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진웅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종훈은 의외다 싶다. 도저히 진웅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어찌 보면 진웅답게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은' 사랑을 시작한 듯하다. 믿기진 않았지만, 어쨌든 사랑에 빠진 것 같기는 했다. 거 참, 별일이네.
♬ 사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느새 평상에 앉아서 소주를 따던 진웅이 말을 걸었다.
“아니. 아무것도.”
“전화 좀 길었지?”
진웅도 자작하려고 소주병을 자신의 잔에 기울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지를 내밀어 그의 잔을 살짝 두드렸다.
“퉁!”
이번엔 진웅이 씩 웃었다. 나도 맥주캔을 일그러뜨리고 잔을 내밀었다. 진웅이 따라주었다.
“그때처럼 모두 모여서 술이나 실컷 마셨으면 좋겠다!”
진웅이 잔을 내밀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원샷!”
둘 다 소주잔을 비웠다. 서로에게 다시 따라주면서 진웅이 말을 이었다.
“가끔은 스무 살로 돌아가고 싶어. 지금까지 뭐 했나 싶을 때 말이야.”
“엄살은…… 지나가는 어르신들에게 그런 말 흘리면 지팡이로 제대로 맞겠군.”
나는 미소 지었다.
“그렇겠지?”
“그렇지! 나도 간혹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저 '우리'라는 느낌으로 묶어주던 순간을 즐기고 싶을 뿐이야.”
“고액과외 결사대에서 활동할 때도, 블루에서 동창회 할 때도 참 즐거웠던 것 같아. 공부는 좀 머리 아팠지만 말이야.”
그는 늘 고등학교 때 비밀과외를 했던 것을 비밀 결사대 활동이라고 표현했다.
“동창회 안 한 지 좀 되었나 보지?”
진웅에게 물었다.
“전에 말했잖아. 블루 문 닫고는 두 번 정도 더 하고 흐지부지되었다고. 우주가 있어야 했어. 그 녀석 주도력 하나는 끝내줬잖아.”
“사내 녀석 같았지.”
“그렇지. 여장부지. 재기발랄 성격 지랄 여장부.”
비아냥거리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건 좀 심하다.”
“녀석 좀 드세긴 했잖아. 말 한 번 터지면 당해낼 사람 없었지. 난 아예 귀를 틀어막았지만. 한 번은 귀를 막고 있는데도 쉴 새 없이 말하더군. 존경스러웠어. 그 고집이.”
진웅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너무 많이 피우는 거 아냐?”
아닌 게 아니라, 진웅은 거의 5분 간격으로 담배를 물었다.
“줄담배 정말 나쁘다고.”
“잔소리는 꼭 수현이 하는 거랑 같잖아. 폭연하지 않으면 스트레스 쌓인단 말이야.”
진웅은 불을 붙였다.
“네 마음대로 해라. 그나저나 수현이가 좀 맡아서 해보지 그랬어? 동창회, 이름이 뭐였더라?”
“모두모여.”
“맞다.”
바람이 시원하게 밀려왔다. 4년 전 푸른빛이 넘실대던 카페의 시원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걘 주도하는 거 좋아하지 않잖아. 혼자서 차분히 풀어가는 일에 맞는 체질이지.”
“그런가?”
“그래. 기억 안 나니? 크리스마스 때 꼬박꼬박 카드 써주고 밸런타인데이 때 우리가 불쌍하다고 꼭 남자친구에게 주는 것처럼 예쁘게 초콜릿 포장에서 돌렸잖아. 어려운 일 있으면 챙겨주고 같이 울어주던 거.”
“기억나.”
기억이 정말 나긴 했다. 그런데 그런 성격이기에 단체를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혼자 있는 것과는 별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수현이 단체를 잘 이끌지 그렇지 않을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너 수상해.”
수현에 대한 진웅의 호의적인 평가였다. 나는 블루에서 연인처럼 노닥거리던 진웅과 수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희 사귀긴 사귀었냐?”
“무슨 소리!”
진웅은 뜬금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반색했다.
“아니면 말고. 놀라기는.”
“놀라긴 누가 놀랐다고 그래?”
나는 살짝 웃으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붙였다.
“너도 만만치 않아. 담배.”
그러고 보니 진웅과 번갈아 가며 담배 피우기 시합하는 꼴이었다.
