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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밍고 Feb 21. 2021

천성을 거스르는 페르소나의 문제

얼마 전에 명리학 공부를 하고 있는 팀장이 재미 삼아 내 사주를 봐줬다. 사주팔자에는 삼라만상이 다 들었는지 아주 별별 얘기를 다 해주시더라. 이를테면 "4월에 인사발령 나겠네. 어디 멀리로 간다야", "결혼은 올해 아니면 2028년에 하겠네", "언어를 잘하겠네. 잘하는 언어 있지?" 뭐 이런 것들. 아, 생각해 보니 다른 이야길 하기 전에 가장 먼저 나온 얘기가 "얘 원래 되게 밝은 애네"였다. 맞다, 나 엄청 밝은 애였다. 중고등학생 시절엔 수업 시간마다 들어오는 선생님들 웃기는 게 일이었다. 대학교 첨 들어갔을 때는 동기들이 나더러 제발 개그맨 시험 봐 달라고 했다. 그랬었지, 그랬는데...




발단은 첫 직장에서였다. 일단 워낙 보수적이고 선후배 위계가 확실한 집단이라 모난 돌은 정맞기 십상이었다. 내 유머는 그냥 하하 웃고 마는 그런 유머가 아니라 약간의 사르카즘이 가미돼 있고 맥락을 알아야 웃긴 것들이어서 특히 더 위험했다. 이전까지는 나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또래들과만 떠들었으니 내 유머가 먹혔던 거지 그 직장에서는 아니었다. 괜히 농담했다가는 오해를 살까 봐서 말을 아끼게 됐다. 5년 전에 새로운 직장으로 전직했는데, 여긴 전보다도 더 보수적이고 나와 공유하는 맥락이 다르다. 그렇게 나는 유머를 포기하는 대신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었다. 


일터에서 웃음을 포기해도 별일 없을 줄 알았다. 순진했지. 그러나 한나절을 일하는 회사에서 웃지 않으면 별로 웃을 시간이 없다. 퇴근 후 저녁, 주말에만 웃어서는 역부족이다. 웃음기 없이 평일을 보내다 보니 주말에 웃고 떠드는 게 어색해졌다. 나중에는 과거의 내가 어떻게 웃었고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났다. 본성과 다른 얼굴을 하고 사니 당연했다. 괜히 내 본성을 보이면 가십거리가 될까 해서, 회사사람들과 너무 친해지면 내 사생활을 파고들까 봐서 그래서 웃지 않았을 뿐인데 나는 정말로 웃지 않는 사람이 됐다.


다들 어느 정도는 상황과 장소에 맞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산다고 하지만 그 페르소나조차도 적당히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본성과 전면 배치되는 페르소나를 가졌거나, 양극단을 달리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은 존재로 살면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곤할까. 나 또한 천성과는 맞지 않는 삶을 살려니까 쉽게 피로하고 때로는 아주 우울해지곤 했다. 



이게 결국엔 내 문제다.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에 관한 무슨 얘기를 하든 그게 뭐 중요한가. 이 보수적인 사회는 나아질 생각도 시도도 없이 그대로 유지되려고만 할 거다. 이미 그렇게 생겨난 세계를 어쩌겠는가? 내가 그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틀을 깨고 나오지 않는다면 태어나기도 전에 그냥 알에서 죽는 새가 된 거나 다름없다(나도 안다. 진부한 인용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속된 말로 아주 '내 쪼대로 해'야 되나.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럴 가치는 있다고 본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알을 깨고 나가 새가 되었다고 해서 뭐라 그럴 수 있는 사람 없다. 뭐라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그럼 내가 그 알 속에서 곪아 죽고 있어야 되겠냔 말이다.


이 전투적인 마음을 간직하고서 일단 다가오는 월요일부터 성질대로 좀 살아야지. 내가 살려고 일하지 일하려고 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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