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밍고 Feb 04. 2020

우리집에 '디터 람스' 있다

진공관 오디오와 테이블 라이터와 여행용 시계

4560 디자인하우스 전시



몇 달 전 4560 디자인하우스에서 진행하는 디터 람스 콜렉터 분의 전시를 봤다. 뉴욕 MOMA 수준의 오디오 소장품이 있다는 지인의 소개를 듣고서 구미가 당겼다. 소장품에 상당한 애정이 있는 콜렉터 분의 도슨트 해설에 실제 오디오 재생까지 더해져 꽤 볼 만한ㅡ사실 여태 본 전시 중에 가장 이해하기 좋고 매우 관객 참여적인ㅡ 전시였다.




디터 람스 관련 서적과 디터 람스 디자인의 비초에 탁자



전시 내내 '디터 람스Dieter Rams', '브라운Braun', '비초에Vitsoe', '바우하우스Bauhaus' 같은 단어들을 들었다. 바우하우스는 오다가다 들어본 적 있어도(다수의 건축사 이름이 바우하우스인지라...) 디터 람스란 단어는 내게 생소했다. 듣자 하니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조너선 아이브'의 영감을 주는 산업 디자이너의 이름이란다. '브라운'이라는 기업이 가전시장에서 디자인 친화적인 기업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고.




미니멀한 Braun 제품들



디자인은 전반적으로 미니멀했다. 불필요한 장식은 최소화하고, 어차피 반복해서 쓸 테니 손에 익으면 필요 없어질 글자는 아주 작게 만들고, 집안의 인테리어를 훼손하지 않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각이 딱딱 떨어지는 디자인. 그 간결함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도 절묘해서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이베이에서 찾은 Braun SK 61



전시 관람 이후 나는 미친 듯이 디터 람스의 산업디자인 제품들을 검색해 봤다. 그러다 이베이까지 흘러들어 갔고 2019년 12월에서 2020년 1월 내내 이베이만 검색했다. 그러다 꽤 괜찮은 상태의 진공관 오디오인 SK 61 모델을 발견했다. SK 61은 58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SK 시리즈의 하나로 비교적 후기 제품이다. 후기라 봐야 62년도 생산품이긴 하다만. 투명한 아크릴 재질의 상부 커버 덕분에 '백설공주의 관'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이베이에서 나와 인연이 닿은 자는 Icking이라는 독일의 남부 소도시에 사는 독일인이었다. 둘 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의미적 잡음을 여과없이 발생시키며 의사소통하면서 배송방법과 비용을 협의했다. 뭘 해도 꼼꼼한 독일인은 뭘 하나 요청하면 하루를 통으로 썼고 덕분에 크리스마스 전에 값을 치른 오디오는 해가 지난 1월 중순이 다되어서야 우리 집에 왔다ㅡ심지어 독일인은 그 사이에 오스트리아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러 갔다. 정말 펜팔친구처럼 별 소식을 다 공유했다.




파손된 상태로 배송된 SK 61과 망연자실한 고양이




마침내 배송 완료돼 물건을 박스에서 꺼내 보니 상태가 아주 엉망이었다. 아마 배송 중에 취급을 엉터리로 해서 박살이 난 듯했다. 플러그도 박살이 났고, 백설공주의 관의 트레이드 마크인 '투명 관 뚜껑'도 아작이 났다. 겉모습이 그랬으니 내부에 어떤 일이 일어났어도 백 번을 일어났을 거였다. 너무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봤을 때 이것은 독일인의 잘못이라기보단 이렇게 큰 물건을 일반 택배로 보내기로 협의한 쌍방의 과실이었다. 아무튼 나는 저 10kg이나 되는 고장 난 오디오를 보며 착잡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세운상가 내부


박살이 났다고 전혀 활용을 안 할 수는 없어서 급히 수리상을 수소문해 세운상가에 물건을 들고 가봤다. 내부를 뜯어 본 수리공은 '턴테이블의 축이 굽었다는 진단'과 함께 '진공관 하나가 있어야 할 자리로부터 분리됐으니 다시 장착해야 한다'는 등의 소견을 받았다. 꽤 심각한 상황인 듯 설명하던 그는 그럼에도 '이쯤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물건을 두고 가라"라고 했고 나는 그를 믿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이 채 안돼서 수리공으로부터 "수리내역이 이러저러하고 비용은 얼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도 된다."는 전화가 왔다. 마이더스의 손은 세운상가에 있더라.


