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종훈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복기하며 갈등한다. 이미 선택된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그에 대해 진웅에게 에둘러서 묻기도 하지만, 어차피 견디어야 할 일이지, 속시원한 말을 들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 진웅의 꿈과 패기가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질투도 나고, 유리한 위치에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란 짐작도 한다. 대개는 그러지 못하므로.
♬ 꼭 그래야만 했을까?
만일 아기를 살렸다면, 그래서 입양을 보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것을 1차 자리에서 진웅에게 농을 던지듯 물어봤다. 물론 그는 정확한 내막은 몰랐다.
“나도 모르지. 입양 보내는 건 갓난아기를 두 번의 섭리에 놓이게 한다는 거야. 한번은 신의 축복을 받은 숙명이고 다른 한번은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 숙명이지. 물론 두 번 다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점에서 같은 숙명이긴 숙명이지.”
뜨끔했다. 내 아기도 두 번에 섭리에 놓였었다. 한번은 신의 축복을 받은 숙명이고, 한번은 아버지에게 죽임당하는 숙명이었다. 물론 두 번 다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숙명적인 사건뿐이었다. 심지어 아이는 그마저도 깨닫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
진웅이 외치듯 말했다. 어색했는지 술 한 모금 홀짝였다.
“하하, 아서라 아서. 넌 벌써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안 돼.”
나는 손사래 쳤다.
“무슨 죄?"
“여자를 너무 많이 울렸어.”
진웅은 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넌 사랑을 몰라.”
“사랑을 모르는 것과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이니?”
과연 나는 정말 사랑을 몰랐을까? 누굴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떠올려보려 했다. 주희? 하나? 어쩌면 정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것도 죄지. 자신의 삶을 방기하는 죄! 삶 속의 관계를 방기하는 죄!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어.”
“칫. 고작 남녀 간의 유치한 사랑이라…….”
“절대 그렇지 않아. 또 단순히 이성 간의 사랑으로만 국한하는 게 아니야. 연결되어 있어.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지. 당연히 부모의 사랑도, 자식의 사랑도, 이웃의 사랑도 잘 모를 거야.”
“그건 억측이야!”
나는 반발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성실하게(?) 발끈했을까?
의아했다.
진웅은 주도권을 쥔 것으로 느꼈는지 의미심장하게 키득거렸다.
“물론 억측일 수도 있지. 널 골리려고. 그나저나 너 여자랑 잔 적 없지?”
“응?”
“거 봐.”
그는 내 반문을 수긍하는 말로 곧이곧대로 해석했다.
“네가 나보다 어리다는 증거야. 어른이 뭐냐? 어른이란 말이지 신라시대에,”
“됐다 됐어. 학교에서 배운 것 가지고 재탕하긴.”
나는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뎅강.
진웅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진웅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낄낄댔다.
“왜?”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기혁이 있잖아, 아무래도 총각귀신으로 죽을 것 같아서 청량리에 넣어줬거든. 근데 짜증나게 그날따라 카드가 안 되는 거야. 무슨 에러 났다고 하더니 기둥서방처럼 보이는 남자가 깡 해오려는지 카드를 달라고 하더라. 모르는 사람한테 카드 주기 뭐해서 그냥 돈 인출해 오겠다고 했지. 불안하잖아. 솔직히 그런 데 안 가봤거든. 늘 자급자족이라. 결국 기혁이를 먼저 방에 넣어두고 혼자 돌아다녔는데 24시간 현금인출기가 없더라.”
“그래서?”
나는 술잔을 든 채 마실 것도 잊고 물었다.
“뭐가 그래서야?”
“그냥 나왔지. 근데 진짜 웃겼던 건 그 녀석 방안에서 뭐 하고 있었던 줄 아니?”
“뭐 하고 있었어?”
“기도하고 있더라. 잔뜩 긴장해서 절박하게 기도하더라.”
“뭐라고 기도했대?”
“죄를 사하여주시옵소서. 죄를 사하여주시옵소서.”
진웅은 그 장면이 떠오르는지 계속 낄낄거렸다. 나 역시 크게 웃었다.
“역시 기혁답다. 기혁다워. 그나저나 기혁이 잘 지내니?”
2년 전에 잠깐 본 이후론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가끔 진웅을 통해 미국으로 유학 갔다는 근황을 듣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잘 다니고 있어. 한 달 전에 연락 왔는데 리포트 때문에 죽겠다는군.”
“하기야 MIT가 장난 아니긴 하더라. 언젠가 TV에서 본 적 있는데 사람 사는 곳 아니더라.”
“그렇지. 그래도 그것만 버텨내면 미래가 보장되지.”
“그렇지. 좋겠다. 난 어떡하나? 그 녀석 그렇게 잘 나갈 때 난 뭐냐?”
