 단테의 <신곡>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만물을 창조하는가를 설명하는 내용 중 일부이다. 아퀴나스가 말하는 성부, 성자, 성령이 플로티노스에게는 각각 일자, 정신, 영혼이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자신의 빛[형상]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들에게 비추고 있소'라는 문장.
여기에서 '거울에 비추듯이'라는 표현에 집중해 보자. 그게 바로 플라티노스가 말하는 영혼의 '성찰', 곧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영혼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즉 영혼은 마치 거울이 어떤 대상을 우리에게 비춰 보여 주듯이, 정신 안에 있는 형상들을 물질에 비춤으로써 만물을 창조해 낸다는 뜻이다.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새로운 존재들을 만들어 내는 영혼의 활동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멋지다.
이후, '영혼'을 '거울'에 비유하는 표현은 서양문명을 이루는 하나의 코드가 되었다.1)
〈최고 신>으로부터 <정신>이 생기고, <정신>으로부터 <영혼>이 생겼다. 그다음으로 이 영혼이 모든 잇단 사물들을 만들어 내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나의 빛이 모든 것을 밝히며, 한 얼굴이 줄지어 있는 여러 거울에 비치듯이, 사물의 하나하나가 비치고 모든 사물은 연이어 계속되고 그 연속의 밑바닥까지 이르게 된다. 따라서 주의 깊은 관찰자는 〈최고 신>으로부터 사물의 맨 나중 부스러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각 부분의 연결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호메로스의 황금사슬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신> 이 명령하여 천상에서 지상까지 늘어뜨린 것이다.
암브로시우스 마크로비우스가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간결하게 요약한 글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야훼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사용된 플로티노스의 세 가지 이론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플로티노스의 세계구조에서 물질세계를 유출시킨 일자・정신・영혼은 영원불변하는 '신적 존재'이다. 창조와 관련해서 본다면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유출된 물질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습니다. 그 바다는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 안에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의해 무수한 물방울들이 생겼다가 없어지지요. 게다가 무작정 출렁이는 것만은 아니고,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지혜로우며 거룩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출렁입니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물방울은 잠시 존재할 동안에조차 오직 그 바다의 뜻과 의지에 의해 이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시편 23:1-4). 이 무한하고(참고. 열왕기상 8:27; 욥기 11:9) 영원하며(참고, 시편 90:2; 디모데전서 1:17), 강력하고(참고. 시편 46:1-3; 104:2-9) 지혜로우며(참고. 로마서 16:27) 거룩한(참고. 이사야 6:3; 요한계시록 4:8) 존재의 바다가 바로 하나님[야훼]이지요. 그리고 그에 의해, 그 안에서 생겼다가 잠시 후 없어지는 물방울들이 곧 존재물들입니다. 야고보가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4)라고 묘사한 인간은 물론, 광활한 우주마저도 이 바다에 잠시 생겼다 없어지는 물방울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_<신> 김용규, p.165 재인용
위의 <존재의 바다> 비유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해 보면 이렇다.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일자]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 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그 셋은 이렇게 구분되고 이렇게 연합되어 있다!"
이 장에서는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교리를 심도 있게 탐구하며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기독교 신앙의 필수 요소로,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이며 심오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교리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 관계를 분명히 하고,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을 확인할 수 있다. 올바른 삼위일체 이해는 신앙의 기반을 강화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통해 삼위일체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용어 해설
'삼위일체'(Triniy)는 두 가지 용어가 합쳐진 것이다. '삼위'(Three Persons)는 인격체(위격)가 셋이 있다는 뜻이며, '일체'(한 본체, One Substane)는 본체(본성)는 하나라는 것을 뜻한다. '삼위일체'(라틴어 trinitas=tri+unity)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는 단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단어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어 자체는 성경에 없지만 성경에 있는 개념을 잘 표현하는 적절한 용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용어를 가지고 시비를 따질 필요는 없다. 개념이 중요한 것일 뿐, 용어는 개념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_ <기독교 신학의 숲> p.170 재인용 2)
삼위일체(Trinity) 교리는 기독교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교리 중 하나이며, 유대교 및 이슬람교의 신관과 차별화되는 기독교의 대표적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설명되지 않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 때문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세계에서 이해될 수 없는 절대 타자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면 기독교의 모든 기본 진리가 파괴되며, 이러한 교리를 설명하려고 하면 정신을 잃을 수 있으나 부인하면 영혼을 잃는다고 경고하고 있다.
