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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티나 Oct 19. 2020

모성애의 발로(發露)

오랜만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을 꺼내 읽어보았다. 책 속의 수많은 문장 중, 내 마음을 자꾸 흔드는 한 구절이 잊히지가 않는다.


모성애가 희생 그 자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셈이다.


테레자의 엄마는 자신의 딸을 낳고 모든 것을 잃었다며 실패한 자신의 삶과 불행한 운명에 대한 책임을 딸인 테레자에게 떠넘겼다. 평생 동안 안고 가야 할 트라우마를 그녀에게 남긴 것이다.  테레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떠안은 죗값을 그렇게 치르며 살아야 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한없이 자애로운 사랑, 그것이 모성애이다. 나는 자식을 품에 안은 어머니라면, 아이를 밴 임산부라면, 여자로 태어났다면... 이 모성애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배우며 자랐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는 난임이라는 꼬리표를 받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여자가 아닌 나로 살기 위해 임신은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서 저만치 내팽개쳐놓고 살아왔었다.


한참 회사를 다닐 무렵, 직장 동료의 임신 소식에 축하의 말을 전할 때였다. 그녀는 행복감보다 걱정이 더 앞선다고 했다. 자신은 계속 일을 하고 싶은데 임신을 하고 나서도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그렇다고 했다. 그날, 그녀는 직장 상사로부터 푸념을 들어야 했다.


"요즘 같이 바쁠 때 임신을 하면 회사가 힘든데......"  


그녀는 만삭이 돼서도 회사에 나와 일을 했고 육아휴직 3개월을 다 채우지도 않고 바로 복귀했다. 나는 그녀처럼 일할 자신이 없어 회사를 다니는 동안엔 임신을 계획하지 않았었다. 나는 속으로 아이를 남에게 맡겨두고 일만 하는 그녀는 모성애가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복귀하고 몇 주가 지나 우연히 같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짧아진 자신의 앞머리를 가리키며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앞머리 잘랐어요? 예뻐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이를 출산하면서 앞머리가 모두 빠져 자라는데 시간이 걸려 걱정했었는데 겨우 자란 이 앞머리가 예쁘다니 다행이라 했다. 나는 그 순간, 그녀가 모성애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을 나무랐다.


더 이상 임신을 늦출 수 없는 늦은 나이가 돼서야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자연스럽게 나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산부인과에 가서 의사의 상담을 받던 첫날, 나는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산전 검사를 받기도 전에 나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임신하기 어려운 난임 여성이라는 진단을 먼저 받았다.


의사가 내게 던진 첫 질문은 "시험관 아기는 하실 건가요?"였다.


내 몸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는데..., 자연 임신을 시도도 안 해봤는데..., 시험관 아기를 할지 안 할지 어떻게 결정하나요?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은요'라는 짧은 대답만 했다. 그리고 연이어 안내받은 검사의 종류와 비용을 보고 다시 한 숨을 쉬었다. 예상보다 종류는 많았고 가격은 비쌌다. 임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우선 첫 발을 먼저 내디뎠던 그날, 나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앞으로의 여정이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가 없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지며 복잡한 상념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선택했던 결과는 난임이라는 숙제를 던져주었고 그 숙제를 풀기 위해서는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여성은 모성애란 이름으로 이 모든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임신한 여성에게 축복은커녕 희생을 강요했던 회사나 만혼이 흔한 시대에 임신에 대한 어려운 짐을 여성에게만 떠넘기는 사회 시스템이나 어느 것 하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주지 않는다.


나는 모성애를 희생이라 부르는 게 싫다. 당연한 것이란 얘기는 더더욱 싫다.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책 속의 그 구절처럼, 나는 희생이란 이름으로 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죄를 안고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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