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블루 / 메가톤급 청양고추

소설

by 희원이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중훈과 부킹걸 하나는 둘이서 자리를 옮기려 한다.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하나가 들어가자고 가리킨 곳이 바로 블루였다. 그곳에서 둘은 술을 마시지만, 얼마 마시지도 않고, 건성으로 자신을 대하는 종훈을 느끼는 하나. 설상가상으로 말실수까지 겹쳐 하나에게 호되게 따귀를 맞는데... 이 창피를 어쩌나.





♬ 다시, 블루

“우리 딴 데로 옮겨요.”

“아직 애들이…….”

양주가 많이 남아있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술에 환장했거나 빈티 나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우리끼리만 가, 자, 고, 요.”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되는 양손으로 입 주위를 두르고 또박또박 속삭였다.

솔직히 너무 저돌적인 그녀에게 부담을 느꼈다. 주희의 분위기는 내게 어떤 두려운 바이러스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나라는 부킹걸의 눈에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었다.

“그래요, 나가죠.”


그때 어째서 우주가 뜬금없이 생각난 것일까.

나는 우주와 자주 걷던 길을 다른 사람과 걸었다. 차도엔 술 취한 이들이 비틀거렸다. 차들의 붐빔과 무더위, 소리의 분산.

부킹걸은 내게 살짝 팔짱을 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팔에 닿았다. 그녀의 행동은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일단 걷죠.”

어째서 그랬을까? 나는 주희와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빤 차 있어요?”

부킹걸은 아까 진웅에게 물었던 질문을 했다.

“차 있는 게 중요해요?”

나는 또 주희 생각에 묘한 부아가 치밀었다. 주희에 대한 생각은 항상 온전히 주희에 대한 추억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생각은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묘한 공허함, 아림, 아니면 그 당시의 다른 경험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늘 부산친구들과의 경험이나 가출기억 그리고 와타나베 씨에 관한 기억 등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어쩌면 씁쓸한 추억에 대한 방어본능이었을 것이다.

부킹걸의 인상과 말투는 주희에 대한 추억을 자극했다. 나는 팔짱을 살짝 풀었다. 그러자 그녀는 무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핸드백을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길을 건너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우주와 거닐던 코스를 하나와 걷고 있다. 그런데 하나의 얼굴을 보면 자꾸 주희와 걷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런데 과연 하늘 위에 우주가 있긴 있는 걸까?’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우, 주.”

나도 모르게 우주의 이름을 끊어서 발음했다.

“예?”

부킹걸이 느닷없이 중얼거리는 내게 반응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싸가지 없는 녀석들을 소탕하려고 우주인이 돼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감찰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만 내 유치함에 피식 웃어버렸다. 부킹걸은 영문을 모른 채 내 꼴을 살피며 걸었다. 나는 계속해서 상상했다.

고인이니 숙연하게 그녀의 명복을 빌어야 할 것 같았지만 어쩐지 그녀는 죽은 게 아니라 변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점점 확신이 되는 것만 같았다. 하늘 위 별 중 밝은 별 하나가 우주일 것 같았다. 아니면 그녀의 말처럼 우주가 우주일 수도.

사방에서 매미울음소리가 들렸다.

싸가지 없는 녀석 하나를 납치해 우주선 안에서 그 괴로운 기타 소리를 듣게 하는 고문을 자행하는 걸 수도 있다. 그 소리의 일부가 새어 나와 매미 소리처럼 울리는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디서 매미가 우는지 진원지를 살폈다.

주변은 온통 높은 건물들로 빼곡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절묘하게 매미울음이 울리며 나와 부킹걸을 포위했다. 무심코 나는 고개를 들었다. 블루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블루 앞까지 걸어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몸에 밴 습관이 나를 블루로 이끌었던 것이다. 부킹걸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저기서 한잔 더해요.”

침묵이 어색했는지 내 시선이 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내 팔을 끌다시피 했다. 부킹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블루였다.





♬ 메가톤급 청양고추

부킹걸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듯 보였다. 블루에 들어가서 불편한 데로 불편해진 나로서는 술기운까지 올라와서 그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레드락을 홀짝였다.

그녀로서도 분위기 반전을 꾀했지만 결국 지친 듯했다. 거기에 대고 나는 조금 도에 지나친 말을 해서 분위기를 깨뜨렸다. 그때 그녀가 물었다.

“우리 여기 왜 왔죠? 잘못 온 것 같죠? 그냥 거기서 놀다가 집에나 갈 걸.”

나는 그 점에 공감하며 진웅이 했던 말을 복기했다. 그러다가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는데 결코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죽순이 데리고 나가야 잘된다고…….”

어쩌면 그녀를 우습게 여기고 무의식중에 내뱉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말이 헛나왔지만 헛나오게끔 예정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헛나온 것일까?


