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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혁 Jun 06. 2024

구례, 그리 쉽지는 않겠지 ④

어딜 가볼까? 그냥 터벅터벅 발길 닿는 대로

푹신한 매트리스 대신 투박한 시골집 방바닥과의 밤샘 조우 때문일까. 편하게 잠을 잤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눈을 떴을 때 귓가를 스치는 소리에는 확실히 차이점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 옆, 큰 도로를 달리는 무수한 차 소음 대신 짹짹 아침을 깨우는 새들의 수다 덕분에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 누군가 귀에 직접 '일어나!' 소리치며 강제로 잠을 깨웠다기 보단 잠들어 있는 나를 보면서 '야, 구례까지 왔는데 저 친구 저러다 오후까지 자는 거 아니야?' 하며 필자의 촌캉스 일정을 걱정하듯 떠드는 새들의 수다에 눈을 떴다.


대(大) 자로 뻗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필자는 몸을 뒤집어 머리맡 핸드폰을 찾았다.

'음, 이제 뭐 하지?'


역시 네이버 만한 게 없다. 뻔하지만 검색창에 '구례 가볼 만한 곳'을 검색했다. 역시나 무수히 나오는 맛집과 카페, 그리고 명소들이 있었다. 촌캉스가 무어랴. 결국 내가 행복하고 편하게 쉬면 그만이다! 무언가 꼼꼼히 알아보는 등 계획을 세워서 나가야겠다는 생각 따위, 잠시 미뤄두고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세상만사가 편해졌다. 가다가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고, 갈증이 난다면 카페에 들르는 것이다. 어딘가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면 느린 내 걸음에 맞춰 시간도 느리게 맞추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필자의 발이 향한 곳은 바로 '화엄사'였다.


화엄사는 너무나도 유명한 사찰이자 관광 명소이다. 특히 이맘때(3월 봄)는 꽃구경을 오는 전국의 어르신들과, 템플스테이를 체험해 보려는 이들, 그리고 가족 단위와 데이트하는 연인들로 '봄'비는 곳이다. 다만 아쉽게도,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필자처럼 혼자 온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울음)


친구들 사이에서든 회사에서든 걸음이 느리다고 평이 나있는 필자다. 대부분의 나날을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헉헉 걸음을 맞추려는 노력을 쏟아내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터벅터벅-. 아니, 터-벅 터-벅이 맞을 테다. 아주 느리게 화엄사로 올라가는 길에 섰다.


올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이곳은 붉은 매화(홍매)가 유명하다고 한다. 보통 매화라고 하면 하얀 꽃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곳 화엄사의 붉은 매화는 봄의 시작을 알리듯, 화려하다 못해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의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붉은 매화나무 아래로 적색과 녹색이 섞여있는 웅장한 누각과, 부처님을 맞이하는 형형색색의 등불들, 그리고 그 아래의 북적이는 관광객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세상의 모든 색(色)이 섞이지 않은 채 '봄이니까 나를 봐주세요!'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발길을 돌리고 지리산 노고단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지리산 노고단은 화엄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지리산 등산 코스 중 하나다. 소위 '등린이' 코스로 유명하다고 전해지는데, 등린이 축에도 끼지 못하는 기름진 아저씨는 마냥 웃을 순 없었다. 입장료는 없었으나, 주차비가 있었던 것 같다. 노고단 코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차를 몰고 올라가 주차했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보자는 심산이었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는데, 웬 걸 말 그대로 절경이 펼쳐졌다.


이게 아직 등산을 시작하지도 않은 초입이라니. 지리산의 웅장함에 압도당했다. 결코 쉽지 않으리라 수없이 되뇌었지만, 생각보다 더욱 첫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느림보의 지리산 '찍먹' 등산이 시작됐다. 아직 이른 봄철인지라, 새순이 곳곳에서 돋아나고 있는 연두색 푸른 느낌은 아니었지만, 추운 겨울이 머문 얼어붙은 자리가 처벅처벅 녹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봄을 맞이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산을 도대체 왜 오르려고 할까 회의적으로 생각하던 필자였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무색할 만큼 노고단 정상의 풍경은 굉장했다. 굽이 굽이 이어져 있는 산맥은 도대체 끝이 어딜지 모를 정도로 뻗어 있었고, 청량한 공기가 코를 뻥 뚫어줬고 춥게 느껴질 정도의 바람이 계속 뺨을 스쳤다. 팔뚝만 한 까마귀가 혼자 온 필자를 반갑게 맞이했고, 각각의 앙상한 나무를 봤을 땐 몰랐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니 옅은 초록의 기운이 올라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큰 존재가 잉태하기 전 설레는 발차기를 휘적휘적하는 것만 같았다.



화엄사-노고단 일정을 '발길 닿는 대로' 다녀오니 꼬르륵 배가 고팠다. 내려오는 길 역시 네이버에 물었다.

또 또 뻔하게 '근처 맛집'을 검색하니, 바로 근방에 어느 양식집이 나왔다. 응? 이 시골에 파스타를 파는 곳이 있다고?


무언가에 홀린 듯, 아니 호기심이 생긴 듯 발걸음을 옮겼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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