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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Jul 21. 2023

부재에 관하여

낭독극 대본

[소개글]
- 우연히 AI성우 사이트를 알게 되면서 낭독극과 대본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 호기심이 생겨서 유튜브 조작법도 익힐 겸 직접 AI성우에게 말을 입혔다. 글을 쓰는 것보다 품이 많이 들어서 그리 오래지 않아 그만두었지만, 그 순간 말의 흐름, 구어체에 대해 공부하며 고민했다.
- 각 캐릭터에게 어울리는 말을 깊이 고민하는 것보다는, 내가 몽상처럼 생각하는 것을 다양한 시선에 부딪히며 밀리고 밀어내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일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주장의 스펙트럼을 통해서 사유를 해내고, 거기서 사건 등을 소설적으로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말로 드러낸다는 점이 개성으로 느꼈다. 
- 누군가 취재를 다니며 녹취를 하고 재구성하듯 다큐 낭독극 작업도 할 수 있을 듯하고,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고자 할 때, 그 말 소리를 입히는 취재 과정을 통해 조금은 수월(?)하게, 소설이나 학술서와는 다른 결의 정보가 드러나지는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기는 했다. 이것은 나중에 잠깐, 번호글이라는 스타일로 연결되기는 했다. 





#0

  등장 목소리 : 해설자, 은탁, 지은

  여기에 적힌 내용을 기본으로 하되 그 이외의 것은 PD 재량으로 연출한다. 심지어 대사도 성우 각자에게 맞게 어조를 변형하여도 된다. 성우의 성별과 이름도 임의적일 뿐이니, 원본에 붙들리기보다는 다양한 해석과 변칙적 응용을 존중한다.

 

 

#1


  해설자: 사진을 우연히 보았다. 사진 속에서는 맑은 날씨의 작은 집이 보였다. 흰 구름에 어울릴 하얀 빨래가 빨랫줄에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작은 테이블이 있다. 나무둥치로 만든 작은 의자 하나 있고 파란 파라솔이 태양광을 가려준다. 나무둥치에 앉으며 자신의 작은 집 쪽이 보인다. 모든 것이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다. 그리고 그 광경 안에는 아무도 없다.


  은탁: 누군가 부재한다는 건 어쩐지 쓸쓸한 일처럼 들립니다. 

  지은: 사실 ‘부재’는 표현보다는 ‘부자, 부채’라는 표현이 현실적으로 더 생동감 있어 보여요. ‘부재’라는 건 어쩐지 관념적이거나 애초에 없다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죠. 갑자기 부재하게 되었다면 그에 대해선 비극도 있겠지만, 그건 사실 남은 자의 몫이기도 해요. 부재한 존재는 더는 의식이 없을 테니, 그에겐 별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당장 현실에 있을 때는 부재 자체를 고민하기 어려울 만큼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했을 거예요. 더구나 인간은 매달 돈을 갚는 삶을 살곤 하죠. 누군가 말하길 인간은 평생 빚지고 산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은행 대출 갚으며 청춘을 보내곤 하죠. 그래서 "인간은 부채 낀 동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경제적 수세에 몰린 서민들로서는 부채가 훨씬 강력한 의미로 다가오죠.부채를 갚아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기이하게도 '부자'라는 존재가 조용히 증발해버리죠. 분명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돈을 쓸어담는 사람도 있을 텐데, 주변에선 보이질 않아요.원래는 분명 주변에 그런 사람들도 있었던 거 같은데, 부채를 요청하는 순간 어쩐지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부재하게 되죠.부자였던 사람이 알고 보니 저마다 사정이 있다면서 난색을 표하곤 해요. 공식적으론 모두 부자가 아니었던 것이 되죠. 블랙카드와 수표 수십 장이 지갑에 꽂혀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인가 봐요.누군가에게 갑자기 돈 빌려 줄 여력 있는 부자들을 우리 생각만큼 찾기는 어렵죠. 심지어 때로는 씨가 마를 정도로 부재해진다고 해야겠어요. TV에서나 보는 휠체어 탄 재벌이라든지, 드라마에 나오는 상처 받은 재벌2세는 그렇게 많지만, 그래서 외국인들은 한국의 대표이사를 드라마 여주인공 남자친구를 부르는 호칭쯤으로 착각하지만, 정작 주변에서 찾으려면 작은 알부자도 많질 않아요. 어쩌면 부자의 부재는 이렇듯 일상적이에요. 특히 돈을 빌리려 할 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죠.그럴 때면 부재가 조금 아쉽긴 해요.