부킹걸은 아주 잠깐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긴 했지만 의외로 침착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가방을 들고는 발걸음 뗐다. 부킹걸은 문까지 빠르게 걸어갔다가 잠시 멈추고 망설이는 듯싶더니 몸을 돌려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포위망이 좁혀지고 징벌의 시간이 다가오는 갑갑함이 느껴 …… 짝! …… 말이 필요 없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동작과 손을 올리는 동작을 능숙하게 하더니 마무리도 깔끔하게 처리했다. 부킹걸의 손바닥은 메가톤급 청양고추였다.

순간적으로 주변이 밝아지더니 별이 보였다. 이 별이 혹시 우주는 아닐까. 삐이이잉! 앰프에서 기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마티 프리드먼의 기타 독주에서 튕겨 나온 신경질적인 소리가 갈래갈래 찢어져 투덜거렸다.

일일 호프 마칠 시간 즈음 가게를 정리하러 나와 있던 사장형도 투덜거렸다.

“에구, 결국 앰프 맛 갔군. 어째 불안, 불안하더니만.”

부킹걸의 메가톤급 청양고추, 메가데스의 메가톤급 매미 소리 그리고 별똥별 쇼가 절묘한 화음을 이루며 아귀가 딱 들어맞는 상황을 연출했다. 사장형은 동시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 중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번갈아 살피다가 앰프에 사람들이 붙는 걸 보더니, 사장형은 내게 다가왔다. 음악이 끊어지자 잠시 어색한 기운이 카페 안에 흘렀다. 뺨이 얼얼했다.


메가톤급 매미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줄리에뜨 비노쉬는 파란 물에 몸을 맡긴 채 오랫동안 침묵했다. 4년 전 우주와 나는 함께 숨죽이며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때처럼 파랗게 산란한 정적이 길고 길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 두어 방울이 떨어졌다. 사장형은 웃긴 꼴을 한 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여자 성깔 있네. 아이고, 이 손바닥 자국 좀 봐. 진짜 아찔하더라. 괜찮니?”

전혀 ‘안!’ 괜찮다. 소설보다 더 소설다운, 이 얼마나 작위적인 상황인가? 미묘한 느낌이 감정선을 자꾸만 툭툭 건드렸다. 왜 눈물이 떨어진 거지? 상황으로 볼 때 맞아서 우는 걸로 규정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이렇게 매운 손은 처음이네요.”

사장형은 씩 웃었지만 크게 터지려는 웃음만큼은 예의상 참으려고 애썼다. 나도 머쓱하게 따라 웃으면서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민망했다. 그래서 갑자기 우주를 생각하는데 울컥하더라고 궁색한 해명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어쩐지 사람만 더 우스워질 것 같았다. 분명 아무도 믿지 않을 게 뻔했다. 하기야 오랜만에 얼굴을 들이민 동창회에서 슬며시 빠져나가 록카페에서 놀다가 낯선 여자와 함께 다시 동창회를 찾은 녀석이 죽은 친구를 위해 울었다는 건 나라도 믿지 않겠다. 게다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운 것도 아니고, 5시간 30분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울 일인 것 같아서 울었다면 자다가 일어나서 콧방귀도 모자라 방귀까지 뀔 일이다, 아주 지독한 방귀로.


“아무래도 앰프가 확실히 나간 것 같은데요.”

나와 농구를 자주 해서 어느 정도 친한 상민이라는 녀석이 CD를 걸고 여러 번 앰프작동을 시도하다가 포기하듯이 말했다. 다행이었다. 나는 앰프에게 고마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앰프를 자극해 망가뜨린 메가데스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되면 메가데스에게 메가데스를 듣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다소 우스운 상황이 연출될 듯해서 앰프에게만 고마워했다.

하지만 이미 메가데스에 관한 좋지 못한 흔적 하나가 내게 새겨졌다. 이제 메가데스는 더 이상 우주와 나의 메가데스가 아니었다. 느닷없이 부킹걸이 끼어든 것이다. 메가데스는 지금까지 우주의 무더운 음악이었지만 앞으로는 부킹걸의 무서운 음악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마티 프리드먼의 기타 독주 때마다 무의식중에 기타소리가 불발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앞으로 메가데스를 들을 때는 손이 매운 여자와 함께 있지 말라고 누군가에게 충고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절대 부킹한 여자랑은 메가데스를 듣지 말라고 충고할 것 같다. 그도 아니라면, 동창회에 와서는 절대 옆길로 새서 부킹하지 말라고 하거나, 혹 부킹하면 부킹한 여자와 다시 동창회를 찾지 말라고 조언할 것이다. 아니면 군대를 가기 전에 총각 딱지를 떼고 싶으면 유곽을 갈지언정 부킹은 하지 말라고 말해줄지도 모른다. 동창회 와서 군대 간다고 말하지 말거나, 이미 총각 딱지를 떼고도 수십 번은 더 떼서 더 이상 흥미가 없다고 말하거나, 그도 아니면 앰프가 고장 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미리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충고할 수도 있다. 각설하고 이미 흔적이 새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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