“잘 되겠지. 아직 3학년이잖아.”
“이제 4학년이지. 9월부터.”
“그래? 그런데 벌써부터 엄살은.”
“「벌써부터」라니? 학점을 메울 생각 하면 아찔하다.”
“넌 그래도 큰 말썽 안 부리고 지금까지 잘 지냈잖아. 그것만으로 대단할 뿐 아니라 네 몫의 운은 여전할 거야.”
“그래야지. 너도 잘될 거야. 유명배우 되면 모르는 척하기 없기! 너무 잘 돼서 모두 잊어버리는 것 아냐? 너나 기혁이나.”
“아니! 난 꼭 성공해서 모든 걸 기억할 거야.”
진웅은 힘주어 말하곤 내게 건배를 권했다. 건배!
♬ 짜식 조금 부럽네
평상에 놓인 진웅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고전적인 전화벨소리였다. ‘따르릉’ 하는. 나는 입가에 묻은 술을 손으로 닦아내며 슬며시 웃었다. 폴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봐서 수현인 듯했다. 진웅은 상대방에게 가끔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를 의식했는지 답변이 짧은 편이었다. 나를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1차 때도 수현에게서 두 번이나 전화가 왔기에 나는 이미 전화상으로 수현과 인사한 후였다. 목소리가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에게 반응하는 태도가 차분하고 이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성숙해졌다는 느낌도 주었지만 내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상대방이 너무 차분해도 맥이 빠진다. 적당히 경박하게, 적당히 촌스럽게 반가워하는 것. 오랜만에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할 때 바라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는 새우깡을 집어 들었다. 맥주를 모두 비우고 새우깡을 먹었다. 진웅은 슬리퍼를 신고 일어났다. 평상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내게 양해를 구하는 손짓을 했다. 나는 씩 웃었다. 라면이 불었다. 라면 국물이 눈에 띄게 준 대신 면발은 띵띵 불어있었다. 나는 끊긴 라면발을 쪽 빨아들이며 언덕에 닥지닥지 붙은 집들을 바라봤다.
진웅이 조금 부러웠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꿈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한때 대통령이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아무나 꾸어보는 꿈이니 꿈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리고 그 꿈이라고 하기 그런 꿈을 꾸어 본 이후로는 꿈이 없다. 정말이지 그럭저럭 살고 있다는 표현이 옳다. 모두가 예상할 만한 일반적인 삶. 통계적인 삶. 그러니 나 하나 없어도 상관없어 보이는 삶 속에서 나는 특별히 우월하지도, 특별히 열등하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항상 중상 정도는 유지했는데 그 점 때문에 오히려 ‘어정쩡한 상황’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럭저럭 하다가 적당히 성취하고 적당한 시기에 그럭저럭 질렸다. 대충 살았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꿈을 좇는 진웅이 부러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진웅이 이렇게 가출했음에도 집까지 마련할 수 있었던 건, 꿈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물론 진웅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럴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 부산에 있을 때 나도, 엄마도 그런 감정에 휩싸여있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앞으로는 불행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으니 때때로 침울해지고 예전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진웅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재력 있는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
진웅에게는 비빌 언덕이 있다. 그래서 그의 꿈을 위한 도전과 고민은 배부른 모험과 투정처럼 비치기도 했다.
아무리 진웅이 열심히 자신의 삶을 이겨냈다고 주장한들, 절박하게 어떤 것을 붙들어야 하는 사람과는 분명 달라 보였다. 홀어머니에 가난을 이기지 못한 채 동생들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채 이른 나이에 직장에 나가야 했다면, 그런 여건에서 홀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꿈을 성취하려 했다면, 일견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한심해 보이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대단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에게 불어 닥친 모든 역경을 견디며 누구에게도 기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원래 그런 것은 그렇게 오기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묵묵히 짊어지고는 자신의 꿈까지 놓지 않은 경우니, 아무래도 영화에서 흔히 본 것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진웅의 경우 조금 달랐다. 그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그를 바라보는 남들에게는 여유로운 꿈처럼 보였다. 그의 유복한 배경에 예술 정신이 아기자기한 장신구처럼 몸에 걸쳐진 모양새였다. 그는 아니라고 주장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미 그의 배경에 쏠릴 것이다.
그는 분명 되돌아갈 수 있는 도전자였다. 그는 누구에게나 소중해야 할 청춘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방식으로 누릴 것이다. 그리고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그의 성숙한 화해를 기다릴 것이다.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이미 남들은 그의 미래와 돌아올 길을 닦아놓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웅에게는 선택할 경우의 수가 많았다.
물론 질투다. 용기를 가질 수 없는 소심한 사람의 질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