  은탁: 사실 부재는 지은 씨의 말씀처럼 그리 대단한 무게를 지니지 않는 말일 수도 있어요. 그저 한자가 지닌 무게쯤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냥 ‘없다’라고 하면 때로는 일상적이고 때로는 문학적 여운을 주기는 할 거예요.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겁겠죠.

  지은: 그래요. “없다”란 표현이 더 자연스럽죠. 그러면 어쩐지 여러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고요. 부재한다, 라고 하면 무거운 쪽으로만 상상하고 마는데, 꼭 그런 상황만 있는 건 아니죠. 해설자가 설명한 상황만 보아도 그래요. 사실 “그 광경 안에는 아무도 없다”라고 마무리하는 바람에 조금 더 여운이 강하게 전달되지만, 꼭 그런 게 아닐 수도 있거든요. 그냥 “어쩌다 보니 지금 저기 없네”쯤으로도 볼 수 있다는 말이죠. 그 사람은 지금 전화를 받으려다 보니 그곳에 없는 건 아닐까요? 집 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프레임 바깥으로 나온 것일 수도 있죠. 혹시 저 사진을 찍은 사람이 저 풍경 안에 놓여 있어야 할 사람일 수도 있겠죠. 괜히 마지막 문장으로 ‘아무도 없다’를 배치하는 바람에 의미심장해졌네요. 이러고 보니 평이한 어조의 단어를 고르더라도 위치에 따라 의미의 무게가 달라질 수도 있겠어요.

  은탁: 사실 문장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그러니까 문장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냥 사진만 본다면 ‘아무도 없다’라는 의미는 사진에서 사람을 찾으려고 할 때만 유의미해지죠. 만일 사진에서 사람이 없다란 걸 인지하지만 않는다면 그냥 풍경이 있는 사진일 뿐이죠. 사진이라는 이미지 매체 안에서는 굳이 풍경 속에 사람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을 테니, 문장에서 '아무도'로 지정하지 않았다면 부재를 생각해야 하는 강박이 불필요해지죠. 서사에선 사람이든 의지를 지닌 존재가 없을 수 없죠. 그래서 사람이든 의인화된 동물이든 의지의 주체를 찾는 게 자연스럽지만, 사진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죠. 물론 의자나 테이블이나 빨래가 사람이 주로 쓰는 것이란 문화적 함의를 안다면,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질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그건 특별한 느낌까지는 아닐 거예요. 적어도 이 사진에서는 사람의 부재에 대해 어떤 특별한 징후를 암시하는 표현은 없거든요. 그러니 문단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무게와는 다른 정도의 의미, 매우 가벼운 의미, 다른 정보값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만을 지닐 겁니다. 사실 이 사진의 밝은 분위기를 보건대, 사진을 찍은 사람이 이 사진에 원래 있었어야 할 인물이라는 가능성을 제외하고서라도, 그냥 정말 전화를 받으려고 집으로 들어갔거나, 장을 보러 간 것일 수도 있어요. 마침 일을 다 마치고 차를 마시려다 보니 하필 차가 다 떨어져서 바로 옆 동네 구멍가게에 갔다고 해도 좋겠죠.

설마 어떤 인물이 사진 속 하늘을 날고 있지는 않겠죠. 그렇게 되면 갑자기 이 평범한 사진은 판타지나 슈퍼히어로물 장르로 분류될 거예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적어도 위치를 예측할 범위는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어요.

  지은: 맞아요. 해설자가 묘사한 사진의 징후를 보건대 지극히 일상적이라 할 수 있어요. 사실 비극의 징후로는 알맞지 않죠.

