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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For D

에세이

by 희원이

컴퓨터 실습 과목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교 새내기였으니, 체질상 특별히 광적으로 놀지는 않았더라도 ‘적당히’ 캠퍼스의 자유를 느끼고는 있었다. 아무 할 일 없이 시간 죽이는 걸 별로 탐탁지 않아 하는 터라 수업에는 열심히 들어갔지만, 강의를 성실히 듣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을 ‘줏대 있게(?)’ 가렸기 때문에 싫어하는 강의 때는 휴면을 취하고, 좋아하는 과목은 배경음악 듣듯 흘려서라도 들었다.

술은 자주 마셨다. 종종 열의를 가지고 복습까지 하다 보니 밤은 지나고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해장할 밥값을 꾸기도 했다. 말하자면 평범한 새내기였다. 다만 남들은 그 시기에 화끈하게 권총(F학점) 좀 차주고 나서 군대 갔다 오면 철들게 마련인데, 나는 좀 달랐다. 새내기 때는 그들에 비한다면 수업도 빠지지 않고 절제하면서 나름 계획성 있게 아침 해장술을 마셨을 뿐이지만, 군대를 갔다 온 후에도 이러한 지조는 변하질 않았다. 철들지 않았다는 얘기다. 조지훈의 <지조론>을 읽지도 않고 지조를 나불댔단 얘기다.

좋게 말해서 특유의 온건함, 달리 말해서 극도의 게으른 우유부단함, 미래를 설계하기 싫어하는 무계획함, 설계하고 싶은 욕구를 상실한 무기력함이 대학생활 내내 이어졌다. 그렇다고 이상처럼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의 예민함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시답지 않은 내 비문학성은 그럭저럭 삼류소설로 쓰이고 있었을 뿐이다. 당시 내 별명은 ‘무기력한 놈’이었다.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내 친구의 동아리방은 내가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생활에 대해 듣고는 권총(F) 하나를 내게 선물해줄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라리 그랬다면 내 인생성적표에 F학점이 남지는 않을 수 있었다. F학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는 조금 수고스럽긴 하지만 다시 다른 강좌를 들으면 된다. 그보다야 못할 수는 없지 않은가. F학점을 똑같이 되풀이해서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1학년 때처럼.

사실 1학년이 무슨 공부를 하겠는가. 요새야 학과를 정하기 위해 열심히 한다지만 당시 나는 그런 감도 없어서 아무 전공이나 하겠다는 대범함 때문인지 몰라도, 시험공부 따위는 잘 하지 않았다. 밤샘이 뭔지 잘 모르니 사실 시간 남아도는 시험기간을 더 좋아했다. 결국 오로지 수업에 대한 기억에 의지해서 시험을 봤다. 내 강점이 결석하지 않는 것이었으니, 좋아하는 과목은 의외로 성적이 좋았다. 싫어하는 과목도 출석 점수 때문인지 C+은 받았다.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 사이에 그랜드캐년이 놓여있으니 그 광대한 간격을 줄이려 노력한 것이 내 대학성적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예외가 있다. ‘컴퓨터 실습’이었다. 때는 1997년, 까다로운 컴퓨터 운영 체제가 ‘기맹’인 내게는 재앙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도스였다. 정말이지 ‘독스(Dogs;毒s)'라 부르고 싶다. 실용적인 강좌라 조금이라도 들어보려 했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잠만 잤던 것이다. 그러고 시험을 봤으니 오죽했겠는가. 이름 쓰고 10분쯤 앉아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서 시험지를 제출했는데, 강사가 내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더라. 그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는지 그와 눈 마주치기를 피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학점이 D-였다는 건 기억한다. 그러니까 강좌 철회하고 다른 걸 들을 수도 없는 그 학점, F만도 못한 놈이라는 그 학점, D. 임산부를 뜻하는 이모티콘인 그……, 그러니까 성적표에 떡하니 버틴 D를 긁어냈다가는 반인륜적이라 욕먹을 수도 있을 듯한 그…… 학점. ‘ㄷㄷㄷ’ 소리치며 우는 D를 가엾게 바라보던 학점들과 야유하는 학점들의 이중창이 들렸을 수도 있겠다.

강사는 내게 지그시 웃으며 권총 대신 엿을 쥐여주었던 것이다. “다음엔 꼭 잘해라.” 하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D+도, D도 아니고 D-가 뭐란 말인가. (최근에는 ‘-’가 없어졌지만 당시엔 있었다.) 내 가슴엔 당당히 이등병 상처가 ‘찍’ 박혔던 것이다. 구제불능 ‘쫄다구.’ 군견보다 못한 병졸 중 말단.

사람이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 찾는다고 그런다만 당시 내가 그랬다. 나는 사무치도록 십자가(+)가 그리웠다. 만일 ‘+’였다면 후일 내 성적표에 묻힐 D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당당하게 기도해줄 수 있었겠다. 어차피 성적을 갈더라도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강사는 그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내게 잘하라는 의미로 넌 일등 임산부라며 치켜세워주었을 것이다. 난 여자도 아닌데, 일등(一) 임산부라니…….

슈, 발.

슈바이처…… 슈발리에…… 이런 유의 인물들을 생각해볼 사람도 있겠다. 아프리카로 선행을 하러 떠난 슈바이처처럼 훨씬 더 고차원적인 행위를 위해 이런 시련이 있다고 해석하거나, 슈발리에처럼 재능 있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에 구속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면 된다! 물론 어느 것 하나 당시 내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공상과는 거리가 있는 놈이었다고 해야 할까. 더구나 나는 의대도 가지 않았고, 당시 글쓰기에 대해서는 터럭만큼 염두에 둔 적도 없으니, 아니 오히려 시인이나 소설가를 대단치 않게 여겼으니 그런 상상은 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화를 가라앉히고 냉정히 생각해야 했다. 성적 재검토해달라고 빌어야 했다. 아,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내 기분은 정말 ‘슈발’이었다. 만일 강사 앞에서 그 기분으로 섰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한쪽 눈으로는 웃고(^), 다른 눈으로는 울고(ㅠ) 있었을까. 더 할 말 없다는 강사를 바라보지 못해 고개 숙이고 발만 바라볼 수도 있겠다. 발바닥이 녹아 바닥에 접착되었을 수도 있겠다. 강사 앞에 장승으로 버티고 서있길 바랐을 수도 있겠다. 발이 정말 녹아 ‘바르르’ 되고 나는 울다가 그만 바르르 몸을 떨었을 수도 있겠다. ‘슈발’이라는 욕지거리를 겨우 참아내며 기껏해야 ‘슈바르르’ 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점수를 만회했다면 좋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냥 D-를 수용하고 만다. 어차피 다시 들어야 할 판인데 성적을 구걸한들 실익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니 성적이의신청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시간이 흘러 나는 그 수업을 다시 들었고, 윈도우 98이었던 운영체제에 대해서는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다행히 성적이 잘 나왔다. 그래서 내 D- 위에 다른 학점을 입혔지만, 마음 한구석에 일등(一)자를 선명하게 새겨준 D-를 아무도 모르게 내 성적표에 묻어두었다.

그나저나 그땐 성적이 사회에서 뭘 의미하는지 감을 못 잡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기력함이 절정을 쳤기 때문일까? 왜 교수에게 찾아가 성적에 대해 상의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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