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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Nov 15. 2021

가을, 경주 기행(上)

불국사

11월, 빠알간 가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붉고 노란 단풍이 바스락 밟히며 낙엽으로 죽어가는, 이 가을의 끝이 못내 아쉬워 대학 친구들에게 여행을 가자고 말했다. 산을 가리는 건물이 없고 자연경관이 도시에 고유하게 스며든 경주가 문득 떠올랐다. 수학여행 때 샛 병아리처럼 선생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다녀왔던 경주. 여자 친구와 놀이공원이 가고 싶어질 때면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경주. 신라의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천년고도의 경주. 코 닿을 듯 가깝지만 선뜻 가지 못했던 경주. 우리는 가을이 저물기 전 경주로 떠났다.


출발 전날 비가 참아왔던 울음을 꺼이꺼이 토해내듯 한동안 세차게 퍼부었다.

알록달록 단풍 옷을 입은 나무가 홀딱 벗겨지면 어떡하지. 먹구름이 내일까지 하늘 위에서 알짱거리면 어떡하지. 전날 당직근무를 서야 했지만 근무의 피곤함보다도 내일의 여행이 걱정됐다. 다행히 여행 당일 떠오른 아침 해는 무척 밝았고 풀이 죽어 있던 나의 마음도 활짝 갰다. 당직근무가 끝나자마자 이틀의 휴가를 내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편하게 입을 옷 한 벌과 세안 도구를 가방에 넣고 추억을 오래도록 저장할 카메라를 챙겼다. "햄 어디야?" 친구의 전화가 왔다. 집 밖으로 나서니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는 승용차 한 대가 나를 반겨주었다. 센스 있게 커피도 준비해놓다니. 우리는 이 차를 타고 경주에서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고 오겠지.


부산에서 경주로 향하는 길, 울산에서 친구 한 명을 더 태웠다.

삼십 대 갓 아저씨 넷, 훗날 우리들의 대화 속에서 오늘의 여행을 새 안줏거리로 삼을 수 있겠지. 이번 여행의 컨셉은 고즈넉한 문화기행이다. 경주 모든 길바닥에 발자국을 남기기보단 조용하고 자연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몇 군데만 저벅저벅 걷고 올 테다. 달리는 차 안, 서로의 이야기들로 지루할 틈 없이 어느새 경주에 도착했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불국사다. 여행은 자고로 먹고 보고 찍는 게 전부 아니겠는가. 금강산도 식후경인 법. 불국사 가는 길  도로에 자리한 떡갈비 정식집에 들렀다. 주문한 지 3분도 채 안되어 떡갈비 정식이 식탁 위로 올라왔다. 오뚜기 카레보다 빠르다니. 밥 한 공기와 떡갈비로 배를 채우니 왠지 모를 에너지가 샘솟았다.

불국사 인근 떡갈비집

11월의 불국사

가을의 불국사는 화려하면서도 숙연했다.

노란 빨간 초록의 잎들은 가을의 생기를 내주었고, 절과 불상은 들뜬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불국사 곳곳이 인스타존(사진찍기 좋은)이어서 친구들에게 몇 차례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얘들아 잠깐만, 여기서 사진하나만"

10년 동안 봐온 친구들인지 나에 대해 훤히 파악하고 있으므로 불평불만 없이 셔터를 누른다.

따로 챙겨 온 하이엔드 카메라 말고 휴대폰 카메라로도 한번 더 찰칵. 일단 많이 찍어야 한 장이라도 건질 수 있으므로. 나는 질보다 양을 믿는 편이다. 혼자만 찍기 아쉬워 우리처럼 여행온 듯한 여대생 무리에게 단체사진을 부탁했다.

"저.. 죄송한데 사진 하나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인스타를 좀 해본 듯한 그녀들은 우리에게 각각의 포즈를 요구하며 열심히 찍어주었다. 남자들은 쑥스러움이 많은 터라 취할 수 있는 포즈라곤 고작 손하트 아니면 어깨동무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였다.

"저희도 한 장 찍어주시겠어요?"

그녀들의 아이폰을 건네받았다. 사진은 역시 아이폰이 잘 나오는구나. 한 장으로 그치지 않고 무릎도 굽혀가며 화면에 그녀들의 예쁜 모습을 잔뜩 담아내려 했다. 훗날 그녀들에게도 오늘의 사진이 추억거리가 될 수 있겠지.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나서야 서로가 만족한 채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알록달록한 단풍들, 맑은 공기, 산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사진으로 이어진 사람들과의 추억. 해가 저물어가고 날씨는 제법 추워지고 있었지만 왠지 그날은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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