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진웅의 연애사를 듣다가, 이야기는 하나와의 연애사로 넘어간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하나와 하나의 한국인 메이트인 (닉네임) 재스민. 셋이서 함께한 뉴질랜드 여행에서 하나와 종훈은 추억을 쌓는다. 엉겹결에 연인으로 확정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 오빠 우리 사귈까?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좀 알고 보니 오빠 참 괜찮다. 우리 사귈까?”
하나는 호주로 떠나기 전 그녀의 한국인 룸메이트인 재스민과 여행을 계획한다. 그러다 나도 동참하게 된 것이다. 뉴질랜드를 여행하던 그때 어느 날엔가 나는 하나에게서 장난 같은 고백을 받았다.
평소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하나였지만, 술을 마시고 기분이 한껏 달아오르면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말이 내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면, 그녀의 혀가 내 입으로 쏙 들어왔고,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쉽사리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키스였다. 살짝 입안에 머문 그녀의 담배 냄새. 역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맛이 내 입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텁텁하고 독한 맛이 나를 찔렀다. 어쩐지 담배를 괜히 가르쳐주었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하기야 가르쳐주었다기보다는 나를 흉내 내려는 하나의 행동을 굳이 막지 않았을 뿐이다. 나쁜 건 빨리 배우기 마련이다. 그때 내 잘못된 방임을 비난하는 것인지 이 설레는 작은 사건을 축복하는 것인지 주변에 우거진 나무들이 매미 소리로 합창한 것 같은 묘한 울림이 있었다. 정말 매미 소리였을지 모른다. 그렇게 기억에 남아있다. 얼떨떨하게.
로토루아의 호수였다. 뜻하지 않은 일이긴 했다. 물론 뜻하지 않은 것은 장소였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바다라고 할 만큼 큰 호수 타우포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어야 했다. 흠, 생각만 해도 설렜었는데…… 싱가포르만 한 호수 타우포.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에서 마음 놓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호수 근처의 아름다운 집과 요트를 보며 하나와 함께 낭만적인 추억을 쌓고 싶었다. 만일 키스할 기회가 있다면 타우포 호수를 바라보며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알다시피.
언뜻 생각하길 ‘유황온천의 달걀 썩는 냄새’를 맡으며 키스를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물론 해본 결과를 가지고 말하자면, (달걀 썩는 냄새를 다 지워내기도 전에 하긴 했지만,) 실은 별다른 냄새를 느낄 순 없었다. 몰입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유황온천의 달걀 썩는 냄새 같은 건 정말 싫었지만, 좀 괴로웠지만 익숙해지면 아무 냄새도 안 났다. 냄새라는 종자는 다 그랬다. 나쁜 냄새든 좋은 냄새든 지속되면 그 강도가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나마 본질적인 것을 취했다면 과정이나 형식이야 조금 달라져도 다행인 편이었다.
“혹시 알아? 로토루아 호수에 얽힌 마오리족의 전설.”
당연히 모른다. 모를 것이라 짐작했는지 하나는 쉴 틈 없이 말을 이었다.
“로토루아의 연가는? 흔히 말하는 그 연가 말이야.”
역시 모른다. 이번엔 알 것이라 생각했는지 약간 틈을 주었다. 아무 반응이 없자 하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비바람이 치는 바다 잔잔해져 오면 그대 언제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도 아름답지만 사랑스러운 그대 모습 더욱 아름다워라. 그대만을 기다리리.”
하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기억이 나는 노래였다. 나도 그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소박한 노래가 끝이 났다. 뒤늦게 따라 불렀던 나의 혀끝에 감미로운 가사가 여전히 묻어있는 듯했다.
“옛날 마오리족 중 이 호수를 두고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대. 그들이 각기 속한 부족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집안처럼 대립하고 있어서 그들은 몰래 만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들은 비바람이 치던 날을 무척 싫어했을 거야. 만날 수 없었을 테니.”
바다 같은 밤호수를 헤엄쳐 건너왔다고? 너무 하는군. 가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일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그 탓에 가끔 남자들은 피곤해진다. 하나가 로토루아 호수를 바라보는 눈빛에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혹시 나보고 호수에 빠져 죽으라는 건 아니겠지?
“오빠, 이 노래 나를 위한 노래 같지 않아?”
하나는 말했다. 다행히, 빠져 죽으라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로토루아의 연가가 자기 노래란다. 뭐든지 자기랑 연관시킨다. 하나는 주희처럼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만일 네가 뜨거운 사람이라면 여기서 날 사랑한다고 말해봐. 아무도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야.”
“네가 삼류작가냐? 그런 거 따라 하면 안 돼.”
물론 로토루아 연가의 주인공이 된 듯한 뜻하지 않은 낭만적 상황까지 연출하며 추억을 만들었으니 나쁠 건 없었다. 살짝 민망해서 문제지. 목소릴 가다듬고 말 뱉었다. 하지만 자꾸 머릿속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온전하게 내보내주지 않았다. 순간 입안에서 머리와 혀가 싸움을 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ㄹ’이 다쳐 획 하나가 자리를 잃었다. 간신히 글자에 매달리긴 했지만, ‘ㅌ’이 되었다.
“사탕해!”
로토루아 호수를 향해 외쳤다. 남자가 밤호수를 가로질러 헤엄쳐 올 거 같았다. 어, ‘나 그 여자 아닌데……. 나 남잔데요.’라고 해야 하나?
“사탕해? 재미있는 표현이다. 달콤하기만 하다면야, 사랑은 낭만 그 자체일 거야.”
하나는 즐거워했다. 나는 다시 한 번 호수를 향해 외쳤다.
“하나야, 사탕해.”
우리는 키스했다. 하나의 텁텁한 담배냄새가 내 침과 섞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우주가 뇌리에 스쳤다. 아마도 ‘사탕해’ 때문일 것이었다. 감미로웠다.