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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혁 Apr 13. 2024

구례, 그리 쉽지는 않겠지 ③

혼밤, 혼술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


숙소 호스트가 준비해 놓은 일본 만화 <원펀맨> 시리즈를 거의 다 읽어갈 때쯤, 문 밖에서 들리는 덜컹 소리에 밖을 내다봤다. 잠깐 담벼락을 스치듯 들린 바람이 양철문에 인사를 하고 간 모양이다. 그제야 알게 됐다. 해가 지고 있다. 이제 그만 뒹굴거림을 멈추라는 바람의 신호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지난 글: 구례, 그리 쉽지는 않겠지 ② (brunch.co.kr))


구례에 오면서 몇 가지 하고픈 일들을 적어봤었다. 아이폰 메모 어플을 켜 보니 ▲아무것도 안 하기 ▲아무 생각 안 하기 ▲밥은 대충 때우기 등이 쓰여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적어놓은 항목(▲로 치부된 것들)은 어쩌면 홀로 촌캉스에선 해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일단,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당장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부터, 벌레가 생각보다 많으면 어떻게 대처할지, 내일은 무엇을 해 볼지 등 주변 온갖 것들이 생각과 선택, 결정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그렇다고 생각만 할 수 있나. 이 중 일부를 행동으로 옮기다 보면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참 재밌다.


잠시 메모 어플을 꺼두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고, 솔직히 이왕 구례까지 온 거 아무거나 먹기도 싫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근처 지역 농협 마트로 걸음을 옮겼다. 막상 혼자 저녁을 먹으려니, 생각보다 저녁 메뉴와 양을 맞추기도 어려웠던 것 같다. 포 뜬 회를 사 오자니 다 못 먹을 것 같기도 하고, 회에는 또 소주 아닌가. 그런데 혼자 소주를 청승맞게 홀짝 마시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집어든 회를 살포시 내려놓게 됐다. 반대로 구이류를 사 오자니 불판부터 번개탄 등 부가적인 것들을 사기엔 조금 부담스러웠다. (저녁보다도 불멍을 포기하긴 싫어 장작도 구매하려니 더욱 깐깐한 소비자였을 수도. 아, 참. 하필 또 장작을 10kg 이상으로 팔아서 차를 가져올 걸 후회도 하던 순간이었다.)


결국 저녁 메뉴는 '닭갈비'로 결정했다. 냉장육 코너를 돌고 있는데 '[할인!] 두 팩 12,000원'이라고 적혀있는 홍보 문구 때문에 산 건 절대 아니다. 가격도 적절했고, 부담스럽지도 않은 양에 그냥 프라이 팬에 기름 조금 두르고 볶아 먹으면 그만인 메뉴이기에 선택했다. 대신 살짝 아쉬운 마음이 있어 '직장인 플렉스' 차원에서 파인애플과 블랙 앤 화이트(black & white) 혼성주를 샀다. 닭갈비를 후딱 해치우고 불멍을 하며 감성 있게 한 잔 적실 심산이었다.


누군가 '제 점수는요'라고 묻는다면 만점을 주고 싶을 정도의 만족도였다. 3월 중순인지라 아직은 밤에 불어오는 바람이 다소 찬 감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장작을 살 땐 몰랐으나, 기본 양을 10kg 이상으로 파는 이유도 알게 됐다. 생각보다 장작이 빨리 타 들어가기도 했고 불멍을 고작 30분 정도만 즐기려고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적지 않은 양의 장작이 필요했다.


혼자 불멍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어떤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이로써 세모(▲) 친구들을 꼭 만나겠다는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어떤 생각부터 들었는지 그 순서는 잘 모르겠지만, 기억나는 대로 주욱 써 보겠다. 먼저, 꽤 오랫동안 '혼자만의 삶'에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로 따지면 벌써 3년간의 공백기가 흘러가고 있다. 뭐, 필자에게 어떤 하자가 있어 연인을 못 찾았을 수도 있다. (갑자기 슬퍼졌다.) 이런 생물학적인(?) 이유를 차치하고 '왜 나는 그동안 혼자였을까'를 돌이켜봤던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나름 야망 있는 사회초년생이었기에 일을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고, 제대로 배우고도 싶었다. 학벌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작은 콤플렉스도 한몫했을까. 어느 래퍼의 가사처럼 당신이 잘 때 난 열심히 움직여서 남부럽지 않은 직장으로 쭉쭉 나아가고 싶었다. 때마침 코로나라는 일상에서의 큰 제약도 있어 왜 연애를 하지 않냐는 말에 허울 좋은 핑계를 대기도 했다. 또, 당시 워라밸이 파괴된 기자 생활에 연애 생각은커녕, 연애를 하게 된다면 여자친구는 무슨 죄인가! 하면서 애써 생각을 접어두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생각과 시간들이 흘러다가 보니, 자연스레 혼자만의 삶에 익숙해졌고 또 즐기게 됐다.


그동안 생각보다 좋은 순간들을 기억에 남겼다.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고, 회사 동료들과 대학생 때처럼 철없이 놀기도 했다. 회사 업무와 인간관계에 부딪히고 부서져도 봤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나날이었다. 앞으로 이 생활이 더 이어질지, 그만두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구례에서의 과거 여행도 역시 훌륭했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고 나니, 반대급부로 펼쳐질 날들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정말 답도 없고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그래봤자 지금의 시야에서는 5년 정도 앞의 인생을 내다보는 정도일 테다. 연애나 결혼은 필자의 마음 내키는 대로 해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과감히 제외했다. 그렇게 되니 크게 '커리어적인 부분'과 '최종 꿈'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볼 수 있었다.


커리어로 따지면 현재 머물고 있는 '홍보'와 '기업문화' 분야에서 차근차근 성과를 쌓아가는 것이 목표다. 특히 이쪽 바닥은 '남이 하지 않은 프로젝트', '선봉장에 설 수 있는 혁신적인 프로젝트'가 큰 무기가 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누군가 벤치마킹할 법한 독창적인 프로젝트를 하나 정돈 해보고 싶은 단기적인 목표가 있다. 더 훗날엔 아직 완벽하게 정립되지 않은 기업문화라는 분야에서 전문가로 나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최종 꿈이라. 아주 멀지만 또 아주 멀기에 막 생각해 볼 수도 있어서 재밌는 부분인 것 같다. 사실 성격이 계획적인 쪽에 가까운 터라, 이러한 고민을 아예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1순위 꿈은 조금 뻔하지만 '좋은 남편'이다. 사실 꽤 오랫동안 '좋은 아빠'가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세상을 살다 보니 자식도 물론 소중하지만, 그 옆에서 필자가 어떤 일을 맞닥뜨리더라도 서로 응원하고 의지하는 아내라는 존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이후로, 좋은 아빠보단 그전에 먼저 좋은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가슴에 새겨오고 있다.


하나 더 있다. 죽기 전에 내 이름으로 낸 드라마 각본을 쓰고 죽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종종 하는 이야기인데, 세상과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전에 멋진 작품을 하나 쓰고 후회 없이 봇짐을 챙기고 싶다. 장르까진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그때까지 살아본 인생을 관통하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살아보니 이랬다 저랬다 하는, 그때의 젊은이들에게는 절대 와닿지 않을 잔소리 같은 메시지 말이다.


시골집과 불멍… 구례에서의 혼밤, 생각보다 로맨틱했다.

열심히 자신을 태운 장작이 이제는 조금 천천히 타닥-탁 소리를 내며 허연 자태를 드러낸 11시의 밤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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