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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행사중?

by 친절한기훈씨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임대'라는 글자가 참 많이 눈에 띈다. 상가 곳곳에 붙어있는 빨간 글씨, 때로는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때로는 흰 종이에 매직으로 급하게 써 붙인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딸이 7살일때 한창 한글에 관심을 배워서 인지 글자에 관심이 많았다. 길을 걸으면서 간판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어보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엄마, 아빠, 이게 뭐야?"라며 질문을 쏟아낸다. 아이의 호기심은 끝이 없고, 세상의 모든 글자가 신기한 보물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전, 딸아이가 조금 다른 질문을 했다.

"아빠,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본 단어가 뭔지 알아?"

"뭔데?"

"그건 바로 '임대'라는 단어야! 이거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순간 당황스러웠다. 7살 아이의 눈에도 '임대' 표지판이 그렇게 많이 보일 정도라니.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경기 침체, 높은 임대료, 소상공인의 어려움 같은 복잡한 경제 상황을 7살 아이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음... 가게를 하시던 분들이 다른 일을 하게 되어서, 새로운 사람이 와서 가게를 할 수 있게 빌려주는 거야"라고 최대한 쉽게 설명해봤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니 완전히 이해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와이프와 딸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산 마리오 아울렛과 W몰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고, 아이들은 창밖 풍경을 구경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큰딸이 창밖을 가리키며 신나게 소리쳤다.

"엄마! 저기 유치원 행사하나봐! 유치원 행사중이라고 적혀있어!"

나와 와이프는 동시에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는데, 아이가 본 것은 '유치원 행사중'이 아니라 '유치권 행사중'이었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건물을 점유하여 인도를 거절하는 의미를', '유치원 행사를 한다고’ 읽은 것이다. 한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비슷해 보이는 글자들을 헷갈려 한 것이었다.

"아니야, 저건 '돈을 못갚아서 다른 사람이 건물을 잠시 가지고 있겟다는 뜻' 이라고 정정해주자, 딸아이는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아, 그래?"라며 웃었다.

아이에게는 세상이 온통 새롭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다. '임대' 간판도, ‘유치권 행사' 현수막도, 아이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글자 놀이의 대상일 뿐이다. 어른들이 보는 현실의 무게나 경제적 어려움 같은 것들은 아직 아이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어른들도 가끔은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현실을 외면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자라서도 세상을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한글 공부는 계속되고, 세상을 읽어가는 연습도 계속될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가 할 일은 아이가 세상의 글자들을 정확히 읽는 것만이 아니라, 그 글자들이 담고 있는 의미를 따뜻하고 희망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주는 것이 아닐까.그러니까 다음에 딸아이가 또 다른 간판을 잘못 읽더라도, 먼저 웃어주고, 그다음에 정정해주자. 아이의 실수 속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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