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너무 떨어진다면서, 소설을 많이 읽혀야 한다는 의견을 듣고 나서
우리 사회에서는 대체로 자본주의를 내면화한다. 또 그것을 기본에 두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기본 가치처럼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앞서가는 것만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대놓고 이것을 찬양하고 획일적으로 오로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절대적인 미덕으로 여기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런 분위기에서 독자도 결국엔 그러한 생각을 반영하는 존재이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소설을 읽더라도 자신의 편견이나 확증편향에 따라 텍스트를 해석하게 된다. 그러면 작품의 깊이나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게 되는데, 결국 독서에서 저자의 숨겨진 의도를 간과하거나 더 폭넓은 의미를 곱씹지 못하고 자기 수준 안에서 모든 독서를 끝내버리고 만다. 원래 어린 아이들도 그러기 마련인데, 어른들이 확신에 찬 시선으로 독서를 통하여 자기에게 마음에 드는 것만을 수용하고 생각하기를 멈추게 되면, 독서한 만큼 큰 효과의 자기성찰을 하기는 어렵게 된다.
예를 들어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부당한 소문으로 피해를 입고 해고를 당하는데, 그것에 대한 남성중심적 시스템의 부당한 폐해를 감지하지 못하고 “저 여자 드세 보이더니만, 힘들게 사네”라는 의견으로 귀결되고, 이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주인공씩이나 시키느냐며 생각을 닫아버린다면, 잘못된 편견을 한 번 갈무리하는 도구로서 해당 드라마를 독서한 셈이다. 그런 경우에는 자기 반성적 고찰과 피드백이 없는 바람에 성장하지 못하고 책 한 권을 더 읽었다는 자족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 태도나 수준을 보인다면, 차라리 저자의 사유가 명확히 드러나는 ‘하드한 에세이’를 읽는 편이 더 낫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 생각이 독자의 수준을 훌쩍 넘어버렸거나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면, 이럴 때 흔히 독자는 이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글이 이상하다’ ‘재미없다’ 등등 부정적이지만 핵심의 본질을 외면하는 비판적 의견을 보이는 것이다. 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고, 자기의 생각을 뒷받침 하는 것이 아니라면, 조금 거리를 두고 때로는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게 된다. 글을 그 자체로 읽고 새로운 세계와 대면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보호하고 확증해줄 근거를 발견하려는 버릇은 여전한 셈이다. 이럴 경우 자기 생각 아래 질서정연하게 보일 근거와 예시만을 잔뜩 모으는 것이고, 자신의 생각이 여전히 견고하다는 것을 독서를 통해 확인하는 것뿐이다. 세계를 대면하며 자신이 부서지는 경험을 위하여 독서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럴 때는 아주 권위 있는 저자의 인지도가 차라리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자신의 의견을 심대하게 거스르지 않는 경우라면 수용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특정 영화를 엄청 싫어하다가, 갑자기 그 영화가 칸느 상을 수상해버리면 입을 봉해버리는 경우겠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째서 자신의 생각과 큰 갭이 있었는가를 진지하게 학습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영화가 독자가 인정하는 범위 내의 권위 있는 인증을 받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변화다. (다만 너무 경직되게, 때로는 낯 뜨겁게 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해서 듣는 사람으로선 민망해지는 사례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조차 그리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 편이 좋다. 정치 논쟁을 즐겨 하는 사람들 중 극단적으로 치우친 분들 중에는 상대 진영의 의견은 유명 학자의 의견이라 해도 폐쇄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하게 사고를 막아버리는 표현이 ‘빨갱이’란 수식어가 아니었을까 한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배척하는 것인데, 그러다가 자기 내집단에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뻔뻔하게 옹호하는 존재를 이상한 권위자로 내세우는 우를 범하는 경우도 자주 본다. 지성의 노력으로 유명 권위자의 의견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 좋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경우에는 반지성의 행태를 위로받기 위해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편들어 주는 기이한 존재를 잘못된 권위자로 내세우고는 맹신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계엄령과 내란 사태의 주범인 윤석열처럼 극우 유튜브의 의견만을 선별 수용하게 되고, 또 윤석열의 말을 다시 받은 극우유튜버는 윤석열의 말을 근거로 삼아서 자신의 신념을 더 강화하는 악순환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이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고서라도 이러한 좋지 못한 순환고리는 종종 눈에 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의 자기계발적 성공 신화’에 부합하는 가치 체계가 절대적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기저에 깔린 가치 체계에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면서 출발하거나, (전문가의 해설을 부차적으로 참고하면서라도) 독서 대상에 온전하게 대면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어떤 장르의 책을 읽어도 자기 한계를 부수는 수준의 독서력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어른이다 보니 자기 가치와 편견을 강화하는 독서를 하게 되고, 불편한 걸 피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기도 하지만, 조금 더 매력적인 독서의 세계를 알지는 못한다는 것에서는 손실이기도 하다.
