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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Nov 24. 2021

가을, 경주기행(下)

교촌마을,첨성대,월정교,한옥숙소

불국사의 가을 정취를 뒤로 한 채 교촌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드반 허니반 치킨으로 유명한 마을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고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로 유명한 최부자 가문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다. 마을은 한옥 형식으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의 흙바닥 길을 따라 활짝 열려 있는 대문들과 그 안으로 발을 들이는 관광객들로 거리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산이 서 있고 강이 흐르고 자연이 허락한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한옥들과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

교촌마을

코로나가 세계를 덮치고 나서 닫혀 버린 공항 게이트만 줄곧 생각했다. 오로지 한국이 아닌, 한국과는 다른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일단 한국만 아니면 돼. 그런데 이질감 없는 한국의 경주에서 되려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질서한 높낮이로 배열된 건물들 사이로 치열하게 부대끼며 지나가는 자가용과 기다란 버스, 그 틈을 노리는 바퀴 두 개의 오토바이,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을 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쉴 새 없이 흐르는 혼잡한 시간. 우리들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현대라는 공간 속에서 바삐 무질서하게 살아오고 있었다. 산이 커 보이고 집이 작아 보이는 경주. 앞과 아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옆과 위까지도 천천히 고개 돌리게 만드는 경주. 나무들과 하늘, 산새의 지저귐 그리고 역사의 주름이 고스란히 파인 경주. 경주의 고즈넉함은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이질적이었다. 제주도와는 또 다른 우리의 고유한, 그래서 더 이질적일 수 있는 정취와 향기가 밴 곳이었다. 마치 묵힌 때를 쓰싹쓰싹 벗겨내듯 복잡하게 얼룩진 마음이 하얘지는 곳이었다. 직장 쓰싹, 연애 쓰싹, 결혼 쓰싹, 내 집 쓰싹. 옛 선조들이 배산임수를 강조한 이유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람은 자연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섞여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교촌마을을 찬찬히 둘러본 뒤 근처에 자리한 아치형 입구에 해골 머리가 얹어진 '사바하'란 카페에 들렀다. '사바하'라는 영화를 본 적은 있는데 한옥 마을에 웬 '사바하'란 말인가. 혹시 이정재 님이 카페 사장? 예상과는 달리 내부는 여느 카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과는 달리 조용하고 아늑한 카페였다. 때마침 비어있는 창가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켰다. 손과 발이 시리고 추워지는 듯하여 따뜻한 라떼를 먹고 싶었다. 친구들은 차가운 것이 최고라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아이스에서 핫으로 넘어가면 삼십대라던데 나만 나이를 먹는 건가 싶기도 했다. 투명한 통유리창 너머로 소담한 나무 한그루와 담벼락 너머 월정교가 보였다. 여기서 조금의 휴식을 취하고선 월정교로 가서 사진을 찍을 계획이다. 조금만 더 어둑해지길 기다리면서. 월정교가 어둠 속 도드라지는 순간이 오길 기대하면서. 그것을 배경 삼아 찰나의 주인공이 되길 그려보면서. 하지만 해와 달이 교대하기까지는 두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사바하 카페
가을날 라떼 한잔

"야 여기서 시간을 계속 보낼래 아니면 숙소 가서 잠깐 쉬다가 다시 올래?"

"음 숙소 가서 쉬면은 퍼지지 않겠나? 그냥 여기서 시간 좀 때우다가 주변이나 걷는 건 어때?"

"그래 그러면 뭐 우리 카페에서 여유롭게 있다가 나중에 여기 위에 첨성대까지 슬 걸어서 갔다 오자."

여유로이 남은 시간에 추억 자국 하나 더 남겨야 한다는 중압감. 여행을 주도하여 계획한 사람은 그런 중압감에 놓이곤 한다. 나만의 시간이 아니기에 이들의 시간이 엮여 있기에 의미 있게 채워주고 싶다는 욕심. 욕심이 의무처럼  승되면 여행은 숙제처럼 되어버린다. 오랜 지기와의 여행은 욕심은 있되 욕심에 그쳐서 좋다. 그저 이 지루한 여백을 여유라는 사치로 포장할 수 있어서 좋다. 우리는 여전히 별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도 다시 이어지는 말소리도 기름칠 듬뿍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해가 점점 서녘으로 지고 있었다.

