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론) 하나님의 존재에 관하여
☛ "아빠, 하나님은 어디 계세요? 왜 우리를 지금 도와주지 않나요?"
☛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 "현대인은 아직도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는가?"
☛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던 니체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가 있는가?"
☛ "하나님의 존재를 아예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일까?"
관점을 바꿔서 먼저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즉 무신론자의 의견이 어떤 것들인지 살펴본다.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철저히 허무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쩌면 신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일까? 그 어떤 것일지라도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은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일을 결코 포기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더 이상 단순하고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론과 허무주의의 강력한 도전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극복해 보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 무신론의 다양한 형태들
1. 불가지론 (Agnosticism):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한 회의
: 이들은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 신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이를 판단할 수 없다고 믿는다.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와 그 부재를 증명하려는 시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 19세기 토마스 헉슬리가 처음 사용
-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대한다"라는 주장을 폄
2. 반유신론 (Anti-theism): 적극적인 신 부정과 그 이면의 분노
: 이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종교 자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 이들은 종교가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보고,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종 종교적 믿음과 그로 인한 사회적 결과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적
- '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며 종교는 인간 이성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 같다'라고 했다.
3. 세속주의 (Secularism): 신을 공적 영역에서 배제하려는 시도
: 종교적 신념이나 교리를 사회 및 정치적 영역에서 배제하고,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접근. 과학적 방법과 이성을 중시한다.
- 16~18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극심한 종교적 갈등과 폭력에 의한 종교전쟁 및 이후 일어난 계몽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은 사조
4. 인본주의 (Humanism):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
: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강조하며, 도덕적 원칙이나 의미를 신이 아닌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으려는 철학적 입장이다. 이들은 과학과 이성을 통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 노예제 폐지, 여성 인권 신장, 민주주의 발전 등 인본주의 사상에서 영감을 받은 경우이다
5. 실존주의 (Existentialism): 자유와 책임 그리고 신의 부재 속에서의 불안
: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하며, 신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개인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 존재의 고뇌와 불확실성을 인정하며, 각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한다.
- 장 폴 사르트르
- 인간은 어떠한 선험적인 본질이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간다고 주장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자유는 필연적으로 '책임'을 동반: 신의 부재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
6. 지적인 무신론자 (Intellectual Atheist)
: 무신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추구하며, 종교와 무신론에 관한 온오프라인 논쟁을 반기며 즐긴다. 이들은 종종 문헌과 자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7. 활동가 (Activist)
: 단순히 신을 믿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자신들이 종교를 거부하는지를 사회에 알리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치적 이슈나 사회적 정의와 관련하여 활발히 활동하며, 종종 인권이나 환경 문제와 연결하기도 한다.
8. 반신론자 (Non-theist)
: 종교나 반종교 모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 신이나 종교가 개인의 삶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대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며, 신앙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 "반신론자들은 종교를 무지로 보고 종교와 관련된 개인이나 기관을 후진적이고 사회적으로 해롭다고 본다"
- "종교와 신념의 명백한 오류는 어떤 형태로든 공격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라고 믿는다.
이처럼 무신론은 단순히 신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형태와 입장을 포함하고 있으며, 각 유형은 그 나름의 철학적 기반과 사회적 맥락에서 발전해 왔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 이를 논리적 합리적 사유의 대상으로 접근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것을 상호 비교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비판 방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 자체의 존재가 실제 하는가에 대한 비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행위가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선하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1. 하나님의 존재 비판에 대한 반응 : 변증적으로 대응
2. 그리스도인의 행위 비판에 대한 반응 : 믿는 바를 확증 (고린도후서 13:5)
1) 존재론적 증명 : 어떤 존재의 원인을 계속 추적하면 가장 최초의 원인이 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이며 이로써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존재의 사다리)
'존재란 무엇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김용규의 저서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신>에서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비 신앙인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에 대해 쓰인 가장 '아름다운' 책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유용한 책이다. 그의 책 2부 1장에 이 문제 즉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참고해 볼 것을 권한다. 여기서 그가 기술한 내용 중에 일단을 인용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있습니다. 예컨대 사과는 사과로 있고 책상은 책상으로 있지요. 이때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이지요.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본질과 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 '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지요. (중략)
설사 '어떤 것'이 예컨대 우주처럼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것을 '우주(A)'라고 규정하고 그렇게 이름 붙이면 우주는 동시에 '우주가 아닌 것(~A)'과 구분되어 최소한 둘 가운데 하나일 뿐, 만물의 궁극적 근원은 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위의 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holon)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pan)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원칙은 자연학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에도 그대로 적용되지요. 따라서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하나님은 무규정자, 무한정자여야 하며, 당연히 그에게는 그를 규정하거나 한정할 어떤 본질이 따로 없습니다.