“야, 이 레종. 저온기 불빛만 파랗지 않았어도 안 피웠을 거야. 그때 저온기에 담배 넣고 파는 건 처음이었다고. 담배를 살까 한참 망설이는데 문득 저온기의 파란 불빛이 눈에 들어오더라. 블루가 떠오르더군. 그래서 샀어. 어쩐지 편안한 색깔, 블루의 색깔에 무너지고 만 거지.”
“핑계는…….”
하지만 속으로는 핑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핑계 아니야!”
진웅은 가볍게 힘주어 말했다. 나는 담배를 힘껏 빨았다. 연기를 내뿜었다. 대화 중에 자꾸 다른 생각이 끼어들어 난감했다. 연기와 함께 날려 보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내 아기, 아직 이름 없고 영원히 이름 없을 아이.
“수현이…….”
“응?”
“수현이 말이야…….”
진웅도 다른 생각에 방해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 좋은 녀석이야. 가끔은 정말 네 말처럼 사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럼 뭐가 문제야? 사귀면 되지.”
“아니, 그게 아니야.”
“또 뭐가 아니야?”
진웅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가 뱉었다.
“수현이는 정말 친구야. 그런데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수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니, 내가.”
댕, 급속히 커진 담배를 힘겹게 든 진웅이 담배로 내 머리를 타종하는 듯했다.
단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낯선 모습, 젠장, 진웅이 수줍어하는, 너무도 어색한, 순진무구한, 말 정말 안 나오게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 저 ‘여자 꼬시기 국가 대표’가 가증 이천 배짜리 표정도 지을 수 있다니! 하지만 나 스스로 녀석을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므로, 내 믿음이 사실이라면 도무지 녀석이 내 앞에서 그럴 이유가 없기에, 나는 적이 혼란스러웠다. 도, 대, 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데 그렇게 비장한 듯 표정 짓고 있냐?”
녀석은 소주를 한 잔 들이켜고 쓴웃음 지었다.
“많이 좋아하긴 하나 보다?”
말, 안 된다. 녀석이 카사노바로 물의를 일으켰던 명동 사장보다 못할 것이 없다며 '원나잇 한' 여자의 수를 들먹인다면 믿어 줄 용의가 있다.
그런데 전혀 딴 방향에서 허를 찔린 것이다. 순진한 표정으로 좋아한다니? 나는 한 방의 타종으로 장렬히 전사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죽, 전사하는 중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귀지도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저분하게 어디서 귀지를 파?”
진웅이 짧게 질책했다. 그의 질책에 반응하지 않고 소주를 한 잔 들이켜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같은 선수가 뭐가 문제라고 그렇게 진지하냐?”
“여자들에게 못되게 굴더니 벌 받는 것 같아.”
댕, 타종했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까지 빨고는 필터까지 범하려는 불똥을 때렸다. 마당 바닥에서 불똥이 꺼졌다.
“너답지 않게 약한 소리는.”
♬ 이게 말이 돼?
진웅은 약간 경직된 표정으로 연기가 눈을 찌르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여전히 줄담배를 피워댔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코미디 프로를 보는데, 갑자기 먹먹해져서 눈물이 흐르는 거야.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소리 내서 운 건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아. 거울에 보이는 내 꼬락서니가 참 우습더라. 그거 아니? 귀가 잡아낼 수 있는 주파수 대역이 극도로 좁아진 느낌. 휴대폰 소리에 맞춰진 거지. 그녀에게 혹시 연락이 오지나 않을까 생각하다가 벨 소리 환청을 듣는 경우가 허다해."
내 머리에는 타종이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전사 중'이었다.
“너, 진짜 사랑이란 걸 하는구나.”
말을 뱉었지만 어쩐지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 입에 제대로 붙어있던 것 같지 않았다.
“수현의 표현대로 하자면 진심으로 사탕하는 사람이지. 그런데 말이야, 사탕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어. 가만히 있는데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나는데 사탕은 달콤하지 쓰지는 않잖아. 그동안 못되게 굴었던 여자애들이 생각나더라. 내가 이제야 벌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일일이 전화해서 그냥 미안하다고 말했어. 웃기지? 별 쇼를 다 하고.”
정말 웃기는 상황이라 생각했다. 했지만, 진지하게 말하는 진웅에게 그의 말에 수긍하는 표시를 할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선 별 이상한 소리 다 한다고 실컷 웃어 젖혔겠지만 말이다.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전화받아주던 친구도 있고, 어색하게 답해주던 친구도 있었어. 아직도 내 전화를 받지 않거나 못 받는 친구도 있고. 아예 연락처가 바뀐 친구도…….”