  은탁: 그건 맞아요. 문장일 경우에는요.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암시하는 의식적인 예술 사진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일상적으로 찍은 사진에서는 그러한 징후가 없어도 그것만으로는 그날의 일을 장담할 수 없어요. 오히려 어떤 사건 이후 아무런 의미를 띠지 않는 평이함에 특별한 의미가 덧칠되고 말죠. 예를 들어 그날 아침에 찍힌 아이의 잠자는 모습은 브이로그로 올리게 되지만, 그 모습이 마지막일 경우, 아무런 비극의 전조가 될 수 없을 그 순간은 비극이 되고 말죠. 서사에서처럼 마침 그때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깔리면서 천둥이 치고 밤처럼 되었다든가, 유리잔이 갑자기 깨진다는 일은 실제로 없을 확률이 높죠. 하필 그날따라 신발끈이 풀린 일이 있었거나, 강아지가 그날따라 아이를 보내기 싫어 많이 짖으며 낑낑댔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면 사실 다른 이유 때문일 텐데, 억지로 나중에 끼워 맞출 징후가 될 수 있을까요?

  지은: 동의해요. 해설자가 묘사한 사진은 그냥 일상적으로 있을 만한 사진이죠. 그런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위기는 생길 수 있어요. 영화라면 그랬을 거예요. 하필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걸 알리는 순간, 통화를 마치고, 저 사진을 찍고 사랑하는 이에게 전송한 순간, 여자는 실종되었을 수도 있어요.

  은탁: 신의 신호와도 같아서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자신의 모든 존재적 구성 요소들이 신에게로 전송된 것으로 상상해볼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적어도 판타지적이죠. 그런 상상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어쩐지 이 사진이 지닌 매우 일상적인 느낌을 존중해야 할 것 같아요.

  지은: 우리는 이미 함부로 상상을 하고 있으니 존중을 말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지 않을까요?

  은탁: 그럼 끝낼까요?

  지은: 아니오.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사실 일상적인 사진 안에서는 어떠한 불길한 함의를 발견할 수 없지만, 전후로 혹시 기이한 사건을 암시하는 징후가 있지는 않았을까요? 예를 들어 일식과 같은 것이요. 아주 잠깐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지만 사진속에는 전혀 담길 수 없는 것이요. 사진을 찍거나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는 동시적인 순간도 있겠지만, 시간의 흐름을 놓고 보면 그러한 연결고리의 서사가 생기니까요. 사진 그 자체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그 날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어벤져스>에서 지구의 상당수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듯이, 그렇게 증발해버린 건 아닐까요?

  은탁: 장난 그만합시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지은: 어? 장난 아닌데요. 전 우리가 어떤 특별한 서사 없이 아무런 징후 없이 살다가 갑자기 사라진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끝날 때는 클라이맥스일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고, 도입부일 수도 있고, 아무런 맥락 없이 간신히 고비를 넘긴 뒤 새로운 호흡을 고른 바로 그 순간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건 우리가 서사와 관계가 없거나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겠죠. 거기에 우리는 자꾸만 서사적 흐름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을 위로하는 발명품일 수도 있어요.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인생이고 싶지 않은 우리의 간절한 위로라고 봐요. 어떤 미친놈이 인류가 민폐라면 멸종시키려는데, 이걸 막으려는 슈퍼히어로에게도 우리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죠. 우린 그런 슈퍼히어로가 되지 못하지만 우리 스스로 서사의 작은 의미가 되어 적어도 우리 삶에 관한 한 어떤 중요한 역할이었음을, 그것이 비록 비루하더라도 어떤 흐름 속에서 우리가 있었음을 간직할 수 있겠죠. 우리의 서사를 지닌다는 것, 그건 어쩌면 과대망상에 빠진 슈퍼히어로를 향한 작은 저항의 몸부림일 수도 있겠죠. 물론 그 서사가 대단하다면 더욱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뜬금없는 존재가 되기는 싫어서 우리는 서사를 부여하고, 이를 위해 합의된 소우주적인 서사이자 대우주적인 서사인 종교를 믿기도 합니다.

 

 

#2

  지은: 잡담의 규모가 좀 커졌네요. 해설자의 사진으로 다시 돌아가 볼게요. 사실 이 사진에서 특별한 사건을 상상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오히려 아주 일상적인 삶을 상상하는 것이 좋죠. 일을 끝내고 안에서 차를 마시며 쉬는 여인의 모습은 어떨까요?