일자(一者)
▪︎ BC 6세기경 아낙시만드로스 : 앞에서 무한정자, 무규정자라고 부른 것을 아페이론(ἄπειρον), 곧 무한자라 불렀고. 그것이 만물의 궁극적 근거이자 신이라고 했다. 이는 "변화를 통해 형성된 것도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죽음도 쇠퇴도 모르고, 따라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만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가 신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소립자의 장(field)이 그렇듯이- 형태만 없을 뿐 어디까지나 물질의 속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다분히 자연학적 개념이었다.
▪︎ BC 6~5세기 파르메니데스 : 아낙시만드로스의 자연적 개념을 형이상학으로 끌어올려 '존재'라고 이름 붙이 최초의 사람이다. ▪︎ 이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이후 자신의 존재론 체계 안에서 모든 이데아의 근거인 '일자(一者)' 또는 '선 자체'로 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었고, 그 체계를 종교화 한 사람이 플라티노스였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토 온_τὸ ὄν 또는 에이낙_εἶναι)가 곧 실체(우시아_οὐσία)라는 개념에는 항상 본질이 붙어 다니며, 그 결과 본질과 존재가 함께 있는 존재물과 혼동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존재물과 같지만,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와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을 단순히 존재라고 하지 않고 '존재 자체(ipsum esse)'라고 구분해서 부른 것은 그런 이유이다.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출애굽기 3:14]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밝힌 장면이다.
'나는 나다' 즉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하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어떤 존재의 이름을 밝히는 것 즉 '존재물'로서 한정할 수 없기에 스스로 존재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나를 밝힌 것이라고 하겠다.
이름이란 본디 '존재'가 아니라 '존재물'에 속한 것인데,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우주론적 증명: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외적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주는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우주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 존재가 의도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그 무한자를 하나님이라 할 수 있다.
3) 목적론적 증명: 세상의 모든 만물은 존재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의 배후에는 그것에 목적을 부여한 지적 존재가 있음이 분명하다.
4) 도덕적 증명: 인간에게 객관적인 도덕법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도덕적인 입법자가 존재해야 한다.
한때는 이와 같은 증명들이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수많은 비판을 거친 지금은 그런 증명이 하나님의 존재를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증명해 주지 못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가 하신 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이 믿음을 주관적으로 고백하게 되는 종교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보여줄 수 없다.3)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피조물(존재물)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이 헤집고 들어오는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나 다시 정리하지만 기독교는 이성적,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층위(종교)가 아니다. 고백의 층위(종교)인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단순히 보여 주려는 노력만이 아니라 과정과 결과 모두가 참되어야 한다.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하는 불신앙이 역설적으로 진정한 하나님 신앙과 진정한 교회의 유산을 보존하고 있다"라고 했다. 즉 무신론자들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이게도 '어떤 참된 신앙인의 모습과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비판적 혹은 희망적 불신앙(주문) 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탠리 그렌츠(Stanley J. Grenz)는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을 '실천으로 증명해 보이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실 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은 고도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라고 주장했던 말을 유념해야 한다.
한마디로 세상에 본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바로 그러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된다는 의미이겠다. 이 말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1) 역설적으로 접근해 보자. '무신론의 증거는 있는가?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어떠한 확고한 증거라도 있는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관련된 모든 실재를 다 조사하고 내린 결론이 신이 없다는 주장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무신론자들이 의존하는 것을 소위 과학적 실증주의라의 관점이라고 하겠다.
실증적 검증 즉 '신이 있음을 그리스도인들이 증명해 내지 못하니 신은 없는 것'이라는 주장은, ‘신이 없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라는 유신론자의 주장과 맥이 같다. 따라서 신 존재증명에 있어서의 실증주의적 주장은 명백한 허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더불어 생각해 보자. 사실상 '무신론 또한 성격이 다른 신앙'의 한 종류 아닌가.
2) 층위가 다른 것을 유념해야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여기에 나오는 '마음'이라는 개념적 대상과 '호수'라는 물질적 실체를 나타내는 대표 명칭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다. 그래서 김동명의 이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우리는 <마음 = 호수>라는 것을 증명하라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은유적인 시적 언어이기 때문에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에 나는 있으니, 내 사랑하는 그대여 내게 와 주오'라는 마음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우리는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마음이 어떻게 호수가 될 수 있느냐'라고 따지지 않는 것이다.
