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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티나 Nov 24. 2024

나는 오늘도 한 뼘 더 자랐다.

하늘이 맑고 온화한 바람이 찰랑거리던 어느 날, 나는 우리 꼬물이의 손을 꽉 잡고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벤치에 꼬물이를 먼저 앉힌 후, 나는 그 옆에 꼭 붙어 앉았다. 꼬물이가 좋아하는 고구마 말랭이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 텀블러 뚜껑을 열어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뜨거웠다.


"앗, 뜨거워."


그 말 한마디를 하며 혼자 실없이 웃었다. 내가 웃으니 우리 아기도 따라 웃는다. 오늘은 밖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한껏 들떴나 보다.


아기만 낳으면... 나는 저절로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렵게 아기를 가졌으니, 다른 엄마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듬뿍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을 달랐다. 육아는.. 아기만 있다고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고난의 연속이다.


나의 온전한 하루를 사랑하는 아기를 위해 전부 바쳐도 내 하루의 끝에 남는 건, 방전된 체력과 바닥난 마음뿐이다. 제일 억울한 건, 전업 주부로써 나의 사회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면 0원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전업 주부의 일을 업무 경력으로 쳐 주지 않는다.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이 일을 그만둘 수도 없다. 사랑하는 아기는 아직 나의 손이 필요하다.


엄마가 쥐어 준 고구마 말랭이를 맛있게 다 먹은 꼬물이가 "또!"를 외쳤다. 나는 웃으며 "오늘은 그만!" 했다. 대신 꼬물이가 좋아하는 뽀로로 보리차를 주었다. 그게 또 마음에 든 모양이다. 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웃으며 조그마한 입으로 보리차를 쪽쪽 마셨다.


우리 둘의 모습이 좋아 보였던지 어느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아기가 예쁘다며 칭찬도 해주셨다. 그러면서 첫 째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네." 하며 짧게 대답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 귀찮았다. 뒷말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니깐. 그러나 내 짧은 대답에 담긴 굳은 의미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둘 째도 얼른 낳아야지."


뒷말은 항상 곁가지를 치며 앞으로 뻗어 나온다.


"아, 하하... 글쎄요."


"아휴, 나중에 후회해. 얼른 낳아."


"하나도 힘들어서요."


"어머나, 요즘 육아가 어디 그게 육아야? 우리 때는 기저귀도 손으로 다 빨고, 집안일에 시부모님 다 모시고 살았어도 애 둘, 셋 낳아 키웠다고."


평소 같았으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아기의 손을 잡고 "얼른 집에 가자!" 했을 것이다. 들을 때마다 화가 난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데!!! 말이다.


근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할머니의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세월의 잔 주름으로 고상한 얼굴과 달리 그분의 두 손은 굵은 주름으로 투박해 보였다. 시부모님 모시며 집안일에 애를 둘, 셋이나 키웠으면... 얼마나 고단했을까? 나는 아기와 단 둘이 커피라도 마시며 여유를 잠시나마 즐길 수 있는데 이 분은 그런 시간이 있기나 했을까?


"진짜 힘드셨겠어요."


마음의 소리가 허락도 없이 툭 입 밖으로 나왔다.


"......"


"애 하나도 이렇게 힘든데... 애 둘, 셋에 시부모까지 모시며 얼마나 힘드셨어요."


할머니의 눈시울이 갑자기 빨개졌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는데, 꼬물이가 욕심내며 보리차를 마시다가 옷에 다 쏟고 말았다. 흠뻑 젖은 아기의 옷을 보고 벌떡 일어나 아기를 안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얼른 꼬물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기저귀도 갈아주었다. 그리고 잠시 그 할머니를 생각했다. 그동안 많은 어르신들이 내게 비슷한 말을 하곤 하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아기를 낳을 생각도 안 하나..."부터 시작해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해주고 밥은 밥솥이 다 해주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다는지.." 등등 내 오장육부를 뒤트는 소리들을 말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속이 부글부글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마치 "나도 힘들었어. 그래도 다 이겨내며 살았지.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 고단한 육아에 대한 대가가 0원이듯 그분들도 그랬으리라. 누구 하나 "고맙다. 오늘도 고생했다."란 말은 하지 않았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육아 때문에 힘들 때마다 엄만 항상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너희 키울 때도 다 그랬어." 그 말을 들을 때면, 엄마가 힘든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섭섭하기만 했는데.. 이 말을 했을 때 엄마의 얼굴 표정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도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오빠와 나 그리고 여동생까지 셋을 키워낸 우리 엄마!!


우리 엄마도 나처럼 육아가 힘들었다는 걸 오늘에야 깨달았다.


육아는 부모와 자식 모두를 성장시킨다.


나는 오늘도 한 뼘 더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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