나는 속으로 딴죽 걸면서도 진웅의 다음 말이 기다려졌다. 진웅이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일주일, 아니, 마음이 괴로웠을 한 달쯤은 혼자 술 마시고, 술 마시다 괴로우면 아무에게나 연락해 불러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여러 번 불려 나왔을 것이고 진웅 스스로 생각하기에 더는 불러내기에 염치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냥 방 안에 틀어박혀 한숨이나 푹푹 내쉬며 먹먹한 가슴을 추스르자니 막막했을 것이다. 결국에는 청승을 떨면서 휴대폰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을지도 모른다. 귀에서는 자꾸 진동소리나 벨 소리 환청이 들리거나 예전의 기억 혹은 잘 될 수 있었을 무수한 가정을 세우는 다소 한심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답답하여, 나를 불러내기로 마음먹은 것일 수 있다. 2년 만에 보게 되는 나를 말이다.
나는 문득 긴장했다.
“차라리 정 떨어지게 했으면 잊기엔 편했을 것을. 미련이 남으니 자꾸만 그립네. 묘해.”
진웅의 말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들렸다. 어쩐지 진웅이 방금 내뱉은 말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더는 타종 되거나 ‘전사 중’이 아니었다. 그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니? 도대체 누구기에…….”
나는 두 질문을 한꺼번에 쏟고는 잠시 연을 떠올렸다.
“민서라고 같이 연극 하는 극단후배야.”
젓가락으로 라면 국물을 저어봤지만 이미 라면발은 없었다. 나는 진웅의 빈 잔에 소주를 가득 부었다. 벌써 소주 한 병을 말끔하게 비웠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같이 생활하다가 보면. 예쁜가 보지?”
“그렇지. 그런데 사실 친구 애인이야.”
“응?”
“전부터 서로 알고 친하게 지내긴 했지.”
“같은 학교?”
“아니. 친구와 내가 동기야. 민서는 다른 학교. 극단은 친구와 민서 도움을 들어갔어.”
“아, 그렇군.”
나는 딱히 뭐라고 말하기 그랬다. 잔을 내밀었다. 건배했다. 오징어의 잔해들을 절반 이상 씹어 먹었고 새우깡 잔병들도 적었다. 게다가 소주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진웅이 새우깡을 집더니 맛있게 먹는다.
“응, 그렇지.”
과자 부스러기가 진웅의 입가에서 날파리처럼 날린다.
“좀 웃긴 상황이기는 해.”
진웅이 먼저 방어벽을 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소주병을 땄다. 진웅의 친구가 사건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판을 벌여줬군.’
“처음엔 그냥 친구였는데, 마음이 실수한 거지.”
“마음이 실수했다고?”
그 말이 진실이라고 느꼈지만 좀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하나 때문이었다.
“정말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정말 참아보려고 했는데, 술에 취해서 내게 「치사해요. 오빠 참 치사하다고요. 친해지고 싶은데.」라고 말하면서 뻑큐를 날리는데 그만 마음이 내려앉았어.”
그는 민서의 말투를 자신도 모르게 흉내 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절실한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뻑큐를 맞고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지?”
“우습지? 그만 그때 뽀뽀해버렸어.”
“특이체질인 것만은 분명하군.”
순간 그는 몹시 수줍어했다.
“하지만 그 친구 몹시 당황해 하더군.”
”누구? 민서라는 여자애, 아니면 민서 남자친구?”
“민서. 내 친구는 모를 거야, 아마도.”
나는 삼각관계의 덫에 빠진 진웅을 바라보았다. 난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뻑큐를 맞고 빠진 사랑이라면 어쩐지 더욱 난처할 것 같았다. 큐피트 화살이 떠올랐다. 민서라는 애, 손톱이 길까? 짧으면 화살촉이 뭉툭하겠군. 큐피트가 민서의 중지를 뽑아 활시위에 끼고 당긴다. 쏜다. 진웅의 심장에, 콱, 박힌다.
진짜 아프겠다. 내가 아픈 듯하다. 코르크 마개처럼 콕, 막힌 손가락을 뽁, 뽑으면 포도주색의 피가 콸콸 쏟아질 것이다. 좀 엽기적인 상상이다.
나는 술을 홀짝이고는 엉뚱한 상상을 털어버렸다. 진웅을 바라보았다.
‘이런…….’
심장을 다친 것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