삼위일체 개념은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위한 이론적 담보로 작용한다.
몰트만(J. Moltmann)은 "삼위일체가 폐기될 경우 하나님의 개념이 이슬람화 되거나, 예수가 인본주의적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 성경은 이러한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합리적 분석보다 다양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설명되어 왔다.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 방식과 그 과정은 초기 기독교 교리 형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삼위일체 교리가 강조되게 된 배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의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함으로 고백하여 전통적인 한 분 하나님 교리에 혼란을 겪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 성자(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세 분의 정체성을 설명할 신학적 과제로 발전되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위격" 즉 성부, 성자, 성령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초기 교부들은 삼위일체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비유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이레네우스((Iraeneus)는 구원의 경세(the economy of salvation)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을 구분하려 했다.
오리게네스(Origenes)는 삼위일체를 세 동심원으로 비유하였다.
(성부는 가장 큰 동심원, 성자는 가운데 동심원, 성령은 가장 작은 동심원으로 그림)
- 오리게네스의 이런 주장은 종속론과 삼신론적 위험성을 보이기도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한 본질 세 위격"(una substantia tres Persona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번역상의 문제가 발생되기도 했다.
- 헬라어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를 라틴어로 수브스탄티아(substanta, 본질)와 ‘페르소나(persona, 위격)로 옮겼다. 여기서 번역상의 문제가 발생했다.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를 라틴어 페르소나로 번역한 것에 관한 것이다.
- 당시 일반적으로 휘포스타시스는 우시아와 마찬가지로 수브스탄티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던 용어였다. 그런데 우시아를 수브스탄티아로 번역하고 나니, 휘포스타시스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문제. 라틴어로는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를 구분해서 번역할 만한 단어가 없었다. 결국 그는 그런 휘포스타시스를 가면을 뜻하는 연극용어 페르소나로 번역했다. 번역과정에서 신학적 해석이 들어간 것.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런 번역은 양태론의 위험을 내포한 것이었다.
동방교회의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서방교회의 설명이 양태론적 위험을 가진다고 보고, 삼위일체의 위격의 개별성을 강조하며,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와 "전유"(appropriation)라는 개념들을 사용하였다.
-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상호침투"(mutual interpenetration)를 의미
-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상호 관계하는 방식"을 말한다.
- 각 위격들의 "개성"을 강조하면서 "각 위격이 나머지 두 위격의 생명을 공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 또한 "전유"라는 개념은 "삼위일체의 사역들이 통일체"임을 강조하고 각 위격은 "하나님의 모든 외적 행위에 관여"하는 것을 말한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이나 행동양식들을 삼위일체의 세 위격에 구분하여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 세 위격은 모든 속성을 공유한다.
- 그러나 때로 공유하는 특정 속성을 한 위격에 "전유"시키기도 한다.
- 그래서 전능은 성부의 특성으로, 지혜는 아들의 속성으로, 사랑은 성령의 속성으로 전유되는 것이다.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흔적을 인간의 정신에서 찾았고,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데 있어 심리학적 유비를 사용하였다.
- 인간 안에 "기억, 이해, 의지" 혹은 "정신, 지식, 사랑"이라는 “삼원성”(triad)이 존재하듯이 하나님 안에도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추론했다.
- 하지만 이런 삼분설적 접근은 인간이 그런 방식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점에서 "치명적" 한계
-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기도 했다: 성부는 사랑하는 자, 성자는 사랑받는 자, 성령은 연합하는 사랑.
- 그는 성령이 하나님과 신자들을 연합하는 토대인 만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도 이에 상응하는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 하지만 그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는 "아교풀" 같은 사랑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성령을 “몰인격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결국 서방교회 전통의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의 공식적 <신앙고백>을 통해 그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1.1.) 삼위일체의 독특한 정체성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한 분이면서 세 위격을 가지신다는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요소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각각 독립된 위격의 하나님이다.
이 세 위격은 개별적이면서도 한 하나님을 이룬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은 셋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것이다.
(1.2.) 삼위일체의 초기 교부들의 해석 및 번역 문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양한 개념과 용어로 표현했다.
이레네우스는 구원의 경세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을 구분하려 했으며, 오리게네스는 동심원을 사용해 성부의 포괄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서방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를 "한 본질 세 위격"으로 설명하며 헬라어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를 각각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번역 문제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번역은 양태론의 위험을 내포했으며, 이는 한 하나님이 마치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문제를 포함한다.
