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오늘은 쏟아지는 비를 뚫고 낮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예전 직장을 다닐 때만해도 점심을 먹고 산책을 꼭 다녔었는데요. 오히려 창업을 하고 보니 산더미처럼 많은 일 때문에 산책을 자주 못 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어떤 날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산책을 하고픈 날이 있어요. 활자의 바닷속에서 오랫동안 유영하다보니 단순한 것들이 그리워졌다고나 할까요. 즐거운 물놀이도 언젠가는 지치는 순간이 오잖아요. 글이라는 상상의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지만 가끔은 진이 빠지기도 하고 멀미가 날 것 같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면 저는 비가 오든, 햇살이 뜨겁든 거리로 나가요. 풀내음과 알록달록한 꽃들이 보이고, 당장 맡을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져요.
최근엔 건강상의 문제로 사무실 출근을 못했어요. 그래서 당분간 쉬며 몸을 보살피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중 호우와 무더위로 유독 괴로운 한 주였어요. 집에서 쉬는 것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연일 안타까운 사고 소식과 한숨 나오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근심이 차곡차곡 쌓이는 듯했어요. 비가 그친 수요일 저녁부턴 조금씩 동네를 걸었습니다. 조금 걷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아, 정말 오랜만의 산책이구나’ 출퇴근길 차로 지나갔던 길가에는, 비를 흠뻑 맞은 탓인지 수풀이 어느 때보다 무성하게 자라 있었어요. 왼쪽으로는 쌩쌩 달리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빠르게 스쳐갔고 오른편 검은 수풀 속에선 풀벌레가 떠들썩하게 울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부끄럼없이 마음껏 노래 부르는 것 같았어요. 그 어둠이 무섭기보단 포근해 보였어요. 낮동안 온통 거리를 울렸을 사람들의 왁자지껄이 떠난 후, 어둠이 부드러운 융단을 풀어 풀벌레들을 다독이는 것만 같았어요.
함께 걷는 사람의 이마와 눈동자가 옅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났어요. 그날 있었던 일들을 주제로 한바탕 웃고, 한바탕 화도 냈어요. 마치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순간을 걷는 것만 같았어요. 이 순간이 소중한 걸, 훗날 돌아보아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소중한 순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혼자 걷는 길도 좋지만, 가장 아름다운 길은 같이 걷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곳을 보며 걷는다는 건 온전히 같은 시간을 산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덧) 혹, 백예린의 ‘산책’을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꼭 들어보세요. 가수 소히가 부른 원곡을 백예린이 리메이크한 곡입니다. 가사 하나하나 시처럼 아름다워요. 조금 더 관심 있으시다면 소히가 이 곡의 가사를 쓰게 된 사연도 찾아보시면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