수리완료된 SK 61. Sufjan Stevens 레코드를 걸어 놨다.




수리 완료된 물건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그동안 사두었던 바이닐 레코드를 걸어 보았다. 진공관 앰프로 돌아가는 레코드를 보는 기분은 되게 이상했다. 연주자를 앉혀 놓고 "이것 좀 연주해 보세요. 아 그리고 이 다음엔 이것도 연주해 주시고요." 하는 기분이랄까. 음악에 대한 물리적인 경험이었다. 음원 스트리밍과 블루투스로 음악을 듣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음질이야 객관적으로 요즘 나오는 스피커가 훨씬 좋지만 날것의 잡음과 진공관의 울림은 우퍼가 달린 스피커와는 장르 자체가 다른 것이다. 아니, 리그가 다르달까. 아무튼 요즘은 판 모으는 재미에 빠졌다. 기회만 되면 중고 LP상에 가서 디깅을 하고,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판은 산다.




나와 함께 디깅 중인 내 친구



나의 디터 람스에 대한 소유욕은 이뿐만이 아니다. 작은 소품에도 꽂혔는데, 벌써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은 시계와 테이블 라이터다. 시계는 여행용 쿼츠 시계인 브라운 4742/AB40sl, 테이블 라이터는 브라운 도미노. 시계는 현역으로 잘 굴러가고 있다. 테이블 라이터는 점화 장치(스파크)에 필요한 알카라인 건전지(504/220A, 이베이에서 구입 가능)가 오기 전까지는 작동여부를 아직 알 수 없다.



디터 람스 디자인의 테이블 라이터 Domino
여행용 탁상시계 Braun 4742/AB40sl



한 달 내내 지른 것들이 꽤 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제할 줄은 알아서(...) 지금은 자발적으로 이베이 어플을 지운 상태다. 여전히 가끔 심심하면 이베이 사이트에 들어가 보긴 하지만 적어도 어플은 지웠다(이 결심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이베이 헌터들은 안다). 쉽게 몰입했다 쉽게 빠져나오는 것도 능력이지 싶다.




SK 61과 함께 배송된 Braun 음향기기 라인업 설명서




전시회 본 뒤 버프를 받아 디자인만 따져 고른 제품을 몇 개 소장하게 되면서 좋은 디자인을 갖는 것이 삶에 어떤 즐거움을 가져오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동가홍상'이라지 않나. 보기 좋은 것은 먹기도 좋고 쓰기도 좋다. 생활 밀접하고 자꾸 손이 가는 간편한 디자인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에서 디터 람스는 참으로 칭송받을 만하다. 예쁜 오디오 장치를 만져서 매일 아침 음악을 듣고 라디오를 듣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Icking에서 온 편지



그래선지 이 진공관 턴테이블을 보유하고 있다가 내게 판매한 독일인은 자필로 편지까지 써서 줬다. '자기 가족의 좋은 친구였던 물건을 보내니 잘 활용해 달라'는 메시지를 담아. 이런 디자인은 가보로 남겨야 한다. 내게 이것을 판 독일인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가족을 판 것이니...(...너무 갔다)




내가 이 기기를 언제까지 쓸 줄은 모르지만 차후에 다른 이에게 양도하게 될 시 나도 같은 말을 할 것 같다. "이 기기가 내게 좋은 순간들을 선사해 주었으니 당신에게도 그러길 바란다. 잘 써달라"라고. 매일매일이 즐겁다. 이 제품을 보는 것만으로. 이를 통해 들을 땐 더더욱.

작가의 이전글 있을지도 몰라, 미세먼지 카르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