다시 걸을 만큼의 동력을 얻었다. 활처럼 허리를 구부리며 기지개를 한껏 켜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아까보다 더 쌀쌀해졌군. 우리 모두 자연스레 외투 양옆 주머니 안에 손을 푹 넣고 걸었다. 30분 정도 걸으면 첨성대와 핑크뮬리 일대가 나온다. 목적지를 찍고 그저 걸었다. 걸어가는 내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어떤 말을 한 것 같은데 너무나 쓸데없는 말이어서 기억에 남길 필요조차 없는 말들이었나 보다. 그러나 그런 쓸데없는 말들 덕분에 우리는 즐거울 수 있었다. 오히려 저장할 필요가 없는 말들이여 좋았다. 무엇이든 저장될수록 무거워지는 법이니까. 첨성대는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 한눈에 띈다. 9m가량의 높이라 올려다보게 된다. 둥글게 둘러싼 아주 낮은 울타리 안 정중앙에 자리 잡고선 우뚝 솟아있다. 울타리를 따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본다. 해질녘 첨성대를 사선에 두고 바라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찬란했다. 그 시간들이 행복해서였을까. 풍경이 아름다워서였을까.

해질녘 첨성대
핑크뮬리

해질녘에 맞춰 다시 월정교로 걸음을 옮겼다.

별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어둠이 자욱했고 인공의 조명들이 길을 밝혀주었다. 월정교는 이미 빛나고 있었다. 둑길을 따라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젊은 부부와 작은 여드름들이 갓 올라오기 시작한 청소년들과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외지인이 분명한 사람들과 우리가 있었다. 강과 월정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밖에 없다. 정면, 측면 몇 차례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오늘도 여행의 스탬프는 웬만 찍은 셈이다.

월정교

꾸르륵 꾸르륵. 점심때 먹은 떡갈비 정식이 소화된 소리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돌아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경주에 오면 경주에 고유한 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지만 무한리필이 되는 돼지 양념 갈빗집으로 향했다. 오전 오후 고생했으니 고기로 배를 채워주는 게 제일이라나. 돼지 양념갈비를 생각하니 시원한 맥주로 얼른 목을 축이고 싶었다. 식당에 도착해 주문을 하고 시원한 생맥주 한잔을 시켰다. 고기가 다 익기도 전에 벌컥벌컥 마시는 맥주가 따끔하면서도 무척이나 달았다. 한 점 두 점 집어 먹다 보니 배가 제법 볼록해졌다. 이 볼록함의 주머니에는 오늘의 고기와 경주의 풍경과 우리들의 대화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복주머니 같은 배를 앞으로 내밀며 식당을 나서 숙소로 향했다.

돼지갈비와 생맥주

숙소로 가는 길, 간단한 안줏거리를 샀다. 맥주 몇 캔과 편하게 집어먹을 수 있는 과자면 충분하다. 숙소는 한옥 형태의 주택으로 에어비앤비를 통해 싸게 예매했다. 남정네들끼리 가는데 호화스러운 숙소는 글쎄...숙소 대문을 활짝 여니 아담한 마당이 있고 본채와 별채가 기역자로 나뉘어 있었다. 창호지 문을 보니 옛 정겨움이 한껏 풍겼다. 어느 옛 할머니가 호랑이가 잡으러 온다고 손주들을 당신의 무릎에 앉히곤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줬을 것만 같다. 얼른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간단히 상을 차렸다. 고생했다며 한 잔 옛 추억에 한 잔 요즘 저마다의 고충에 한 잔. 스럼없이 함께 취해가는 달밤의 그 시간들이 무척이나 그리웠고 정겨웠다. 밤은 한창 더 무르익었고 자정이 조금 지나자 적당한 아쉬움을 남긴 채 잠자리에 들었다. 포근한 이불보에 몸을 누인 채 하얀 이불을 끌어안았다. 아주 조금씩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오늘 하루의 여정이  마침표를 찍었다.

고즈넉한 한옥 숙소
간단한 주전부리

다음날 일찍 일어나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커피 한잔을 마신 채 경주를 떠났다. 1박 2일의 일정에서 2일의 일정을 가득 채우기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나이가 되고 있다. 부산에 도착해 한 명씩 각자의 집으로 향하면서 우리 모두 똑같은 말들을 남겼다.

"조심히 들어가고 푹쉬자."

"다음에 또 보자."

'다음에 또'라는 말이 주는 안정감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의 인연은 다음에도 예약된 거다. 그때까지 내 삶을 열심히 살아야지. 힘들 땐 가끔 이번 여행을 떠 올려야지. 다시 힘을 내 열심히 살아가자, 다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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