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현장에서의 연대와 안타까움
최근 주말 단기 아르바이트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파주에는 물류센터가 많은데요. 사람은 적은 데다 일자리는 많아 건강하기만 하면 벌이가 쏠쏠한 아르바이트를 제법 구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다녀온 것도 그런 물류센터 중 한 곳이었어요. 도착한 후,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과 어색한 인사를 하고 곧장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은 비교적 어렵지 않고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 처음엔 퍽 유쾌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밤을 넘어 새벽까지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마치 꿈꾸는 듯한 몽롱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요. 오늘은 그때 떠올린 생각에 대해 몇 자 적어보려 합니다.
몽롱하게, 기계처럼 반복 노동을 하면서 마치 어디선가 경험한 적 있는 장소에 와 있는 것만 같은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연신 시계를 바라보며 분주히 오가는 관리자, 소리 높여 무언가를 외치며 직원들과 아르바이트들을 독려하는 중간 관리자. 새벽 한 시, 정해진 물량을 싣고 갈 트럭들이 오기 전까지 오늘의 할당량을 모두 채워야만 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전 『복종할 자유』에 나온 ‘위임의 위계’ 원칙을 떠올렸습니다. ‘위임의 위계’는 위계적으로 구성된 체제 내에서 하급 직원들에게 전해지는 지시가 어떤 원리로 만들어지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가장 상층부, 즉 경영자나 수뇌부는 핵심적인 목표만을 내리고 모든 자율성과 책임을 하위 직원들에게 위임하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모든 방법과 수단을 자유롭게 선택하시오. 단, 목표는 저희가 정합니다’입니다. 자유라는 단어가 얼핏 좋게 보입니다. 노동 시간과 노동자의 동작을 하나하나 연구하여 최대 효율성 달성을 목표하는 테일러식 관리법에 비하면 더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자유’란 게 사실 알고 보면 더한 비인간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수단의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책임을 떠넘길 수 있고, 그로 인해 중간 관리자들은 무한의 스트레스를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죠. 이런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게 남양의 대리점 갑질 사태, 구의역 김군 사건 등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기만인데요. 하지만 우리 산업 전반에 걸쳐 이미 팽배해 있습니다. 이 사고 방식의 기원은 전후 독일 경영계의 싱크탱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일 경영학의 뿌리였던 그 사상이 지금은 잔가지를 펼쳐 여러 경영학에 스며들어 지금까지 전해졌습니다. 이런 인식은 노동자를 부품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사실 더 기분 나쁜 인식입니다. 마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적당히 속이면서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죠.
대신, 전 그곳에서 그 무지막지한 경영 논리를 이겨내는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을 보았습니다.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배려로 서로의 힘듦을 위로하는 노동자들. 정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그 행동들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관리자도, 중간 관리자도 직함이 아닌 언니라고 불렀습니다. 일반 직원들은 ‘고객 만족’이라는 단순한 비전을 하달한 상부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갖은 스트레스를 받는 중간 관리자의 고충을 진심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기에 조금 더 힘들더라도, 쉬는 시간에 조금 쉬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나서서 할당량을 채우려 했습니다. 제 생각엔 애초부터 숙련노동자가 아닌 아르바이트가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런 생각보다 당장 동료의 고충과 힘듦을 보며 연대하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저는 감탄하는 한편, 그런 연대가 어쩌면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지속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으로 조금 슬펐습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들더라고요. 우리 모두의 목을 옥죄는 것은 우리 모두인 동시에 그 거대한 압력에 저항할 수 없는 개인들의 운명이 안타까웠습니다. 이에 관한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한국 노동 환경에서 왜 자꾸만 안타까운 사망 사고가 발생하는지, 사람들은 왜 직장 스트레스로 병원을 가야만 하는지, 언젠가는 그것을 밝히는 책을 기획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