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삼류가 만들고 일류가 누린다

논리글

by 희원이
“세상은 삼류가 만들고 일류가 누린다”_『드라마의 제왕』 중에서, 2014-10-15



이 말을 언뜻 보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흔히 삼류로 분류되는 일반인들이 노동을 통해 일군 세상을 재벌과 같이 통속적으로 일류로 분류되는 기득권층이 누린다는 것으로 연결해볼 수 있다.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해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미학적 첨단을 걸었던 자들을 위한 헌사일 수도 있다.

즉 이 관점대로라면 세상을 만드는 자들, 진정 창의적인 자들은 당대에 삼류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는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많은 유산이 당시 무시받던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믿음과 관련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음 세대에 그 유산을 넘겨줄 때, 이미 제도권의 승인을 받은 상태에서 이를 계승하는 후세대들은 그 시대의 일류로 별다른 천대 없이 인정받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선대가 잘 닦아놓은 길 위에 그 규칙에 맞춰 걸으면 된다는 것이겠다. 그러므로 실제로 삼류로 분류된 선대야말로 일류 중의 일류인 셈인데, 이러한 발언이 개척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분명함에도 온전히 진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과연 선대의 개척자들이 삼류였다고 할 만큼 그러한 현상이 절대적일까?

사실 일류의 무리에서 약간 빗나갔던 일류, 이를테면 인기 없는 일류, 문제적 일류, 혹은 이류쯤으로 분류될 만한 이들 중에서도 아주 많은 이들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위 경구가 완벽히 틀린 표현은 아니라서 삼류로 분류되었던 억울한 인물도 있겠지만 그만큼이나 일류로 온전히 평가받으면서 그러한 명성과 실질적 영향력이 후세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아서 어느 쪽이 더 많다고 지금 바로 말하기는 어렵ㄷ.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엄밀한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는 꼭 삼류끼리만, 그렇다고 꼭 일류끼리만 세상을 모두 만들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이쯤의 발언이라면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것에 근거할 때, 위 경구는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은 일류가 만들고 일류가 누리거나” 때로는 “세상은 일류가 만들고 삼류가 누리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속세의 삶을 부정하는 이라면 “세상은 삼류가 만들고 삼류가 누리는 것”으로 개탄하거나 그럼에도 “세상은 일류인 예수가 만들고 이를 몰라주는 삼류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주야장천 주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정확한 논증과 답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답을 유보할 수밖에 없고, 수많은 가능성만을 꼽은 뒤 그저 아무것도 온전하지 않음을 인지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위 경구를 아예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경구라는 것이 진실을 말한다기보다는 선언적인 효과 등 여러 부차적인 효과를 목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구는 대개 명쾌하고 단순하다.

즉 위 경구에서도 정답은 아니더라도 효과에 주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위안거리 혹은 인정욕구와 관련 있을 것이다.

사실 제도권에서 승리한 자들, 흔히 일류라고 불리는 이들은 이미 그 안에서 그들이 승리했음을 충분히 설명해주는 이론과 사례를 갖고 있으며 세간의 시선으로도 그것을 압도적으로 승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때로는 초연할 수 있거나 초연한 척할 수 있다. 그들은 고매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러한 과정을 제도권의 길 속에 마련하고 있으므로 그들은 그 안내된 길에서 길만 보고 걸으면 된다. 길은 그들을 압도한다. 그들이 걸었던 그 길은 존재감이 명확하다. 그들은 그 길의 수많은 행인 중 하나로 남거나 길의 확장에 또 다른 기여를 한 자로 남는다. 여전히 길은 위대하다. 그들은 길의 행인이 된다. 행인이 사라질지언정 길이 쉽사리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한번 생긴 길이란 그렇다.

반면 길을 처음부터 스스로 닦아야 하는 삼류로서는 스스로 인정욕구를 위해, 혹은 사멸의 위협으로부터 생존하려는 욕구에 시달린다. 그것은 인정투쟁이면서 스스로 존재했다는 것을 기록하는 의지이고 비유적인 생존욕구다. 그 길의,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그 길의, 그러므로 공인되기 위해선 그 공인을 거론하기조차 쑥스러운 순간에 그 길에 서야 하고 그렇게 어렵게 선 그 길의 첫 번째 행인이라면, 스스로, 알려야 한다. 알리는 것은 스스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초연한 자가 되지 못하는 대신 초연해질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 바탕을 마련하는, 정신의 후원자다. 수없이 실패한 후원자 무리 중의 하나로, 닦이다가 끊기는 길 사이로 뻗어가는 어떤 길의 행인이다.


말하자면 “세상은 일류가 만들고 일류가 누린다”는 당대의 일류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하고 진실도 아니기에 그 역할의 의미를 상실하지만, “세상은 삼류가 만들고 일류가 누린다”는 경구는 진실이 아니더라도 그러한 당대의 어떤 삼류들에게 약간의 위안과 함께 누군가는 삼류인 자신들을 인정해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선물해 주기에 일정 부분 의미를 얻게 된다.

그래서 “세상은 삼류가 만들고 일류가 누린다”가 경구로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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