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밍고 Dec 24. 2019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늘 어느 정도는 상처를 받은 채로 살아가는 마음

몇 해 전 오늘, 좋아하던 아티스트가 세상을 떠났다.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답지 않게 자유분방하게 트위터를 통해 자기 생각을 언급하기도 하고 다른 트잉여들(작가 주:트위터에서 상주하는 유저)처럼 밈을 올리면서 함께 주접을 떨기도 했던 친근한 이였기에 그의 죽음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와 동갑내기인 동시에 학창시절 내내 팬이었던 내 입장에선 더. 


특히 그날은 한해를 마무리하는 회식이 있어 아주 분주하고 들뜬 날이었다. 한참 건배사를 하던 중 고깃집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 뜬 속보는 아주 거짓말 같았다. 외마디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내 또래인 2-30대는 "말도 안 된다"며 믿기지 않는 현실을 외면했고, 4-50대는 "젊은 사람이 왜 그랬대. 다 배가 불러서 그래"라는 말로 그 죽음의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예기치 못한 부고를 듣고 아직 충격 헤어나오지 못한 그 다음날, 나는 내 아버지 또래의 상사와 함께 외부 이동을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부고를 알리는 라디오 연예뉴스를 들으며 "젊은 사람이 배가 불러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더이상 듣기 거북하여 "다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 모르잖아요"하고 대거리를 했다. '서울물 먹은 되바라진 애' 캐릭터다운 발언이었다. 같은 차에 탑승하고 있던 다른 나이어린 직원 하나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라고 내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대의 민주주의 사회인 한국에서ㅡ적어도 그 차안에서 만큼은ㅡ 그가 약자였고, 수세에 몰리자 그는 중언부언하며 말을 돌렸다. 


당시에 그를 옹호하고 애도했지만 나는 사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막 관료주의 체제의 일원이 된 사회초년생이었다. 패기가 넘쳤고, 아직 조직에 물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만으로 2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조직의 쓴 맛을 봤다. 전혀 합당하지 않아 보이는 지시에 따라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생판 모르는 남에게 욕설을 듣기도 하였으며, 내 신념에 위배되는 일을 해야 하기도 했고, 전혀 대단하지 않은 사람에게 아부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정함과 완전무결함, 그리고 인류애를 내 장점으로 여겼는데 현실은 내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무 풍파없이 성장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바르지만 뻔해서 재미 없는 것'을 등한시하고, 위악을 떨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 하면서 나는 점점 병들어갔다. 어쩔 수 없다고, 다들 이렇게 산다면서. 그게 위안이 될 리가 있겠는가. 그건 언 발에 오줌 누는 거나 다름없다. 결국 발은 얼어 버릴 텐데 덮어 놓으면 다인가.



병이 들고 보니 내가 좋아하던 아티스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일이 떠올랐다. 사망 직후에는 알지 못 했으나 그제서야 어렴풋이 그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나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사회 생활을 한 그가, 늘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했던 그가, 연약한 마음을 가졌던 그가 얼마나 이 세계에서 고통스러웠을지 내심 이해가 갔달까. 


죽어 버리면 편해질 거라는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나도 그렇고, 어쩌면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저 후배 직원도, 든든한 얼굴로 내게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저 친구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죽음이란 게 어쨌거나 결국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인데 그게 당장 오늘 내일이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 수야 있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내 발로 병원을 찾았다. 한 번 고장난 마음을 원상태로 돌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을 고장내 뜨린 환경에 앞으로도 계속 놓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앞날이 막막했다. 나만의 땅굴을 파고 숨어 괴로워하다 또 풍파를 맞고 다시 땅굴로 기어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엔 병이다. 꾸준히 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나는 의사의 지시대로 약을 빼놓지 않고 복용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그렇게 복용한 알약 몇 알이 내 신경계 어딘가를 건드렸는지 입맛도 돌고 뭔가를 해 보고자 하는 다른 욕구도 생겼다. 그리고 나를 억압하는 이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도 점차 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전과 다름없이 크고 작은 자극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평생 안고 가야 할 고통임을 예감하며 조금은 체념한 면도 없잖아 있다.


아무리 봐도 연약하고 공평하고 완전무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 험한 세상을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슴 아플 일이 많고 눈물 흘릴 때도 많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세상 모든 것이 너무 따갑고 쓰리다. 사는 내내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어떡하겠는가. 연약한 마음으로 태어난 걸. 달리 방법이 없는 걸.


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다. 나의 이 연약한 마음을 필요로하는 친구들도 있고, 사회도 있을 것이다(라고 막연히 추측한다). 또 내 요절로 가슴 아파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연약한 마음이 또 아파서 그럴 수 없다. 나는 그래서 선택 아닌 선택을 했다, 사는 걸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오늘 죽은 그를 잊지 못 한다. 나는 죽음을 이유로 그를 책망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날 그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을 것이다.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다 놓아 버리면 편해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잘 아는 순간이다. 얼마든지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도 이해한다근데 그렇게 앓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또 아무렇지 않게 아침 해가 떠 있더라. 그걸 보면 또 이전날의 내 고뇌와 고통이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겠더라. 마음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나를 이렇게 고통으로 몰아 넣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어쩌다 보니 아직 나는 살아있다. 약 잘 챙겨 먹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낸 새로운 앨범을 듣고, 다음 나올 넷플릭스 신작 시리즈를 기다리면서. 약한 마음인 채로. 그냥저냥 상처에 아파하면서. 


2017년 4월의 한 시점에 멈춰 있는 그 트위터 계정은 그가 이제 더이상 트잉여로는 활동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그뿐이다. 그의 트위터 bio에는 '청년'이라는 말이 있다. 그가 유서에 어떤 내용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bio로 짐작컨대 그는 연약한 마음을 가진 청년으로 영영 남고자 했다. 파랗게 멍이 든 마음을 가진 청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니 덩달아 가슴이 아프다.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명복을 빌며, 영원히 청년으로 남기를 택한 그가 안식을 얻었으면 좋겠다. 나는 장년이 되어도 노년이 되어도 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이렇게 연약한 마음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