서방 교회는 위격을 페르소나로 표현하여 한 본질을 강조하고 삼위 하나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려 했지만, 양태론의 위험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1.3.)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이해와 교부들의 노력
동방교회의 카바도키아 교부들은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설명이 양태론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며 세 위격의 존재에 중점을 두었다.
바실리우스는 우시아를 '보편적인 것', 휘포스타시스를 '개별적인 것'으로 구분하며,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비유를 통해 세 위격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동방교회는 신성 내부의 '발출' 개념을 강조하여 개별 사역에 초점을 두면서, 삼신론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와 전유 개념을 통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서로의 생명을 공유하지만 혼합되지 않는 관계를 설명했다.
전유를 통해 삼위일체의 통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각 위격에 전능, 지혜, 사랑과 같은 속성을 전유함으로써 세 위격의 독립적 속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1.4.)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적 정립 과정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의 공식적 신앙고백을 통해 완성되었다.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문제가 해결되었고, 잘못된 기독론들이 배제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성령의 신성이 확립되었고, 삼위일체에 대한 "세 위격 안에 있는 한 본질"이라는 신학적 공식이 채택되었다.
니케아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공의회를 통해 성부와 성자, 성령의 동등성과 인격성을 바탕으로 한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을 선언하였으나, 삼위일체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이후 신학자들에게 맡겨졌다.
(1.5.) 교리 이해 방식의 차이
삼위일체 논쟁은 교리의 근원적 타당성보다 이해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삼위일체 이해 방식에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동방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강조하는 반면, 서방교회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다.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은 성령의 정체성 문제에서 시작되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큰 갈등으로 이어졌다.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온다"(proceeds from the Father)는 전통적 견해를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공식화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필리오케를 주장하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 필리오케: 성령이 "성부(와 성자 | 필리오케)로부터 나온다."
589년 제3차 톨레도회의와 809년 아헨대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반영하여 신조를 수정하고 공식화했다.(서방교회: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867년에 동방교회의 포티우스(Photius, 콘스탄티노플의 초대주교)는 서방교회 지도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 "(와 성자 : 필리오케)"라는 문장을 기존에 동서방 교회가 합의한 신조에 임의로 집어 넣은 것은 서방교회의 이단적 행위라며 즉시 이단으로 규정.
필리오케 교리는 서방교회에서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아, 동방교회의 개별적 사역 강조와 대비된다.
삼위일체 교리는 20세기 신학에서 다시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로저 올슨(Roger Olson)에 따르면 이는 "20세기 신학에서 가장 위대한 경이들 가운데 하나" 꼽았다.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는 이를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것”이라고 했다.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적 개신교에서 잊혀진 신비적 요소를 삼위일체론으로 회복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기독교 신앙의 구조에 삼위일체를 복원시켰다.
- 삼위일체론을 자신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요 출발점으로 삼은 신학자는 칼 바르트였다.
- 그는 "자유주의적 개신교주의의 비 삼위일체론적인 흐름에의 도전으로 저항"했던 인물
삼위일체론은 역사적 계시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간의 계시 간격을 메우고, 이를 통해 인간의 인격성과 신적 인격성의 유사성을 탐구하는 해석적 열쇠로 쓰인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t)와 존 지지울라스(John Zizioulas)는 삼위일체론이 인류의 "총체적 해방"과 교제의 사건을 통해 세계, 타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지를 탐색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비인격적 집단이 아닌 자유와 사랑의 교제를 중시하는 새로운 형식을 제공한다.
삼위일체에 관한 이번 장은 신학의 본질과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탐구한다. 경세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처럼 다양한 설명 방식을 소개하며, 각각의 한계를 지적한다. 비유와 역설적 설명법을 통해 삼위일체의 복잡한 개념을 전하려고 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신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성경적 근거를 통해 신앙체계와 삼위일체의 필요성을 조명하며,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신학적 언어로써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로운 존재임을 알린다.
삼위일체는 이성적으로 정확히 파악하기 쉽지 않은 신학적 개념이다.
삼위일체의 존재방식에 관해 인식론적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조직신학은 삼위일체를 설명할 필요와 책임이 있는 학문이다.
경세적 삼위일체(the econonic trinity)는 성부, 성자, 성령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적 현현(顯現)을 강조하며, 이는 구약의 유일신 신앙의 논리적 발전이다.
