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 뭐가 그렇게 궁금하니

소설

by 희원이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와타나베 씨에 관한 정확한 사연은 모르지만, 종훈은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그를 쉽게 잊기는 어렵다.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건 어쩐지 자신과 상관 없는 사연 같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에게 깊이 연루된 사연 같았다. 한편 하나는 종훈의 사연을 궁금해하고, 얼떨결에 종훈은 우주의 이름을 꺼낸다. 왜 그랬을까, 그로서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와타나베 씨

한여름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몰아칠 무렵이라 나는 늘어져서 집에 일찍 돌아오곤 했다. 그날도 오전 수업만 듣고 학원을 땡땡이 치고 마땅히 갈 때 없어 집에 일찍 돌아왔다. 대충 둘러댈 변명거리를 준비하고 들어갔지만 어머니는 낯선 손님과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서 있다 손님과 엄마에게 인사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30대 초반의 여자 손님이었다. 당시 엄마는 새 작품 출간 문제와 부산에 새 작업실을 열기 위한 사안 때문에 분주했던 터라 나는 쉽사리 그와 관련된 실무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오는데 낯선 말이 들렸다. 분명 일본말이었다. 일본남자가 말하면 여자가 바로 통역해주었다.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방문을 살짝 열어둔 채 귀를 거실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일본인 중년남자의 목소리는 명료하고 절도 있었다. 목소리만 듣자면 단호하고 이지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을 들게끔 했다. 대화 분위기는 부드럽지 않았다. 엄마에게 부탁하는 어조라는 걸 몇 마디 들은 걸로도 알 수 있었다.

“죄송해요. 그이와 관계된 일은 이제 좀 피곤하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어컨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거렸다.

나는 궁금해서 숨을 죽이고 문 근처로 갔다. 문틈으로 보인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다시 자세를 가다듬더니 말을 느리게 뺐다. 단정한 양복차림에 중후한 인상, 비싸 보이는 안경과 시계로 볼 때 성공한 기업가나 교환교수 같았다. 우리와는 별 인연 없을 듯한 사람들이 우리 집에 앉아서 엄마에게 사정조로 얘기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은 어쩌면 당연했다. 게다가 ‘그 이’라고 엄마가 말했다면 아무래도 그 사람(아버지)과 동업했던 사람일 것 같았다. 빚 때문에 찾아온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스즈키 씨…… 아버지라는 사람…… 아버지는 싫어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정중하면서도 뭔가 부탁하려는 표정을 보건대 아버지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이라기보다 그 남자의 일인 것 같았다. 일본남자는 벌떡 일어서더니 큰소리로 뭔가 말했고 통역이 이어졌다.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일본인의 말이 이어졌고 통역이 따랐다.

“아버지라는 사람을 지금도 미워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니 미워한다고 그대로 묻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어머니께서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스즈키 게이치로와 와타나베 교코 사이에서 와타나베 게이치로가 태어났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그게 접니다. 일본이름을 가진 부모 밑에서 조선 피가 흐르는 일본사람이 태어난 것입니다. 버림받고도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를 어린 나이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외지를 떠돌며 고생하면서 내 안의 조선 피와 어머니에 대한 미움 아닌 미움을 잊으려 했죠. 철저히 조선의 피를 잊었고 지금 저는 일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남부럽지 않게 이루는 동안 스즈키 씨가 제게 남긴 건 ‘게이치로’라는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건 어머니의 의지였습니다. 그렇게 홀로 사셨죠.”

“그런데?”

엄마가 반문하려 할 때 다시 와타나베 씨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날이 갈수록 생활에 기반이 잡히고 여러모로 아쉬울 것 없었지만 늘 재가를 거부하시더군요. 나이가 든 저도 예전만큼 그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노환으로 누우신 어머니를 위해 그분을 만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산소 위치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아버지를 싫어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목소리와 옆모습을 잊기 어렵다.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던 감정이 급격하게 사라지고 엄마의 결정을 기다리는 와타나베 씨의 긴장된 표정은 여전히 눈에 선하다. 그때 난 ‘와타나베, 게이치로’를 천천히 읊조렸던 것 같다.

이름에 아픔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문틈으로 그의 삶의 흔적을 슬쩍 엿보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뭔가 승낙하는 듯했고 와타나베 씨는 연신 인사하며 “감사합니다”를 어색한 발음으로 연발했다.


엄마는 그들과 함께 1박 2일로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셨다. 와타나베 씨의 단정하게 빗겨진 뒤통수가 길거리 너머로 사라져가는 걸 지켜보며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스즈키 씨, 아버지, 조선인, 할아버지의 무덤, 와타나베, 게이치로…….

내 머릿속에 한동안 그와 관련된 단어들이 떠다녔다.

‘아버지를 싫어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엄마는 그에 관해 더는 상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어쩐지 내가 모르는 집 안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저 궁금할 뿐이었고 시간에 묻혀 와타나베 씨의 존재가 서서히 희미해졌다.





♬ 하나야, 뭐가 그렇게 궁금하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오빠.”

부킹걸 하나가 물었다.

“예? 아니에요. 아무것도.”

“에이, 아니구먼. 무슨 예술가처럼 심각한 표정이던데.”

춤추다가 슬그머니 들어와 맥주를 홀짝이는 나에게 하나가 말을 붙이면서 따라 들어와 앉았다. 무대에서 수많은 인파에 묻혀 나머지 일행들은 혼신을 다했다. 진웅의 춤은 화려했고 기혁도 숫기 없음에도 나름대로 선전했다. 물론 ‘원숭이 띵가띵가, 지렁이 꾸물꾸물’ 했지만.

하나는 진웅의 장광설을 들은 후부터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여자 친구 이름이 뭐였어요?”

나는 얼떨결에 “우주요, 한우주.”라고 대답했다. 한우주, 왜 하필 그녀의 이름을 댔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는 한우주라는 이름을 되뇌고는 그저 의미 없이 흘려버리는 듯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의 원인을 그쪽에서 찾아낸 눈치였다, 그녀 마음대로.

그렇다고 그게 아니라고 변명하기도 어려웠다. 그저 심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자코 양주를 그녀의 잔에 채워주었다.

‘우주가 내 여자친구?’

나는 조금 놀랐다. 우주의 이름이 튀어나오다니 하기야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우주 얘기를 했으니 그녀의 이름이 나온 것이 아주 황당한 일이라곤 할 수 없다. 더구나 우주를 여자 친구로 상상해본 적 없지도 않다.






이전 08화부킹걸 / 부킹걸도 주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