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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라고 쉬울 리가 있었겠습니까

에세이

by 희원이

중국어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한자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만 멈춘 게 아니다.

발음과 억양까지도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영어로 병음해서 발음기호를 표시해서

글자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줄 알았는데,

성조마다 뜻이 달라지는 중국어를 듣고 있자니,


‘프리츠’는 저리 가라였다. 그건 그래도

하나의 단어가 발음에서만 고통을 준 것이었는데,


이건 여러 성조에 따라 뜻 자체도 바뀌고

그에 맞는 한자도 다 달랐던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장단음으로 ‘눈(eye)’과 ‘눈(snow)’이 다르다. 그런 단어들이 여럿 있다고는 하지만,

일단 단어를 ‘눈’으로 같게 쓰고,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기야 우리에게도 “가가 가가가?” 같은 경상도식 발음에도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 애가 그 애니?”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억양과 속도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점에서는

외국인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 다만

그것은 그저 방언의 예외적인 사례일 뿐

전체적으로 이러한 흐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어와는 차원이 달랐다.


‘성조에 따라 뜻이 달라지다니!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야! 성조야, 너 대체 뭐니? 삼단변신 로봇이니?’


이 언어의 기이한 규칙은 내게 난수표와도 같았다.

중국어의 발음과 억양에 관한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과장하고 싶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달가운 기억은 아니다.


학창 시절에 교과서를 펴놓고 있으면 그 안에 적힌

한자들과 발음 기호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러고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획처럼

지면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래, 이건 좀 과장이다.


그래도 어쨌든 중국어 성조를 처음 배웠을 때

흥미보다는 피곤함을 느꼈다. 그때

중국어 선생님이 칠판에 "마(媽)"와 "마(馬)" 등을 써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니 하오 마(吗)’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은 ‘마’라는 글자를 설명하면서


우리에게도 성조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했다.

경상도 발음이었다. 또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는 성조를 고려한 흔적이 남아 있어, 그 당시에도 성조가 있었다는 방증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한국어에서는 그러한 흔적이 일상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중국어 달랐다.

첫 번째는 마치 평평한 지면 위를 걷는 것처럼 부드럽게 올라가는 소리,

두 번째는 높이 올라갔다가 급격히 떨어지는 소리,

세 번째는 깊게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소리,

그리고 네 번째는 단호하게 내려찍는 소리였다.

평평하게 흘러가다가 갑자기 고음으로 튀어 오르지를 않나, 무겁게 낙하하는 억양의 변화를 좇을 때는 번지점프를 하는 것 같았다.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정확히 같은데 성조에 따라

어머니가 되고,

말이 되고,

꾸짖음(骂)이 되고,

대마초(麻)가 된다는 사실은 기이함을 넘어서

거의 공포스러웠다. 왜 그 말들이 다 같게 들리는지,


설령 다르게 들리는 경우라도,

내가 일일이 기억해서

그 발음을 구분하며 말할 수 있을지 암담했다. 내 발음은

마치 거친 자갈길 위를 달리는 낡은 자전거 바퀴처럼

덜컹거렸다.


‘왜 이리 복잡한 거야!’

한숨이 나왔다.

내포(내신 포기)를 결정하기 전이라 중국어는 당시

만만치 않은 난제 같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얽히며 복잡해졌다.


홍콩영화를 제법 봤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도 그 언어를 따라 해야 한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영어나 독일어를 배우면

다 될 줄 알았지만,


중국은 너무도 빠르게 경제 성장을 시작하고 있었고,

얼마 안 있어,

중국어가 제1외국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돌곤 했다.


이렇게 어려운 언어가 제1외국어가 되면 곤란하다며, 차라리 영어의 기득권에 찬성표를 던지던 때였다. 그건 사실

지금도 그렇기는 하다. 여전히

영어가 더 익숙하니까. 그리고

문자를 외우느라 고생하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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