  은탁: 그렇죠. 그게 훨씬 맥락 있는 상상일 거예요. 그런데 해설자가 묘사한 사진이 사실은 동영상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중에 한 부분만 캡쳐된 자료라면요. 만일 실종 사건이 생겼고 수사관이 현장을 녹화하기 위해 동영상 기기를 활용한 것이라면, 사실 사건 발생 뒤의 시간에 녹화한 것이라 동영상이라는 점이 별 의미는 없어요. 그보다는 유튜브에 올리기 위해 누군가 집을 배경으로 요리 강좌를 하려고 했다면 동영상에 기록된 시간이 의미 있을 수 있어요. 동영상을 틀어놓고 뭔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진 것이라면, 그리고 촬영하던 시간이 무려 10시간이 지난 뒤, 배터리가 방전되어 화면이 꺼진 것이라면, 적어도 10시간 동안 그곳에 누가 왔다 갔는지 동영상을 찍으려던 인물이 그곳에 돌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돌아왔다면 동영상부터 껐을 테니 10시간 사이에는 없었다는 말이 되겠죠.

  지은: 그런데 촬영 중에 다양한 일을 했는데 하필 그 중 한 장면에서 부재한 장면이 사진화된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은탁: 그렇죠. 그런데 만일 이것이 동영상 그 자체라면 부재한 시간이 10시간이라는 걸 의미하고요. 그러면 뭔가 분명 심상치 않았던 것이죠.

  지은: 그래요. 하지만 불길한 걸 상상하고 싶진 않아요. 그저 누군가의 사고 소식을 듣고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라 경황없이 병원으로 달려가 간병하는 바람에, 그래서 깜빡한 것일 수도 있어요.

  은탁: 그래요. 그럴 수 있어요. 적어도 동영상 정도는 끄고 가겠지만, 정말로 사람이 살다 보면 경황이 없을 때가 한두 번쯤이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부탁을 할 정신이 들기는 할 거예요.

  지은: 하필 전화가 없는 곳일 수도 있어요.

  은탁: 그 역시 맞아요. 그녀가 실종되는 상상이란 그다지 바람직하진 않죠. 누군가의 불행을 상상하는 건 내 불행을 불러들이는 일이란 생각을 종종 하니까요. 지독한 건 그러한 불행과 상관없이 이 세상의 날씨는 제멋대로 좋았다가 제멋대로 짓궂어진다는 것이죠.

  지은: 세상이 우리를 챙겨줄 수는 없고 우주는 지구를 챙겨주지 않죠. 신이 인간을 챙겨준다는 상상만큼 낭만적인 상상은 없는 듯해요.

  그나저나 동영상 시간이 짧다고 해서, 그게 불길한 상상을 온전히 지워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꼭 열 시간 기록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짧은 순간에도 큰 사건이 생기곤 하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과정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그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부실의 시간이 길었을 뿐이죠. 그건 성수대교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일은 아주 짧은 순간이라서 더 특별해지죠. 그런 면에서 일상성은 때로는 시간의 길이와 무관하기도 하죠. 물론 이 사진에서는 동영상 시간이 짧다면 잠깐 어디를 갔다 오는 것으로, 예를 들어, 채소를 준비해놓지 못해서 잠깐 옆 가게에 가는 것처럼 상상해볼 수 있는데, 만일 물을 끓이고 있었다면, 다리미질을 틀어놓고 있었다면, 동영상 시간이 30분쯤 되는데, 그 시간 동안 부재한 기록만이 남은 채로 끊겼다면, 그 역시 불길하다 할 수 있어요. 시간이란 언제나 상황을 이기지 못하죠. 결정적인 것을 해내야 할 때는 짧은 10분일 수도 있는데, 그 시간을 놓치고 수십 년을 기다려도 모든 게 헛수고일 수도 있듯이요.

  은탁: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할 것 같아요. 아주 드문 감정 기복이 아니라면, 이런 기록을 남기는 순간에 갑자기 부재를 위한 슬픈 결정을 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지은: 모든 것을 오래도록 준비했다면, 마치 내일 볼 사람처럼 인사하고 사라질 수도 있어요. 인생이란 우리가 경험치로는 쉽사리 알 수 없는 거니까요. 언제나 서사의 주인은 각자이고 그 의미와 내용을 결정하는 건 개별적이죠. 그것은 그들에게 언제나 중요할 것이지만, 때로는 나비처럼 가볍고 즉흥적일 수도 있어요. 그 개별적 순간과 감정에 초대받지 않은 바에야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요. 

  은탁: 하기야 그렇겠어요. 생각해 보면 초대받고도 그 사람을 끝끝내 안다고 할 수 없을 때도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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