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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Jan 14. 2022

가리워진 길

째깍째깍 1월 1일이 내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올해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후회와 다가올 새해의 출발점에서 기다리는 소망이 포개진다. 이렇게 또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구나. 후회와 소망, 흑과 백이 뒤섞인 회색깔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새해가 되면 늘 몇 가지의 목표를 세우지만 작심삼일로 그치는 것이 대다수다. 그런 시행착오를 반복해오면서 깨닫게 된 점은 범인(凡人)일수록 목표는 소박하고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해엔 어떤 방향으로 삶을 나아가면 좋을까. 그때였다. 카톡 카톡.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후배 녀석에게 모처럼 연락이 왔다. 잘 지내시냐고.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고기를 사주겠노라 약속을 하게 되었다. 똑같은 수험생활을 거친 나로서는 그 고충을 알기에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몇 장의 만원은 아깝지 않았다. 되려 나라는 존재를 잊지 않고 찾아주었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마침 금요일이었으므로 마음 편히 소주 한잔 기울일 수 있었다. 경성대 역 번화가를 지나갈 때면 유달리 고깃 냄새가 노릿노릿 풍겨오는 가게가 있었는데 그곳이 떠올랐다.

"거기 삼겹살 집 어때? 그래 그럼 7시쯤 거기 앞에서 바로 보자."


18시가 되자 짐을 챙기고 직원들 간 새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지하철에 무거운 몸을 싣고 두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면 유재하의 노래를 찾아 듣곤 한다. 방황하는 개인의 마음에 대해 어찌 이처럼 서정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

- 가리워진 길-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싸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가물거리는 내 길은 언제쯤 찾을 수 있는 걸까. 내년에는 발견할 수 있는 걸까. 지하철의 백색소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유재하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내 삶을 투영하게 된다. 그런데 유재하의 목소리에는 축 처지는 우울함이 배어 있지 않다. 왠지 헤쳐 나갈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노래가 끝날 때쯤이면 힘을 얻게 되는 마력이 있다. 내년에는 가리워진 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


1집 앨범을 다 들을 때쯤 다음 역이 경성대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한 해의 끝자락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운 듯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집어넣은 후배 녀석이 보였다.

"오랜만이네. 춥지 어서 들어가자."

어차피 내가 사는 거니까 푸짐하게 먹을 만큼의 삼겹살을 주문한 뒤 안부인사를 이어 나갔다.

"요새 공부는 좀 어때?"

"잘 안되죠 뭐. 그래도 해야 하는 거니까."

"그래 오늘 고기나 실컷 먹자."

제법 두툼한 삼겹살을 불판 중앙에 올려놓고 마늘과 김치를 구석 자리에 올렸다. 치익치익. 선홍 빛의 고기가 불에 그을려 익어 가고 소주잔은 계속 채워지고 있었다. 올해도 지난날의 과거로 남겨지고 있었다.


내일이면 새해다. 새해 소망이 뭐냐고 물었다.

"합격이요. 형은 뭐예요?"

"나는 무척 많아. 그런데 소원은 많을수록 이루어지지 않더라. 요술램프 지니도 세 가지 소원만 들어주잖아. 그래서 딱 세 가지로 줄였는데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건강이야. 그래서 운동을 꾸준히 했으면 해. 글쓰기도 게으름 부리지 않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따뜻한 사랑을 하고 싶다. 뜨거워도 차가워도 손을 데기 마련이야. 너도 나도 곁에서 계속 머무르고 싶은 온기 가득한 사랑이 피워지길."

새해 소망을 입 밖으로 꺼내면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아 사라지지 않는 약속이 되길 바랬다. 이제는 함부로 지울 수 없는 약속. 그래서 서로 새해 소망을 빌었냐고 무어냐고 인사치레처럼 묻고 다니는 것 아닐까. 서로의 지울 수 없는 약속으로 만들기 위해.


더부룩해진 배를 부여잡고 새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나누며 후배와 헤어졌다. 취기를 빌려 곧바로 잠에 들었고 새해의 일출은 보지 않았다. 떠오르는 해를 본다고 뭐든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알기에 운동화를 신고 모자를 눌러쓴 채 운동장으로 향했다. 올해의 소망은 결과로 만들고 말아야지. 두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가리워진 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가리워진 길-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새해의 시작, 나는 뛰었다. 뛰면 알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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