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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2)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존재일까? 하나님은?

by KEN
<회중 주체적 조직신학>, 김용복의 체계를 참조 1)
그는 기도를 마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꿇었던 무릎이 펴지질 않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기도실을 나서자 북구의 차가운 밤공기가 삽시에 온몸을 휘감았다. 정신이 번뜩 났다.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열두 기둥이 떠받치는 기나긴 수도원 주랑을 지나 자기 방으로 향했다. 도중에 정원 한복판에 있는 조그만 연못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을 뿐이다. 연못 위에 별이 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그는 벽에 걸린 십자가 밑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주여, 조그만 연못 안에 거대한 별이 들어 있듯이, 유한한 제정신 안에 무한한 당신이 계십니다.
짧게 다시 한번 기도를 마치고 일어난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 서랍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한 손에 힘껏 틀어쥐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냉큼 움켜잡은 다음, 한 뼘가량만 남기고 싹둑 잘랐다. 남은 머리는 바싹 잡아당겨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필을 들었다.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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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영국 국교회 수장인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안셀무스가 1077년 출간한 <모놀리기온>의 첫 문장이다. 그가 이 책 서두에 언급한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그는 성서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이성만으로 파악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모습이다.
신자가 신에게 다가가는 방법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앙을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다. 전자는 은혜롭지만 자폐적이기 쉽고, 후자는 설득적이지만 자주 은혜롭지 못하다.
안셀무스는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면서 평생 두 가지 태로를 균형 있게 유지했다. 그는 자신이 견지하는 태도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고 이름 지었다.
_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신> 김용규, Ivp, 서문 인용 3)


"사람들이 내 사무실에 찾아와 자신들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해지기 원하고, 그렇게 해 주기를 신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기독교인들과 아무런 차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 킴 홀)

"내가 원하는 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 안락을 위한 신이 되어 버렸다" (도날드 W. 맥컬로우)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핍

(1) 위치 역전

한국 교회의 주류는 번영과 건강의 복음을 추구하고 있다. 한 마디로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주류가 되어버린 것이다. 믿음과 긍정적인 고백을 통해 물질적 번영과 건강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그 주장이 성경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도 않다. 당연하게도 소외되고 외면받는 약자들의 편에 선 입장도 아니다. 강자의 편이자 자기만족과 성취를 추구하는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고착화되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자기 성취를 위한 들러리로 전락해 버렸다. 인간들이 필요로 할 때 달려와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시종이 되어버린 것이다.2)

☑️ 교회를 통해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성공만을 지향하는 태도를 가진 목사들
☑️ 교회 대형화와 교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만 혈안이 된 목사, 목사들
☑️ 그러한 '자기 교회'를 대를 이어 세습하려는 목사들
☑️ 강한 정치색을 띄고 세력을 키워 기득권을 유지, 확대해 가려는 정치지향 목사들
☑️ 교계 내에 자신의 주장과 뜻을 같이 하는 목사들 간에 강한 연대로 세력화한 목사 카르텔
- 성범죄, 차별과 혐오 조장, 횡령, 극우화 묵인 및 방조, 반헌법적 반민족적 반체제적 언동 등등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목회자가 중심이 되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시민이 아니라 가진 자 편에 서서 기득권을 확대 강화하려는 의도를 보인 목회자 중심의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조직신학자 김형원은 그의 저서 <기독교 신학의 숲> 1권에서 "결국 점집을 찾는 사람이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나 그 바라고 간구하는 내용은 대동소이한 것이 되었다."라고 일갈했다. 번영신학만을 추구하는 기존 교계의 상황이 만들어 낸 기형적 교회의 모습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번영과 안녕만을 추구하는 이러한 '영광의 신학'을 버리고 진정한 <십자가 신학>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2) 그렇게 되어버린 '원인'이 무엇인가?

이런 현상에 대해 다양한 원인이 제시되어 왔다.

▸ 인간중심주의) 현대 세속사회의 사조가 그대로 교회로 들어왔다고 보는 주장
▸ 문제 해결자로서의 하나님) 현대인의 삶의 각박함, 해결해야 하는 산더미 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보니 해결사만이 필요해진 상황에 기인한다는 주장
▸ 자본주의 경쟁사회) 경쟁을 통한 성공은 오로지 가시적이고 물질적 것으로만 측정되는 경향, 그 사조가 그대로 교회로 반입되었다는 진단까지

이 모든 진단이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세속화의 영향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것"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 신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핍
▸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앎>에 기인

위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핍" 등의 원인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일들이 그 안에서 버젓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2)


(3)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실제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조직신학자 김형원은 진단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보다 자신의 필요를 신에게 알리고 그것을 채우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주인공이자 핵심이고 중심에 스스로를 두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들러리이자 시종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알려는 노력은 갑절을 기울이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세태에 대한 한탄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교회에는 자기만족적인 찬양 집회, 수많은 기도회와 축복성회, 신년 특별 새벽기도와 부흥회가 넘쳐나지만 정작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차분히 성찰하고 학습하는 모임에는 인색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핍은 필연적으로 나 중심의 신앙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나의 영광이 우선이고 하나님 또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일 뿐이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Small Groups Forge New Notions of Community and the Sacred”> 등을 저술한 로버트 우드나우의 진단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때 신학자들은 인간의 최대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그 논리가 뒤바뀐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최대 목표가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는 사실상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목사인 칩 잉그램(Chip Ingram)의 평가가 폐부를 찌른다.

