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글 & 에스파
추석 연휴 때 가족 여행을 떠났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저렴한 호텔. 만실이 되기 전에 잽싸게 예약할 수 있었다. 의기양양해졌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각각 수고비를 챙길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희귀본을 많이 보유한 헌책방에 가서,
평소 눈독을 들이던 디자인 작품집을 살 계획이었다. 그러고 나니 나 자신이 상당히 우아하게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므흣해지기도 했다.
웬지 다도라도 즐겨야 딱 좋을 듯했다.
추석 아침에 호텔에서 차례를 지내고 잡채를 먹었다. 맛있었다.
그러고 산책을 하는데,
작은 새가 보였다. 그런데 귀여워서 빤히 보았는데,
먼곳에서 산책로의 사람들을 빤히 보는 동물들과 눈이 마주쳤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우울해 보였다. 요즘 오는 사람들이 함부러 과자를 던져주지 말라고 해서, 그걸 제법 지키는지, 시끄러워지기만 한 산책로를 바라보며, 옛 기억, 과자를 마구 주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걱정이란 게 있고, 불만이란 게 있지..." 그렇게 읊조리는데 어쩐지 산책하다
급피곤했다. 지금 불만이라면 "산책을 오래 해서 좀 졸리다는 거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차례까지 지냈으니까." 인생은 원래 한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라, 내가 건강하고 역동적으로 인생을 주도할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특히 추석날 아침 가족들과 시끌벅적하면 그러기 마련이었다. 사방에서 사투리가 들려왔다.
새소리도 들려왔다.
너굴너굴 너굴 소리도 들려왔다. 뭔가 되게 음울 우울하게. "너도 졸리구나?"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졸렸다. 커피란 그랬다. 안 졸리게 할 줄 알고 마셨는데, 여전히 졸리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음료. 어쩐지 안 풀리는 인생 같았다. 잘 풀리게 해달라고 맨날 기도하는데, 여전히 안 풀리는 나날들처럼.
너굴너굴. "너도 그렇나 보구나? 내가 지금 간식이 없어. 미안."
급피곤해서 간식 챙겨줄 여력도 없었다. 숙소 들어가서 낮잠 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점심 들어갈 배는 있어서 점심은 먹어야했다.
그때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약속 장소로 나가기로 했다.
약간 졸린데 졸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야 되어서 못 나간다고 하면 욕 먹을 것 같았다. 인생이란, 인간관계란 늘 한 수 접어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뉴발란스한 처세적 감각이 살아가다 보면 좀 필요했다.
물론 뉴발란스한 외교적 감각처럼 보여서는 안 되었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눈망울 촉촉하게,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나는 너와 함께 존재한다는 마음으로,
조금 졸리긴 했다. 자꾸 그러한 처세적 감각이 접히려 했다. 콘서트 준비하느라 신경이 예민해진 아이유 같은 마음이었다. (→참고)
그래도 그 동네 헌책방에만 보유하고 있다던,
디자인북을 손에 넣고는
거기에 돈을 쓸 수 있어 기뻤다.
좀 문화적인 다도의 경지를 맛본 충족감이 들었다.
저녁으로 돼지국밥을 먹었다. 맛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디자인북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만큼은 새벽까지 하얗게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커피도 마셨겠다 자신 있었다.
하지만 과욕이란 것을 불과 한 시간 지난 순간에 깨닫고 말았다. 그래서 인생 앞에서는 항상 한 수 접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했다. 이토록 허망하게 졸릴 줄은 미처 몰랐다.
카카오택시를 앱으로 불러서 숙소로 돌아왔고, 멀리 어두컴컴한 숲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너굴너굴 너구리가 우울하게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숙소에서 잠부터 자기는 자야했다. 생각해 보니 낮잠도 못 잤던 것이다. 그러니 커피에 함유된 카페인 정도로 통할 리가 있나?
내일 아침엔 오늘 남겨둔 잡채로 요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