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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밍고 Feb 25. 2024

이제는 없는 양의 시선 <애프터 양>

<애프터 썬> 생각도 나

#시간이 지나 봤던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보면 잘 기억이 안 나서 이제 관람한 영화에 대한 기록을 하려고 합니다#

#줄거리 요약이 될 수도 있고 단순 감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록에 의미가 있으니 형식에 제약은 없을 거예요#



개봉한 지 한참 지난 <애프터 양(2021)>을 어제 봤다. 비슷한 시기(2022...) <애프터 썬>도 개봉을 했고 제목도 비슷하기에 막연히 비슷한 영화이겠거니 기대가 있었다.


<애프터 양>은 현재로부터 얼마나 떨어진 시점의 이야기인지, 어느 곳을 배경으로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게 묘사되어 있다. 다만 '테크노 사피엔스'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와 '클론(복제인간)', 그리고 전면 자율주행 차량이 상용화되어 있기에 미래의 언젠가라는 것 정도는 추론할 수 있다. 미래라고는 하지만 공간적인 구성이나 디자인은 서촌이나 성수동의 오리엔탈 미니멀리즘 쇼룸에서 본 그것과 같다. 또 다른 A24의 작품인드라마 <성난사람들(Beef)>의 세트와 소품이 어느 정도는 겹쳐 보인다. 아무튼 의생활과 식생활도 동양풍인데(정확히는 동아시아풍), 저고리 스타일의 옷이나 차이나칼라가 부각되는 옷을 입고 고추장과 라멘, 일본어가 적힌 맥주(도라이라고 적혀 있다. 아마 드라이한 맥주일 듯) 등을 먹고 마신다.


'양'은 테크노 사피엔스 중 하나다. 그는 문화를 담당하는 안드로이드로, 주인공 제이크와 그의 부인 카이라가 입양한 중국계 여자아이 미카에게 뿌리를 알려주는 존재다. 어린아이로 하여금 중국어와 중국문화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게 하며, 그녀의 오빠로서 기능한다. 그것이 그의 고유 기능이다. 하지만 집안에서 그의 기능은 그 이상이다. 아이의 보모 역할이자 상담사... 아마 그 집에서 미카와 가장 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건 양일 것이다. 그런 양이 돌연 기능을 멈춘다. 일어날 기미가 없다.


양이 기능을 멈추고 난 뒤 제이크는 양을 고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맨다. Certifed refurbished로 구매한 양이지만 다른 부품도 아닌 핵심적인 부품이 고장났기에 간단하게 공인 수리점에서 고칠 수 없다. 양은 반드시 본사로 보내지거나, 야매 수리점에 가야 한다. 본사로 보내는 순간 양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것은 제이크와 그의 가족구성원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다. 제이크는 축 늘어진 양을 이고지고 이웃의 조언에 따라 야매 수리점에 간다.