성경에서는 주, 아들, 영이 함께 언급되며,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삼위일체적으로 하나님 경험을 묘사해 왔다.
존재론적 삼위일체(the ontological Tinity)는 경세적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확신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적 측면을 강조한 개념이다.
경세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세계와 인류와의 구체적인 관계에 더 중요성을 두며, 이는 삼신론과 중속주의의 비판을 받았으나 표현방식의 차이로 봐야 한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이고 경세적으로 하나님과 세계와의 상호 관계적 측면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 섭리에 대한 '관계'라는 관점을 제공한다.
삼위일체는 얼음, 물, 증기처럼 다양한 비유를 통해 이해를 돕지만, 이러한 비유들은 완벽한 설명이 될 수 없다.
대부분의 비유적 설명은 삼신론이나 양태론으로 오해될 위험이 있다.
남편-아버지-아들은 양태론적 설명으로, 한 존재가 세 가지 양태로만 나타나며 삼위의 독립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계란의 노른자위-흰자위-껍질 비유는 삼위가 분리된 것으로 보아 삼신론에 가깝다.
양태론적 비유는 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고, 삼신론적 비유는 삼위 하나님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며, 전통적으로는 모순된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해왔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각각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존재라는 모순적 설명 방식이 사용된다.
하지만 현상 세계에서는 동일한 관계에서 "이다"와 "아니다"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어 모순으로 보이는데, 엄밀히 보면 이는 모순이 아닌 역설이나 신비로 이해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은 하나이면서 인격은 셋인 존재이므로 논리적으로는 모순이 아니며, 인간과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법적 규칙과 논리적 제한을 초월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는 인격이 셋이면서 본질이 하나라는 범주침범적 표현을 허용한다.
성경은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근거를 명확히 제공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한다는 점을 통해 그 개념에 접근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통일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삼위일체의 명시적 표현은 존재하지 않으며 개념 수준에서 암시적인 흔적만 존재한다.
신약에서는 성경 곳곳에서 삼위일체의 근거를 찾을 수 있지만, 여전히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신비로운 개념으로 남는다.
삼위일체는 합리적 설명이 힘들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서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개념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존재론적 하나 됨과 협력적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며, 이는 신학적 언어로 나타내기 어려운 신비로운 존재방식이다.
5.1. 성경적 하나님 유일성 개념과 삼위일체
성경은 논리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기본 개념과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유일성 개념을 강조하며, 하나님이 오직 한 분임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다신이 아니며, 이는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대전제이다.
5.2. 구약 성경에서의 삼위일체 개념과 그 한계
구약 성경은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며, 이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삼위일체는 한 존재 안에 세 인격이 있거나, 세 존재가 하나의 인격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숫자로 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그의 '하나'는 절대적으로 무한성과 무제약성을 뜻한다.
구약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명시적 표현이 등장하지 않으며, 이는 점진적 계시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개념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르거나 스스로를 '우리'라고 칭한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지만, 이는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
5.3. 신약 성경에서의 삼위일체 개념
신약 성경에서는 삼위일체의 근거들이 구약에 비해 다소 등장한다.
예수의 지상명령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라는 명령이 삼위일체의 근거로 제시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 아버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기도를 하고, 그들의 공통의 사역을 설명한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삼위의 관계를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설명하며, 그들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요한일서에는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는 문구가 담겨 있으며, 이는 삼위일체의 흔적으로 해석된다.
5.4.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와 우리의 이해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신앙의 본질로,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설명을 초월하지만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서로의 곁에 항상 존재하며, 각 역사적 시점에서 더 현저히 드러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신비로우며, 이는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체험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일체성과 삼위성 사이의 관계는 완벽한 설명이 불가능하나, 이 두 개념을 모두 붙들어야 하며, 이는 물리학의 입자성과 파동성 개념과 유사하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필수적이며, 결국 신비의 현존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5.5. 삼위일체 교리의 신학적 중요성과 한계
기독교 신앙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포기할 수 없는 핵심 요소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비한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신학적 언어로, 은혜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을 설명하기 위해 삼위일체의 개념이 필요하다.
성부, 성자, 성령의 존재론적 하나 됨과 상호 협력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삼위일체의 존재방식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신학적 논의에서 다양한 이해방식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 자료]
1)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신> 김용규, Ivp
2) <기독교 신학의 숲> 김형원, 대장간
3)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김용복, 하기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