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랄라라 Feb 10. 2022

진흥왕만 순수비를 남긴 까닭?

- 그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비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어떤 내용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돌에 글씨를 새긴 것을 비석이라고 한다. 비석은 여러 종류가 있다. 돌아가신 분이 하신 일들을 칭송하기 위한 비석이 있기도 하고, 선정비처럼 관리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을 때 지역의 사람들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돈을 모아 세우는 비석도 있으며, 어떤 장소나 건물 등을 표시하는 비석도 있다.


또 다른 비석의 종류로 나라의 영토를 넓힌 것을 기념하거나 나라 간의 영토를 분명히 하기 위해 세우는 비석도 있다.

그중 하나를 북관유적도첩에 실린 척경입비도를 통해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1107년에 윤관이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 9성을 쌓은 후  비석을 세워 고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서 보이는 많은 깃발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와 별무반의 깃발일 것이다. 여진의 기병들에게 여러 번 패하다가 별무반 조직과 훈련을 통해 승리를 거둔 그 순간 윤관과 별무반은 너무나 기뻤을 것이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 새롭게 넓힌 고려의 영토를 바라보며 고려의 영토임을 알리는 비석을 세우는 그 순간은 스스로 자랑스러웠을 것이며 감격에 차 올랐을 것이다. 장수와 군사들 모두 당당해 보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북 9성은 2년 만에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 비석의 글자들은 대부분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하며,   '고려지경' 즉 고려의 영토를 표시한다라는 글자만 남아있었다고 전해진다.

척경입비도/고려대박물관

또 하나는 백두산정계비이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백두산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생각하여 그 지역에 대한 영토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1712년에 청나라의 관리 목극동과 조선의 관리 이선부는 백두산에 올라 둘러본 다음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이 비석에는 "오라총관 목극동이 황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돌에 새겨 명기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고 적혀있다. 이후 토문강이 어떤 강이냐에 대한 해석 문제로 영토 분쟁이 생기기도 하였다.

백두산정계비/우리역사넷


진흥왕만 순수비를 남긴 까닭은?

고구려나 백제의 비석 중 순수비가 있을까? 또한 신라의 다른 왕들은 순수비를 세운 적이 있을까? 현재 전해지는 삼국시대의 순수비는 진흥왕순수비 밖에 없다. 또한 고려와 조선의 비석 중에서도 순수비라는 이름을 가진 비석은 없다. 그렇다면 왜 진흥왕만 순수비를 남겼을까?

 '순수'란 황제나 임금이 직접 그 영토를 돌아다니며 지방의 정치와 백성들의 삶을 살피던 것을 말한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제24대 임금인 진흥왕이 직접 그 지역을 다녀간 것을 기념하여 만든 비석이라는 뜻이다. 현재 진흥왕순수비로 발견된 것은 북한산순수비, 창녕첩경비, 황초령순수비, 마운령 순수비, 이렇게 4개다. 창녕첩경비는 비석의 제목에 순수라는 낱말이 없지만 비석의 내용에 왕을 수행한 관리들의 명단이 적혀있어 순수비로 보고 있다.  진흥왕이 네 개의 비석을 세운 것은 전쟁을 통해 신라의 영토를 넓힌 것을 기념하여 그 지역에 간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그중 북한산순수비는 북한산의 비봉에 설치한 것으로 한강유역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후 신라의 영토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글자들이 훼손되었지만, 해독이 가능한 일부의 글자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비석에는 제목, 진흥왕이 지역을 다녀간 까닭과 경과, 왕을 수행한 사람 등이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순수비/국립중앙박물관
이리하여 관경을 순수하면서 민심을 … 하고 노고를 위로하고자 한다.
만일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고 …
상을 더하고 …한성(漢城)을 지나는 길에 올라 …
도인(道人)이 석굴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 돌에 새겨 사(辭)를 기록한다.
-북한산순수비 내용의 일부

북한산순수비의 내용을 보면 순수의 목적이 단순히 확장한 영토에 대한 과시나 확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토를 확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군대를 보내 그 지역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구려 사람들 또는 백제 사람들이 신라 사람으로 살게 해야 비로소 그 땅이 신라 땅이 되는 것이다. 신라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신라에 세금을 내고, 전쟁에 징발되는 것을 포함한 국가의 여러 일에 노동력을 제공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고 해서 그다음 날부터 한강유역의 사람들이 바로 신라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 죽은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집이나 논밭, 가축 등 재산을 크게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고 생산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안전하다는 믿음을 주어야 하며, 신라의 관리들이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 지역의 인구와 논밭, 나무, 가축 등을 조사하여 적절한 세금을 책정하여 걷어야 한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신라의 영토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북한산순수비의 내용 '도인'이라는 승려가 있다. 도인은 새롭게 편입된 백성들을 교화하는 역할, 한강유역의 백성들이 신라인으로서 나라에 충성할 있도록 교육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

진흥왕은 과정과 결과 모두를 즐겼다. 창녕, 서울(한강유역), 함경남도를 직접 다니며 넓힌 영역에 대한 기쁨을 전쟁을 준비하고 승리로 이끈 신하들, 장수들과 함께 하였다. 하지만,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힌 것을 결과로만 본 것이 아니라 부강한 국가 건설과 삼국통일이라는 큰 목표의 과정으로 생각하였다. 그 목표를 위해 직접 그 지역에 가서 정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와 백성들의 마음을 살폈다. 이러한 진흥왕의 노력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큰 기반이 되었다.

북한산에 있었던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멀리까지 시야가 확 트여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보다 더 잘 살기를 원한다. 그 희망을 목표라는 이름으로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한다. 목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을 이루었을 때 기쁨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어떤 목표든 그다음의 목표를 세울 필요가 없을 만큼의 행복을 주지는 않는다. 다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니 목표라는 결과를 위해 그 과정을 고통스럽게 보내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이다. 끊임없이 과정과 결과를 반복하는 삶에서 과정 또한 즐거워야 한다. 과정이 힘들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삶의 목표를 세우고, 그 과정을 즐기며, 그 과정을 통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행복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며, 쉽게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자!


--------------------------------------------------------------------------------------------------

이 글은 오마이뉴스 2022년 2월 10일자(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09223)에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비들이 일출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 이유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