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린 시절엔 누구나 한 번쯤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를 꿈꾼다.
아니다.
남들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악당을 물리치고 정의를 수호하며
세상 모든 이들의 영웅이 되는 상상은
마음 속 판타지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다른 이들 중에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왕자나 공주로,
혁명가나 마법사로,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꿈에
잠기기도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때는 그랬다.
영웅이 되거나 특별한 운명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어린 마음은 벅차오른다.
그러다가 10대가 되면
꿈이 조금씩 구체화된다.
이를테면, 과학자나 발명가가 되어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상상,
혹은 아이돌 스타가 되어 무대 위를 환히 밝히며
팬들의 환호를 받는 꿈을 꿔본다.
가볍게 입시를 통과해 명문대에 들어가거나,
스포츠 스타가 되어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거는 꿈도
비슷한 예일 것이다.
여전히 현실적이진 않지만, 어쩐지
손 닿을 듯한 꿈들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이내 성인이 되면
그 꿈은 점점 더 현실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기어이 우리는 '건물주'라는 다소 덤덤한 목표를 꿈꾸기 시작한다.
그 꿈 자체를 비현실적으로 여기면서도, 가닿을 수 있을 것처럼, 은근히.
언제부턴가 건물주는 '편하게 사는' 삶의 상징이 되었다. 조직에서 더러운 꼴을 참으면서 일하지 않아도 수입이 들어오고,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줄 것만 같은 그 삶이 얼마나 달콤해 보이던지.
물론 빚이 많은 직장인들은 건물주를 넘어,
매주 로또 1등을 꿈꾸며 한 장씩 사 모은다.
힘든 하루를 견디며
품속에 숨겨둔 로또 한 장을 만지작거리는
일주일 동안은 행복하다.
상사 얼굴에 사표를 던지고 나와
홀가분하게 새 삶을 시작할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제는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당장 내 삶을 바꿔줄 판타지를 품게 된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판타지가 '화수분 지갑'이다.
복권이 그래도 마술적 리얼리즘에 기반에 둔 것이라면
화수분 지갑은 철저하게 판타지인 셈이다.
매일 열 때마다 두둑이 채워져 있는 지갑,
필요할 때마다 끝없이 돈이 나오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지갑이 있다면 어떨까?
매일 아침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뽑아 통장에 입금한 뒤,
회사 대신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는
나날을 상상해본다.
단 하루라도
쳇바퀴 같은 일상을 떠나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그 꿈은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판타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화수분 지갑'을 가지고 있어도
현실적인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혹여나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언제 이 판타지가 끝나버릴까 하는 걱정이
은연중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수표가 꽂혀 있지만,
그럴수록 불안해진다.
돈이라는 것이 그렇다.
판타지를 실현시켜 줄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