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삼행시
환- 상의
희- 열이
란- 해하고 속되어
내- 면적이면서도 지극히
륙- 적인 모호한 관념에 사로잡혀 육신에서 벗어난 것도, 육신에 갇힌 것도 아닌 채로
의- 자에 앉아 담담히
영- 원을 꿈꾸며 허리가 아프다.
혼- 자만의 꿈은
이- 생의 기쁨은 아닌 것을.
(♬ 의자에 앉아 담담히 영원을 꿈꾸며 허리가 아프다)
#1. 육신과 영혼 사이
살아가면서, 늘 육신과 영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중력에 붙잡힌 채 금방에라도 떨어질 수 있는 긴장을 느끼면서, 어느덧 시간이 흘러 노쇠해져 그마저도 헛헛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우리의 육체는 어떤 식으로든 이 땅에 붙들려 있고, 필연적으로 속해 있는 것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갇힌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땅 위에 있다.
반면, 영혼은 끝없이 상상하며 무한을 꿈꿀 수 있다. 육신이 고통스러우면 이러한 영혼의 환희라는 것도 허망할 수 있지만, 영혼으로 소망한 것을 붙들고, 기어이 육신을 입고는 하기 어려운 것을 위해 나아가기도 한다. 사람은 때때로 비합리적이지만, 그래서 놀라운 일을 벌이기도 한다.
나는 자주 이런 경험을 한다. 물론, 그럴수록 몸은 말한다. 몸은 의자에 고정되어 있기 마련이고, 허리는 뭉근하게 아프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도 머릿속의 상상은 저 멀리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여러 생각이 떠오르고 그건 모호한 관념이나 이미지로 흐릿하게 드러났다가 흩어지지만, 그대로 종종 육신 너머로 뻗어나가는 기분이 들게도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육신 안에 더욱 깊이 갇히는 기분이 들게도 한다. 그렇게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나는 희열을 느끼다가, 풀썩, 주저앉는다.
그래도 그러한 버릇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2. 환상과 현실 사이
환상은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 환상에 빠지면, 좋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빛나는 약속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현실이 녹록치 않았던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꿈꾸고,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메시아가 징벌과 구원을 수행할 것이란 믿음으로 혹독한 삶을 버티는 것과 같다. 그래서 누군가 현실이 녹록치 않은 이들, 예를 들어 무명 예술가는 운명론자가 된다고들 한다. 그러지 않고는 어디서도 버틸 수 없을, 희소한 근거를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소명과 광야를 상정하여 고난을 이겨는 과정이 예정된 것이라 하지 않고는 쉽사리 버티지 못할 경우가 많다. 대개는 그렇게 의지를 꺾고 일상인으로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환상을 멈추기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거기서 희열을 품고는, 그 열기가 식지 않기 위한 노력을 지속한다.
물론, 이 희열은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일 뿐,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환상 속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에는 희열이 식어가는 것을 방치할 만큼 무기력한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환상은 나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현실이라는 중력 안으로 들어올 때 고꾸라지는 느낌으로 더 깊은 실망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지는 환상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그것에만 의지하고는 현실을 살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영혼의 길을 환상의 방향으로 놓지 않고, 어쨌든 살아가는 현실의 삶 위에 놓으려고 할 때가 온다. 평범한 자신의 한 순간도 게을리 하지 않는 삶.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이제 충분히 환상에서 꿈을 꾸었노라며, 이제는 마라톤을 하듯이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새벽의 길을 걷겠노라 담담히 말해보는 것이다.
환상에서 현실로 걸어나오는 길을 늘 있었지만, 이상하게 경계에서 반복되는 순간은 수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졌고, 그래도 어쨌든 나왔을 때 허무함의 공백을 이기지 못해 헛헛해하면서도 점점, 새벽의 찬 기운에 숨을 고르는 법도 알게 되었다. 허무에서도 즐거운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3. 영원의 꿈, 그리고 현실의 기쁨
나는 영원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그러나 명예욕이 금전욕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은근한 꿈을 숨기면서 아닌 척하는 것, 죽지 않는 영원의 욕심이라 하겠다.
그렇다.
나는 영원을 꿈꾸었다.
사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서서히 허물 때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영원을 추억하였다.
나는 가닿지 못할 작고 볼품없는 육신 안에 갇혀서는 그것에 어쩌지 못하면서,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를 상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확률적으로 그렇다. 확률을 벗어날 만큼 예외적인 순간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도대체 어째서 영원을 꿈꾸었는가, 이제는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후회한다고 하기도 그렇다.
어찌 되었든 계속 걷고 있기 때문이다.
걷는 순간에 후회는 부질없는 짓이다. 후회도 어쩌면 꿈을 꾸는 것이다.
영원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실현되지 못하는 꿈. 후회를 한다고 돌아갈 수 있다면, 한 번쯤은 그래보고도 싶지만, 곧, 그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웃음을 짓는다.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후회란 건 부질없는 짓이다. 엄청난 잘못을 했다면 참회하면 될 일이고, 현실에서 죄과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고, 약간의 실패를 겪었다면 그것을 통해 생겨난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어찌하겠는가. 어차피 우리는 영원을 꿈꾸면서 영원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실패를 하여도, 혼자만의 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삶의 기쁨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어제 실패했던 순간들 앞에 광장의 사람들이 모였고, 그로부터 오래도록 기억했던 유전자가 남아, 처음 경험하는 일에도 일어서는 젊은이들이 있다. 어떤 꿈은 다른 이와 연결되어, 진정한 기쁨이 된다. 마치 영원이 그때부터 지금을 거쳐 미래에도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4. 어쨌든 담담히 받아들이기
나는 의자에 앉아 허리가 아픈 채로 현실에서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꿈을 상상한다. 때로는 그 환상 안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는 곧장 빠져나오지만 버리지는 않았다.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건 오래도록 영원을 꿈꾼 자들의 특권이다. 내가 얻고 싶은 매력적인 권리다.
육신에 갇힌 것도, 영혼이 자유로운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 자신을 찾는 일일 것이다. 영원을 지우면서 영원을 기록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속된 영원일지라도, 담담히 스쳐가는 모든 일상의 한숨을 섞으며, 허리를 주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