3) 신앙은 고백의 층위이다. 이를 과학적 실증의 층위로 놓고 비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을 믿음의 영역으로 놓고 보려는 것이나, 신앙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태도는 온당하지 못하다. 신앙은 절대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으로 증명할 수 없는 대상이다. 창조과학자들을 유사과학 혹은 사이비 과학자라고 평하는 이유와 같은 설명이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4) 정리해 보자. 하나님은 강하고 전능하고 영원하지만 어떤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 '가장 능력 있는 자', '가장 지속적인 자', 곧 '최고의 존재물'은 결코 아니다.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무규정자이자 무한정자이며, 원칙적으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상인 하나님은 그가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대로 단지 '존재'이다.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또는 철학적)이고 히브리적(또는 종교적) 존재 개념은 다음 편인 <하나님의 속성>에서 다루고자 한다.
# 김용규는 그의 저서 <신>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의미 있는 주장이고 제안이기에 옮겨본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하고 싶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젠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한 이름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후부터 우리의 이야기에서 '존재'라는 말이 나올 때는 특히 명사로 사용될 때는 그곳에 '하나님'이라는 말을 대입해서 이중적 의미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거꾸로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나오면 '존재'라는 용어도 바꾸어서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훨씬 풍성하게 이해될 것이다.
- 존재는 불변한다 → 하나님은 불변한다.
- 존재는 진리의 근거다 → 하나님은 진리의 근거다.
- 하나님은 창조주다 → 존재는 창조주다.
- 하나님은 유일하다 → 존재는 유일하다 와 같은 방식으로."
왜냐하면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여 기독교 교리를 정립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바로 이 같은 방법- 즉 '존재'를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존재'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사용했고 이후 기독교 신학이 그것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2)
이상.
"종교와 신념의 명백한 오류는 어떤 형태로든 공격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라고 믿는다.
예시 1) (유사)종교적 의례로 보이는 자들의 기괴한 행태들
<Vladimir Tikhonov>의 241217일 자 페이스북 포스팅 내용
: 무속, 역술, 점술, 유사종교 및 현대 사회의 병폐를 회피하고자 하는 자들의 (유사) 종교적 의례로 봐야.
잘못하면 "음모론" 경지에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경계해야 하지만, "당선 1천 일 되는 날 계엄"이란 정말 우연일까, 싶을 정도입니다. 김-윤 부부 사기단의 경우 일단 "무속"에 엄청 민감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는 역술 등 각종 민속종교/신종교/점술에 상당한 의미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수"를 얼마든지 맞추었을 수도 있단 생각은 들긴 합니다. 기미가요(君が代) 관련 부분은 몰라도요.
왜 신흥/민간 종교와 각종의 유사 종교적 내용을 치밀히 연구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불안'이 엄청 많은 이 사회에서는 '불안'을 보편적으로 잠재우는 마취제는 술 외에는 각종의 기복적인 (유사) 종교적 의례 등입니다. 윤의 경우에는 술에 많이 의존해 왔지만, 김의 경우에는 특히 무속에 많이 의존해 온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런 부분들은 한국 지배층의 아비투스를 파악하는 차원에서 좀 챙겨 봐야 합니다.
예시 2) 니체 "신은 죽었다" (신의 존재 부정 혹은 또 다른 그 어떤)
니체는 인류가 자기 극복을 통해 초인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영원회귀 사상을 설파. 그 전달자로 짜라투스트라를 상정. 신의 죽음과 초인(Übermensch)의 도래를 선포한다. 그런데 이 초인은 또 어떤 존재인가? 또 다른 신적 존재? 여기서 “신의 죽음”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를 넘어, 절대적 가치와 도덕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가치 체계의 필요성을 상징했다고 해석된다.
짜라투스트라는 30세가 되었을 때 고향을 떠나 산으로 올라가 10년 동안 고독 속에서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지혜를 나누기 위해 산에서 내려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짜라투스트라는 숲 속에서 한 노인을 만납니다. 이 노인은 신을 사랑하는 성자로, 인간을 멀리하고 오직 신만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짜라투스트라는 노인과 대화를 나눈 후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납니다.
노인과 헤어진 후 짜라투스트라는 혼자 있을 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이 장면은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신의 죽음”을 극적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신의 죽음”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를 넘어, 절대적 가치와 도덕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가치 체계의 필요성을 상징합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 소식을 전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인간 세계로 내려온 것입니다.
이 장면은 니체가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이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출처: Perplexity 서치 결과 요약)
참고자료
1)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김용복, 하기서원
2)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신> 김용규, 2021, Ivp.
3) <기독교 신학의 숲 1> 김형원, 대장간
표지 그림
1579년 디다쿠스 발라데스, <레토리카 크리스티아나에서 존재의 위대한 사슬을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