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서과투서'
일년 중 아무때고 수박을 먹을 수 있는 시대이다.
또한 당도를 측정하여 팔고 있는 곳이 많고, 종자개량 또한 많이 이루어져서 고르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도
달고 맛있는 수박을 먹을 수 있다.
단지 제 철이 지나며 조금 가격이 비싸질 뿐이다.
이 그림은 겸재 정선의 '서과투서'라는 그림이다. '서과'는 수박을 옛날에 부르던 이름이다. 그러니 서과투서는 '쥐가 수박을 훔치다'라는 뜻이 된다.
들쥐 두마리가 아주 귀엽다. 하지만 수박밭 주인은 속이 탈 것이다. 저렇게 힘들게 키워놓았는데, 이놈의 쥐들은 수박을 맛있게도 훔쳐먹고 있다. 한마리는 아예 수박 안에 들어가서 여유롭게 먹고 있고, 한마리는 고개를 치켜들고 망을 보는 것 같다.
수박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연산군때 수박때문에 두번 죽은 관리가 있었으니 연산군때 수박이 있었을 것이다.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이 중국으로 가는 사신에게 중국의 수박을 구해오라고 했다. 그러자 사헌부의 관리 김천령이 겁도 없이- 사실은 아주 강직한 성격으로- 연산군에게 한마디 한다. 우리나라에 수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여기까지 수박을 가져올려면 힘들고, 돈도 많이 들고 등등..그래서 안된다고 반대한다. 그 후 김천령은 젊은 나이에 죽는다. 그런데, 뒤끝 있는 연산군은 김천령의 무덤을 파서 죽은 사람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의 형벌을 내린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다 " 임금이 먹고 싶다는데, 왜 안된다고 하는가? 김천령은 목을 베고, 자식들은 노비로 삼아라"
아무리 귀한 수박이라하지만, 수박 때문에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의 가족은 노비가 되었으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여하간 이 이야기로 보아 수박은 이미 있었지만, 귀한 과일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의 수박이 얼마나 비싼 과일이었는지는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세종 때의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세종 5년에 주방 담당 내시가 수박을 훔쳐 먹었다가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을 간 일이 있다. 곤장 100대와 귀양이라니...수박도 귀한 물건이지만, 아무래도 나라와 왕실의 물건을 훔친 것에 대한 괘씸죄가 적용되었으리라. 그런데 세종 때 이 1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세종 12년에 물품을 관리하는 내시가 수박을 훔치다가 발각된 것이다. 동일하게 처벌받아야 되겠지만, 신하들이 지난번 처벌이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임금께 청해 곤장 80대를 맞게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 시절 수박1통 가격이 10만원쯤 한다는 기록이 있다. 뭐, 10만원이면 비싸긴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까지 때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때는 돈이 거의 쓰이지 않을때라 기계적으로 물가를 환산해서 그렇다. 쌀 값으로 환산하면 쌀 반가마니 즉 40kg이 된다고 한다. 쌀이 아주 귀했을 무렵 이정도 양이니 어마어마하게 비싼 것이다.
수박은 조선시기 내내 비쌌다.
그래서 수박을 재배하는 농민은 항상 권력자들의 수탈대상이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수박재배 농민의 어려움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호박 심어 토실토실 떡잎 나더니
밤새 덩굴 뻗어 사립문에 얽혔다
평생 수박을 심지 않는 까닭은
아전 놈들 트집 잡고 시비걸까 무서워서라네.
시기를 더 거슬러올라가 우리나라에 수박이 전래된 시기를 찾아보면 고려 출신이면서 몽골에 항복을 했던 홍다구였다. 그의 아버지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할 때 길 안내를 맡았던 인물이며, 홍다구는 몽골 장군이었다. 홍다구는 수박을 재배하여 큰 돈을 벌고 싶어 개성에 수박을 심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의 수박은 사막지역에서 자라는 식물로 우리나라에서 재배가 쉽지 않았고, 돈벌이는 실패로 끝났다.
1930년대까지도 수박은 비싼 과일로 일반 사람들은 잘 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구보면 지금 제 철이 지난 수박이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
곤장을 맞지 않아도 되고 그 때보다 훨씬 더 달고 맛있는 수박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