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리스티나 Nov 20. 2020

가을이 지는 날에...

나는 항상 스스로를 길치라고 부른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내가 먼저 길치라 얘기하는 이유도, 나와 잠시 같이 있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므로 미리 선수 치는 거다. 나는 길 찾는 것에 무디고, 방향감각과 공간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곳에 가면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곤 한다.


길치의 특성 중 하나는 가던 길로만 다닌다는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아침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면, 나는 한강 공원에 산책하러 간다. 비타민 D가 부족하다는 의사의 진단으로 아침에 1시간씩 비타민 D 보충을 위해 자외선을 쐬러 가는 것이다. 공원을 산책할 때에도 길치의 그 특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나는 매번 같은 길로만 다녔다.


매번 같은 길로만 다니니, 매일 보는 풍경도 같을 수밖에.


길치라 하더라도 지겨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나도 그 뻔한 경치가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나도 성인인데 설마 길이라도 잃어버리겠어? 또 잃어버리면 어때? 내겐 핸드폰이 있는데... 하는 마음에 반대 방향으로 걷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방향만 바꾸면 되니깐.


새롭게 바뀐 길은 매번 다니던 뻔한 길과는 다르게, 내게 예상 밖의 큰 선물을 주었다. 풍요로운 가을의 경치와 그 경치가 만들어내는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를 턱 하니 내어주었다.




휘이이 휘이이, 바람이 부는 소리...

부스스 부스스,  바람에 갈대가 부딪히는 소리...

짹짹짹, 꺄꺄꺄, 새가 지저귀는 소리...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


새롭게 바뀐 길에서는 공원 너머 도로에서 자동차가 휑하고 지나가는 시끄러운 소리도 가을이 익는 소리에 묻혀 내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엔 인공적인 것은 존재감을 발휘할 수가 없다.


한참 감탄하며 걷던 그 길에서 나는 어떤 통증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배가 콕콕 쑤시는 복통과 가슴이 찌릿찌릿하게 아픈 가슴통이었다. 그리고 내 심장은 갑자기 세차게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임신 준비를 위해 산부인과에서 의사의 상담을 받던 첫날, 나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임신하기 어려운 난임 여성이라는 진단을 먼저 받았었다. 두 번째로 산부인과에 방문했던 날, 남편과 검사를 받았고 나는 20대의 건강한 난소 수치를 가졌지만 남편의 정상 정자수가 1%로 낮아 자연임신이 힘들다는 진단을 받았다. 산부인과 의사는 우리 부부에게 시험관 아기나 인공수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절망과 고통이 휘몰아치던 그 순간, 나는 남편에게 얘기했다. 올해가 가지 전까지만 자연 임신을 시도해보고 안되면, 의사의 권유대로 시험관 아기나 인공수정을 시도해 보자고 말이다. 근심이 가득했던 우리는 나름 서로를 위로하며 노력했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 이번이 아니면 다음 기회가 또 있다고 서로를 다독였다.


가을이 익는 소리가 그득하던 그날,  불가능하다던 자연 임신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던 찰나에 느낀 통증들 때문이었다. 바로 임신 초기에 임산부들이 느낀다는 증상들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난 오늘 다시 찾은 그 길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헐벗은 나무들로 가을이 지는 날이었다. 아름답던 가을이 익는 풍요로운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 아쉬웠다. 아쉬움에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려보니 나무의 맨살이 드러나 있는 그 길도 나름의 정취를 품고 있었다.


예전의 나처럼 같은 길만 고집했다면 느낄 수 없었던 새로움이다. 처음 방문했던 산부인과의 의사 말대로 난임이라는 말에 만일 내가 포기부터 했었더라면, 임신 4주 차라는 이 기쁜 소식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뱃속에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믿기 힘든 기적을 말이다.


누군가 규정해 놓은 길, 혹은 내가 항상 편하게 느끼는 그 길만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가을이 지는 날, 나는 새 생명의 기적에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올 추운 겨울도 삭막함이 아닌 따뜻한 행복으로 가득 차리라 믿는다. 그러면 다시 울긋불긋한 꽃들이 활짝 피는 봄이 올 것이고 내 뱃속의 생명은 세상에 나와 가을이 지는 풍경을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일주일 만에 유산이 됐어요. 처음 겪는 일이라 슬프고 아팠지만,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못했어요. 빨리 몸과 마음을 추스려야 다시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깐요. 적어도 자연임신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아프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쁩니다. 축하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성애의 발로(發露)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