야매 수리점에서도 뾰족한 수가 없다고 한다. 그곳에 방문해서 얻은 유일한 소득은 어떤 것이 양을 멈추게 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는 것이다. 스파이웨어.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한들 야매 수리점에서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 수리공은 가담항설로만 존재하던 '스파이웨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흥분하며 이것에 대해 더 잘알고 있는 연구원에게 양의 부품(메모리뱅크)을 가져갈 것을 권유한다. 제이크라고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당연히 연구원을 찾아간다. 수년간 테크노 사피엔스를 연구한 연구원은 양의 부품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양이 남겨둔 기억의 편린들이 거기에 있다. 그에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귀중한 질적 연구자료일 것이다. 연구자들이란..하하. 연구자의 입을 통해 제이크는 양을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받는다. 비록 양은 돌아올 수 없지만 연구자로부터 값비싼 판독기를 얻어 양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양의 기억들, 그것은 어떤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건조대에 걸려 건조 중인 빨래, 아이가 먹고 남은 접시 위의 음식들, 제이크와 카이라가 소파에 기대어 편히 쉬는 순간, 거울에 비친 양 본인의 모습, 그들 가족조차 가볍게 여기던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여인의 모습까지. 제이크는 양의 기억들을 재생하며 양이 무엇에 영향을 받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미 양이 떠났기에 제이크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영향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양이 사랑하는 순간인지, 감명 받은 순간인지, 기뻐한 순간인지. 거울에 비친 양의 모습으로 대충 양이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양의 기억 속에는 우주가 펼쳐져 있다. 그 안에는 은하계를 이루는 수많은 별들로 가득하다. 우리 은하에서 벗어나면 저 멀리 다른 은하계가 펼쳐져 있다. 우리 은하는 감마, 그리고 그 이전은 베타, 그보다 전은 알파다. 제이크의 가족은 감마의 범주에 속하는 기억이다. 한마디로 양의 가장 나중 가족이다. 제이크는 베타의 기억을 헤집다가 알파의 기억에까지 이른다. 과거에 이미 누군가의 형제로 기능했던 양은 형제가 장성해 둥지를 떠나자 이제 나이 든 어머니를 간병한다. 그러다 에이다를 알게 되며 깊이 교류하게 된다. 알파 단계에서 양은 어머니의 죽음, 불의의 사고로 인한 에이다의 죽음까지도 연이어 겪게 된다. 혼자가 된 야은 뒤이어 베타 메모리 속 가정에 리퍼비시 제품으로 팔린다. 그는 그 가정에서 여느 테크노 사피엔스답지 않게 우울해하다 금세 파양(?)된다. 감마 단계에서 그는 마침내 새롭게 정착한다. 동생인 미카의 하나뿐인 오빠로, 제이크와 카이라와 관심사를 나누고 철학적인 사유까지 할 수 있는 가족구성원으로. 그리고 양은 알파 단계에서 깊이 교감했던 바로 그 에이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의 원인간은 이미 사망했고 그녀는 원인간을 복제한 클론이지만 그들은 곧 어렵지 않게 마음을 나누고 친구가(아니, 아마도 연인이) 된다.


양의 기억 속에 남은 사람들은 이제 전부 그를 잃었다. 그가 남긴 기억의 편린을 몇 번이고 반추하며 눈물을 흘린다 해도 이제 양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상실이 주는 고통과 슬픔을 감내하며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양에게 작별을 고한다.


다 보고 나니 <애프터썬>과 꽤 비슷한 지점이 있다. 과거의 기록을 통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간 누군가의 생각을 짐작해 본다는 점에서. 물론 방법론 면에서 차이가 있다. 한쪽은 과거의 내가 다른 사람을 피사체로 삼았고(애프터썬), 다른 한쪽은 과거의 누군가가 나를 피사체로 삼았다(애프터양). 다른 사람의 심정을 짐작하기에 그 사람을 피사체로 삼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그 사람의 시선이 되어 나를 포함한 피사체를 바라보는 게 나을까. 나는 그 사람의 시선이 되는 쪽이 그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기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자 선택하고 결정했는지에서부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카메라를 쥔 <애프터썬>의 소피 마음을 안다. 소피가 얼마나 어리고 무심했는지, 그래서 이제와서 그녀가 얼마나 아빠에게 미안하고 슬픈 감정을 느낄지. 사실 죽을 만큼 우울함을 느꼈을 아버지의 고통은 소피의 상상의 영역에서 짐작된 것일 뿐 우리는 정확히 아버지가 어떤 감정 속에 놓여있었는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버지의 시선으로 그 당시를 볼 수 있었다면 보다 아버지의 감정을 잘 헤아릴 수 있었을 테다.


다시 <애프터양>으로 돌아와 양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양의 시선을 통해 그가 얼마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애정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눈길이 미치는 곳마다 그가 사랑해마지 않았던 순간이 있다. 그 소소하고 평온하게 굴러갔던 삶이 실은 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곧이어 깨닫게 된다.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이제 양이 가진 의미를 안다. 아마 사는 내내 양의 빈자리를 절감할 것이다. 다른 누가 와도 그 자릴 채울 수 없다는 것 또한 이미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양이 떠나간 이후의 일이다.



 

https://youtu.be/L1bTfLSc5XM?si=jgeIVV963cAG6g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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