운이 좋아 어렸을 적부터 ‘근본을 흔드는 독서’ ‘세계로 확장되는 독서’ ‘자신을 입체적으로 다루며 냉철하게 관찰하는 독서’ ‘자기와 타자의 격렬한 피드백을 통한 균형 잡힌 독서’ 등을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게으른 독서’ ‘숙제를 위한 독서’ ‘표피적인 독서’ ‘자기를 안전하게 놓아두는 독서’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말하고 싶어 근거를 찾는, 확증편향적인 정보 수집의 독서’만이 주를 이룬다면, 독서는 안전하고만 싶은 자신을 우아하게 포장해주는 행위에만 머물게 된다.
이럴 때 소설의 현상적 이야기는 더 깊은 이야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독자의 수준에 맞게 오해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독자라면 모두가 겪는 문제이고,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서 충분히 즐기는 독서를 못했다면, 또 긴 시간을 두고 자신과 반대편에 선 이야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도 읽는 것이 읽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런 경우 큰 효과를 볼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상황을 점검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독서력 향상을 위해 긴 시간을 두고 훈련하지 못한다면, ‘자전적 에세이’를 써보는 방법도 유의미할 수 있다. 스스로 자화상처럼 쓴 글에서 자신을 어떻게 포착하고 있는지, 그 과정과 단면에 대해 피드백을 받아보는 것이다. 그 글에는 자신이 묘사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 가치 등이 담기게 되고,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변명, 냉철한 객관성 등)도 보이기 마련이다.
즉, 이른바 ‘게으른 독서’만을 했다면, 세상을 철저하게 대면하지 못했다면, 자기 연민, 자기 합리화, 또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거나, 적당히 교양적이고 무해한 말들로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자본주의의 승리 공식을 획일적으로 강조하거나, 자신을 세상이 인정하는 협소한 영역의 롤모델에 투영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안전한 영역으로 자신을 놓아두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게 저자 자신도 안전하다고 여기는 지점에 숨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면 자전적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냉철히 분석하고, 타인의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치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어떤 텍스트를 읽더라도 저자의 의도와 글의 맥락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수준에 이른다면, 소설을 읽을 때도 그 안의 인물이나 사건을 통하여 큰 영감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다양한 시점에서 풍부한 의미를 끌어낼 수 있게 된다. 그냥 소설의 모호한 의미를 대면할 때 갑자기 풍부하고 유의미한 지성이 생기는 건 아닌 셈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글을 읽느냐보다, 어떤 수준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읽느냐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시민 의식의 관점에서 에세이를 중요하게 여긴 것도 그 경험의 일상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생각의 결이 상당히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철학서보다는 덜 어렵고 일상을 통해 풀려나온다는 점에서.
독서에서도 소설과 에세이, 소설과 비평의 연계를 통해 자신이 끄집어낼 수 없는 내용을 끄집어내는 경험을 많이 하면, 더 나은 독서가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그걸 외면했더니 영화 <조커>를 보고는 사이코패스인 ‘조커’를 동경하는 청년들이 많이 생겨 감독이 당황했다고 하던데, 그런 이들의 감상평을 보면 어째서 조커에 감동하는지, 이런 발상이 가능하구나 싶으면서도, 시민 사회의 관점에서 허용할 수 없는 선이 있다고 보았을 때 독서와 해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김용현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애독서로 삼으면서 군에서 양서를 금서로 정했다는 사실도 곱씹어보게 된다. 지성이 뒤틀려 반지성이 되면, 독서로도 답이 없다. 반지성의 독서가 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