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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서 영어과 나왔다고 말을 못 해

에세이

by 희원이

어디 가서 영어과를 나왔다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영어가 내신의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어과를 다니면서도

영어는 내게 두드러지는 약점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영어라는 과목이 내게 주는 압박감은 심했고,

그 영향은 전반적인 성적에도 나타났다.

‘영어과를 다녔는데 영어를 못하다니, 어디 가서 말할 수 있을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담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해보면,

꼭 부끄러운 일만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전공을 제대로 살려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문과를 졸업한 사람조차 인생을 살다 보면 '영문도 모르는' 일에 직면하고,

국문과를 나온 사람도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자신 없어할 때가 있다.

경제학과를 나와도 가계부는 늘 적자고,

경영학과를 졸업했다고 경영 능력이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다.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도 모든 판결을 법대로만 하지 않는 현실을 본다.


MBA를 이수했다고 해서 NBA 경기를 더 잘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신방과를 졸업했다고 해서 매번 ‘신방’을 차리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신방과 전공자가 결혼을 자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혼이 잦아지면 위자료가 많이 든다는 말이

농담처럼 떠돈다.


어쨌든

이런 실없는 농담을 떠올릴 때마다,

전공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어쩔 수 없이

크게 느껴졌다.


학창 시절에는 전공이 인생을 좌우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보면, 막상

그 전공이 삶의 방향을 전적으로

결정짓지는 않았다.

전혀 전공을 필요치 않은 일을 할 때도 많다.


물론 전공이 삶의 방향을 결정짓지 못하도록

자꾸만

주변으로 밀려나버린 것일 수도 있다.

가보지 못한 길이라

뭐라 말하기도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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