"우상숭배란 그 밑바탕을 보면 그분의 품성에 대한 모욕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그분 아닌 다른 무엇으로 멋대로 생각하여 (그 차제로 이미 무서운 죄) 참되신 하나님 대신에 인간 자신의 모습을 닮은 신을 만들어 내놓았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앙, 그분의 계시를 언제나 바르게 읽고 따라 살려는 노력은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과제일 것이다.2)


(4)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의 부재가 온갖 문제 발생의 근원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가 타락해 가는 것이고 이 땅에서 영향력의 소실을 넘어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저 구호나 방향을 넘어 우리 생각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영생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

예수님은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영생 이상의 중요한 문제는 없다. 그 영생이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1)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피조물인 인간이 그 존재 방식에 있어서 전혀 다른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한 사고실험을 한번 해 보자.

내가 2차원 평면만 인지하는 지렁이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3차원 공간인 '위'에서 막대 젓가락으로 내 옆에 있는 지렁이를 집어서 들어 올린다면 그 곁에 있던 지렁이인 내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2차원을 살고 있는 내 인식의 범위에는 '위' 즉 3차원 공간에나 존재하는 '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옆에 있던 지렁이가 말 그대로 순식간에,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3차원 공간에서 나의 바로 머리 위에 다른 지렁이가 있다고 해도 지렁이인 그래서 2차원을 살고 있는 '나'는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차원만 달리하여 고차원상에서 행해지는 것마저도 우리 인간은 인지 할 수 없다. 하물며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 자체인 하나님"을 우리가 알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명료하기까지 하다.

• 무신론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허상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 불가지론자: 인간은 자연적인 영역 너머에 속한 대상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할 것이다.
• 칸트와 같은 철학자: 신은 우리의 지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므로 감각에 근거해서 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 성경은 어떠한가? "사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영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고전 2:11)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2) 관건은 인간의 능력이냐 하나님의 권능이냐에 달려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의 깊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2)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전 1:21),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알려주시기 때문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롬 1:19)

하나님은 인간의 지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앞의 차원의 예에서와 같이 더 낮은 주체가 상위의 주체를 이해하는 방법으로는 유효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주관자인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보여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만큼은 말이다.



3.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1) 두 가지의 차이점

▪︎ '~관한' 앎 :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아는 것.

- 이름이 무엇이고
- 어디에 살고
- 무엇을 공부했고
- 무슨 일을 하는지
- 취미는 무엇인지

인격적 대면이 없이도,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 없이도 그를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 '~을'

- 그 사람이 이런 상황에 놓이면 이렇게 행동할 것을 안다.
- 어떤 유형의 사람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유형을 안다.
- 성격이 어떤지 안다.
-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의 반응은 이럴 것임을 안다.

☞ 상당한 인격적 관계를 가져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깊이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2) 하나님을 아는 것

생각해 보자.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으나, 진정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바리새인 비판의 본질이 그것에 있었다.

• 율법을 잘 알았기에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회개로 이끌고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율법보다 더 큰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에 관한 꾸지람이었던 것이다.

• 안식일의 잡다한 규례를 지키는 것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던 그들에게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급하고 귀중한 일은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에 대한 지적이었다.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았지는 하나님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성경, 종교적 행위, 교리, 법, 찬송, 관습, 전통 등에 대해서는 많이 알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 맺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3) 객관적인 지식도 중요하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렇다고 하나님에 관해 몰라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객관적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아울러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학습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라야 이단을 분별하고, QT 등을 하거나 홀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내 마음대로의 해석을 하는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 말씀의 객관적 이해와 성경 기자가 저술하던 당시의 상황 등을 포함한 이해가 있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음 또한 분명하다.

객관적 지식이 빠진 주관적 이해는 내 마음에 비친 허상을 쫒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과 만남의 세 가지 단계 : 지. 정. 의(知.情.意)

1) 객관적 지식(知)

하나님을 아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는 것이다. 바로 성경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을 설명하는 수많은 묘사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는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것을 넘어 성경의 각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늘 그렇듯 어설픈 지식은 위험하다. 잘못된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나 이단적 신앙의 출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체화된 지식(情)

체험적 지식은 책상머리에서 이론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몸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3) 실천적 지식(意)

순종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전인격이 필요하며, 지식과 체험과 실제적인 삶, 이 세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바람

(1)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으로, 체험으로, 실천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책상머리에서 편안하게 이론적으로만 알 수는 없다. 그렇게 얻은 앎은 죽은 지식이다. 오히려 번잡하고 문제 많은 삶의 현장 속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알기 원한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예레미야 29:12-14)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우리를 만나주고 자신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호세아 6:3) 2)



참고자료

1)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김용복, 하기서원

2) <기독교 신학의 숲 1> 김형원, 대장간

3)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신> 김용규,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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