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본 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닥쳤던 IMF 불행이 우리 가족을 빗겨가진 않았다. 호기롭게 시작한 아버지의 사업이 IMF와 맞물려 그 도전은 마이너스라는 기호가 빼곡히 적힌 청구서로 돌아왔다. 빨간딱지와 빚쟁이의 서성거림. 고작 10살이었지만 볼 수 있었다. 가난이란 형상이 무엇인지. 이사를 할 때마다 집은 좁아졌고 가구는 줄어들었다. 유일하게 늘어났던 건 아버지의 초록색 소주병뿐.
양귀자 작가는 소설 '모순'에서 가난을 이렇게 표현한다.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내게 주어진 가난이 소설에서 표현한 '절박한 포즈밖에 허락하지 않는 가혹한 가난'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납빛 하늘 아래 겨우 아가미만 들썩거렸던 것 같은 날들을 통과해 와서인지, 저 한 문장이 내겐 '모순'을 대표하는 문장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런데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가난을 맛본 사람은 엉거주춤 서있기밖에 못한단 말인가. 브이도 못하고 만세도 못하고 화들짝 웃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반항심이 어렸을 적부터 마음 한 켠에 싹트고 있었다.
가난이라는 터널을 지나왔다. 거리표시도 없고 반환점도 없어 언제 출구가 나타날지 모를 깜깜한 터널을. 그새 나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취업을 했다. 또 그새 서른이 되었고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다. 지금은 무용한 낭만에 젖어 여유의 홍수 속에서 유영하고 있다. 와인을 마시며 영화 한 편을 보고 감상을 글로 옮기는 따위의. 그런 하루들을 켜켜이 쌓아가고 있다. 매우 느긋이.
인생은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있다. 일생을 절박한 포즈만 짓고 있을 순 없다. 사람은 가진 것 없이 태어났어도 하고 싶은 건 많은 존재이지 않을까. '네 분수를 알라'는 말이 있지만 그 분수에 스스로 제약되어 버리면 가난한 사람은 평생 절박한 포즈만 취해야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속 한 문장이 떠오른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아."
가진 것 없이 시작했을지라도 가진 것이 없어서 끌려다니기만 하면 안된다. 그 과정에서 현실에 다소 파괴될지언정 결코 패배하지 않겠다는 다소 만용적인 생각이 터널 끝을 빠져나온 나의 결론. 하루 만에 부를 움켜쥘 순 없다. 하지만 하루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고 하루 만에 제철음식을 잔뜩 맛볼 수 있다. 그런 하루가 켜켜이 쌓여 사람은 풍성해진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 힘껏 두 손가락으로 브이를 내보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서정주 시인은 시 '자화상'에서 '스물 세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했다. 그를 키운 거센 바람과 다르게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따뜻하고 고유한 나의 작은 일상. 그 작은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 다워질 수 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부산과 가까운 거제도에 다녀왔다.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대구회 요리를 먹기 위해서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께 했다. 날짜를 조율하다 보니 정말 어쩌다 크리스마스에 모이게 됐다. 거제 외포항쪽 대구 식당들로 늘어선 거리에서 지인이 추천한 식당에 들어갔다. 생대구회와 생대구튀김 그리고 생대구탕까지 차례대로 나오는 인당 4만 원 짜리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이때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생각하니 더 특별해지고 소중해지는 마음. 생대구회는 두툼하면서 식감이 다소 물렀고, 생대구튀김은 별미였으며, 생대구탕은 맑고 얼큰했다. 사실 이 요리들을 못 먹을 뻔 햇다. 전날 크리스마스 이브에 남자들끼리 모인 남자 홈파티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신 터라 '내일의 나'에게 자신이 없었다. 혹시 몰라 내일의 주최자분께 장문의 카톡까지 남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무조건 갈 건데 혹시 제가 응답이 없다면 저를 버리고 가셔도 됩니다..."
다행히 1분 간격으로 맞춰놓은 알람 덕에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대구 요리를 다 먹은 지금,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든다. 한 해의 끝자락에 다행스럽게도 겨울의 맛을 보았구나.
배가 불러오고 속이 따뜻해지니 술이 깸과 동시에 걷고 싶어졌다. 식당에서 나와 외포항 주변을 걸었다. 생대구회 식당들로 늘어선 거리에는 팔뚝의 족히 3배 정도 되는 대구들이 집단으로 건조되고 있었다. 햇빛을 품은 바다는 윤슬로 반짝였다. 바다를 타고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귀가 빨개지고 아려서 손으로 귀를 감싸며 걸었다. 겨울에만 느껴볼 수 있는 고유한 정취. 별 것 아니지만 이런 것들로 삶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인생은 전생애를 걸고서라도 탐구해야 하는 무언가다. 하루가 챗바퀴처럼 똑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조금씩 조금씩 '겨울'에서 '봄'으로, '대한'에서 '입춘'으로, '생대구회'에서' 미나리'로, '캐럴'에서 '벚꽃엔딩'으로, '러브레터'에서 '봄날은 간다'로 시계추가 옮겨간다. 그리고 지금도 새로운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오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을 읽고, 내일은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을 테다. 오늘은 보드게임 동아리 사람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내일은 대학교 후배들과 술 한잔 기울일 것이다. 언젠간 한라산의 설경을 그리고 언젠간 지리산의 단풍을 눈에 품을 테다. 그러다가 손흥민의 찰칵 세리머니처럼, 나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생기겠지. 앞으로의 이야기들은 그 행간을 채워나가는, 가진 건 없어도 하고 싶은 건 많은, 결코 인생에 패배하기 싫은 나의 기록과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